주간동아 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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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위에 떠있는 예술품”

외국 유명 다리 … 한 도시 상징이자 관광·문화상품으로 관광객 흡인

  • < 안형준 건국대 교수 · 건축학 >

    입력2005-02-16 16: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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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위에 떠있는 예술품”
    옛날 그리스-로마 시절부터 유럽에서는 다리를 하나의 완결된 조각품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짙었다. 다리 건설에 조각가나 미술가들이 참여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특히 황제나 왕들이 자신의 치적을 기념하기 위해 당대 최고의 미술가나 조각가들에게 다리 건설을 맡기기도 했다. 파리 센강의 대표적인 다리가 된 알렉산더 2세 다리가 바로 그러하다.

    로마 교황의 정식 명칭인 폰테헥스 막시우스의 말뜻이 ‘다리를 놓는 사람’인 것처럼 모든 문명 도시와 그 통치자들은 다리 건설에 그들의 문화적, 심미적 열정을 쏟아넣었다.

    물론 유럽에서 다리가 하나의 조각품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한강과 달리 강의 너비가 매우 좁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나라에도 너비가 좁은 하천에는 단순한 통행의 목적을 넘어서 미학적이나 신앙적 이념이 가미된 다리들이 있었다. 조선시대의 수표교, 살곶이 다리, 옥천교 등은 그 자체가 하나의 예술품이다. 그러나 근대화 기치를 빌미로 다리를 미술품으로 인식하는 우리의 옛 전통은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그 너비가 홍콩 섬과 구룡반도 사이의 바다 너비보다 넓은 한강에서야 이런 조각품 같은 다리를 세우기 어렵겠지만, 지방의 작은 하천이나 강의 지류 등에서는 얼마든지 미술품 같은 다리를 만드는 일이 가능하다. 그저 회색의 콘크리트 덩어리로 이쪽과 저쪽을 달랑 이어놓고 마는 전시성 행정이 사라진다면 말이다.

    “물위에 떠있는 예술품”
    다리에 대한 인간의 의지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예는 미국 뉴욕의 브루클린 다리이다. 맨해튼과 브루클린을 잇는 이 다리는 19세기 토목공사의 경이적인 성과물로, 최초로 강철 케이블을 사용한 교량이다. 건축가이자 철학자인 존 오거스터스 뢰블링이 처음 브루클린 다리 건설을 제안했을 때 전문가들은 하나같이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라며 고개를 저었지만, 뢰블링은 그의 아들 워싱턴과 함께 ‘꿈의 다리’ 건설을 시작했다.



    그러나 다리 건설은 곧 난관에 부닥쳤다. 뢰블링은 사고로 공사 초기에 사망했고, 아들 워싱턴마저 교각 기초공사 도중의 공기색전증으로 말을 할 수도, 움직일 수도 없는 불구가 되었다.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손가락뿐이었다. 다리 건설은 거의 물거품이 되는 듯했지만, 워싱턴은 침대에 누워서도 다리 완성에 대한 집념을 불살랐다.

    그는 다른 기술자와 의사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다가 아내 에밀리와 둘만의 일정한 규칙을 만들었다. 그가 그 규칙에 따라 에밀리 팔에 신호를 보내면 에밀리는 그 내용을 기술자에게 전달하는 식으로 공사가 진행되었다. 워싱턴은 브루클린 컬럼비아 하이츠에 있는 자신의 아파트에서 망원경으로 공사 현장을 지켜보며 감독했다. 브루클린 다리가 완공(1883년)될 때까지 워싱턴은 무려 13년 동안이나 손가락으로 지시를 했다. 인간 의지의 승리였다.

    브루클린 다리는 4개의 케이블에 의해 지탱되는 것으로, 자동차도에 못지않은 넓은 보행로가 특징이다. 이에 대해 존 뢰블링은 “밀집된 상업지역에서 그것은 무한한 값어치가 있을 것이다”고 예측했는데, 그 예측은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오늘날 브루클린 다리는 뉴욕을 방문하는 수많은 관광객들이 꼭 걸어서 건너가는 다리로 유명해졌다. 브루클린 다리에서 바라보는 맨해튼의 전경이야말로 훌륭한 관광 상품이다. 특히 석양 무렵 이 다리에서 바라보는 마천루의 실루엣은 뉴욕 관광의 하이라이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리에서는 매년 7월4일 미국 독립기념일에 화려한 불꽃놀이가 펼쳐진다.

    그 유명한 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는 물론, 미국 이민의 애환을 다룬 저우룬파 주연의 홍콩 영화 ‘가을날의 동화’에서도 이 다리가 주요한 무대로 등장한다. 윌리엄 볼컴의 오페라 ‘다리에서 본 풍경’ 역시 브루클린 다리가 직접적인 모티브가 되었다. 또한 유명한 보드카인 ‘앱솔루트’의 광고에도 이 다리가 등장했다. 만약 뢰블링 부자의 꿈과 의지가 없었더라면 뉴욕시는 이처럼 중요한 문화상품 하나를 얻지 못했을 것이다.

    “물위에 떠있는 예술품”
    관광상품으로 다리를 활용하는 데는 일본인들 역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것이다. 고베시 앞바다와 아와지섬 사이의 아카시 해협을 잇는 아카시 카이교는 주탑과 주탑 사이(주경간)가 1991m로 세계에서 가장 긴 현수교다. 규모 8도의 강진에도 견딜 수 있도록 내진 설계가 돼 있다. 다리 전체 길이는 3911m로, 지난해 11월20일 개통된 영종대교(4420m)에 못 미친다. 영종대교의 주경간은 500m이다.

    일본인들은 이 아카시 카이교 입구에 다리를 기념하는 기념박물관을 세워 놓았다. 1층 전시센터는 ‘사람-미래-다리’를 주제로 한 테마 공간이다. 다리의 축조 과정을 200인치 화면에 3차원 입체 영상으로 담은 영화관과 갤러리, 아카시 카이교를 100분의 1 규모로 축소한 모형 전시관 등 다채로운 콘텐츠를 소개하고 있다. 8층에는 고베 시내와 다리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전망대가 있다. 특히 해발 47m 높이에 마련된 전망실의 두 장의 투명유리판에 서면 바다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아찔한 느낌을 만끽할 수 있다. 이러한 전망실이나 기념관은 아와지섬과 시코쿠 도쿠시마를 잇는 오나루토 대교에도 만들어져 있어 많은 관광객들을 끌어 모은다. 오나루토 대교의 주경간은 876m이다.

    최초의 철교는 1779년 영국 사람들이 만든 ‘아이언 브리지’이다. 이후 제강기술과 구조역학이 날로 발전하면서 주경간이 1280m에 달하는 금문교가 탄생했다. 그만큼 강철 교량의 설계 및 시공기술도 함께 발전했다. 1826년 영국의 텔포드에 의해 현수교가 건설된 이후 현수교식의 긴 스팬을 만드는 기록이 나날이 발전하고 있다. 이러한 현수교식의 건설공법은 케이블의 재료 및 공법에 따라 발전되었고 1845년 헝가리 부다페스트에 있는 경간 202m의 케텐교가 건설된 이후 금문교, 브루클린 다리 등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했다. 지금은 아카시 카이교가 세계 제일의 현수교이지만, 다리도 고층건물과 마찬가지로 고강도 재료만 뒷받침된다면 4000m가 넘는 스팬의 현수교도 등장할 전망이다.

    최근 완성된 우리의 서해대교나 영종대교도 이들 다리 못지않은 풍광과 구조역학을 자랑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우리는 이런 자랑스러운 다리들을 관광상품화하지 못하고 있다. 일본인들처럼 다리가 잘 보이는 곳에 전망대를 만들어 놓거나 기념관을 세워놓았다면 그 많은 버스나 차들이 다리 위에 정차해 다리를 구경하는 어처구니없는 일들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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