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말 남북 정상회담 이후 한 세미나에 참석한 박재규 통일부 장관은 대뜸 “오늘 아침에도 집사람이 ‘어디 가건 제발 입 조심 좀 하라’고 신신당부하더라”면서 뉴스거리를 내놓지 못하는 사정을 이해해 달라고 양해를 구했다. 김대중 대통령의 방북을 수행해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을 마치고 돌아온 몇몇 인사들의 발언이 구설에 오른 것을 염두에 둔 말이었다. 청와대는 당시 기자단(50명)을 제외하고는 정상회담을 수행한 인사 130명 전원에게 ‘입 조심’을 당부하는 특별 서한을 보냈다는 후문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황원탁 외교안보수석이 한 강연회에서 정상회담 비화 한 토막을 꺼냈다가 파문이 일자 뒤늦게 발언 내용을 정정하는 소동이 빚어졌다. 황원탁 수석이 7월20일 오전 이북도민회 중앙연합회(회장 송병준)가 주최한 강연회에서 털어놓은 비화의 요지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정상회담 기간 중 일부 대학가의 인공기 게양과 관련해 검찰의 사법처리 움직임이 있자 이에 항의하면서 “듣자니 이번 정상회담은 만나는 데 의의가 있다는데 이렇게 만났고, 열렬한 환영도 받으셨으니 이만 돌아가시는 것이 좋겠습니다”고 말해 남측 수행원 모두가 적지 않게 당황했다는 것이다.
황수석은 이날 오후 청와대 기자실에 들러 “분위기를 재미있게 설명하다 보니까 사실보다 더 나갔다. 김위원장이 김대통령에게 ‘돌아가 달라’거나 ‘사과를 받겠다’는 이야기는 한 적 없다”며 자신의 오전 발언을 부인했다. 또 박준영 대변인도 “김위원장이 ‘돌아갈 것을 요구했다’는 표현은 인공기 게양건과 관련없고 공동선언 작성 당시 의견이 엇갈리자 ‘김대통령도 만남에 의미가 있다고 했으니 나머지는 다음에 하자’는 말은 했었다”고 해명했다.
김위원장의 항의는 설령 ‘농담조’의 말이더라도 정상회담 외교관행에 벗어난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문제는 황수석의 발언 시점이다. 정부는 바로 전날 6·15 남북 공동선언의 후속조처를 이행할 남북 장관급회담을 북측에 제안해 둔 상황이었다. 또 문제의 발언을 한 당일 오후에는 전날의 장관급회담 제안과 관련해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원회가 열리기로 돼 있었다. 황수석은 NSC의 간사이자 핵심멤버다. 김대통령은 이날 황수석의 발언으로 파문이 일자 황수석을 크게 질책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황수석을 잘 아는 사람들은 ‘황수석답지 않은 신중치 못한 발언’이라고 말한다. 오랜 군생활로 절도와 신중함, 그리고 과묵함이 몸에 배어 있는 황수석으로서는 뜻밖의 언행이라는 것이다.
황수석은 강원도 평창 출신으로 1958년 육사에 입교했다. 그리고 61년 5·16 쿠데타가 나자 당시 4학년 생도로 연대장이던 그는 생도 대표로서 ‘혁명지지 선언’을 낭독하기도 했다. 그 후 62년 소위(육사 18기)로 임관해 김계원 육참총장의 부관에 이어 79년 12·12 사태 당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의 수석부관을 지냈을 만큼 군문에서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그러나 12·12를 계기로 5공 이후 줄곧 불운한 시절을 보내야 했다.
한미 야전군사령부 작전참모(86년), 한미연합사 참모장(89년), 유엔군사령부 군사정전위 수석대표(91년) 등이 95년 그가 소장으로 예편할 때까지의 주요 군경력이다. 그의 뛰어난 영어실력 때문이기도 했지만 주로 ‘외국군 언저리’에서 빙빙 돈 셈이다.
황수석은 95년 소장 예편 후 외무부 본부대사, 파나마 대사(96년) 등을 지내다 DJ 정권 들어 99년 5월 통일부 장관으로 임명된 임동원 외교안보수석의 천거로 그 후임자로 발탁됐다. 황수석은 NSC 멤버인 임동원 현 국정원장의 육사 5년 후배이자 조성태 국방부 장관의 2년 선배다. 정상회담 공식수행원에서 빠진 조성태 장관과 이정빈 외교통상부 장관을 제외하고는 공교롭게도 NSC를 주재하는 박재규 장관측 멤버들이 모두 정상회담 관련 언행으로 구설에 올랐다. 7월29일로 예정된 남북 장관급회담에서 북한측이 “원탁 동무 그동안 욕봤소”라는 ‘농담조’로 회담을 시작하지는 않을지….
그런데 이번에는 황원탁 외교안보수석이 한 강연회에서 정상회담 비화 한 토막을 꺼냈다가 파문이 일자 뒤늦게 발언 내용을 정정하는 소동이 빚어졌다. 황원탁 수석이 7월20일 오전 이북도민회 중앙연합회(회장 송병준)가 주최한 강연회에서 털어놓은 비화의 요지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정상회담 기간 중 일부 대학가의 인공기 게양과 관련해 검찰의 사법처리 움직임이 있자 이에 항의하면서 “듣자니 이번 정상회담은 만나는 데 의의가 있다는데 이렇게 만났고, 열렬한 환영도 받으셨으니 이만 돌아가시는 것이 좋겠습니다”고 말해 남측 수행원 모두가 적지 않게 당황했다는 것이다.
황수석은 이날 오후 청와대 기자실에 들러 “분위기를 재미있게 설명하다 보니까 사실보다 더 나갔다. 김위원장이 김대통령에게 ‘돌아가 달라’거나 ‘사과를 받겠다’는 이야기는 한 적 없다”며 자신의 오전 발언을 부인했다. 또 박준영 대변인도 “김위원장이 ‘돌아갈 것을 요구했다’는 표현은 인공기 게양건과 관련없고 공동선언 작성 당시 의견이 엇갈리자 ‘김대통령도 만남에 의미가 있다고 했으니 나머지는 다음에 하자’는 말은 했었다”고 해명했다.
김위원장의 항의는 설령 ‘농담조’의 말이더라도 정상회담 외교관행에 벗어난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문제는 황수석의 발언 시점이다. 정부는 바로 전날 6·15 남북 공동선언의 후속조처를 이행할 남북 장관급회담을 북측에 제안해 둔 상황이었다. 또 문제의 발언을 한 당일 오후에는 전날의 장관급회담 제안과 관련해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원회가 열리기로 돼 있었다. 황수석은 NSC의 간사이자 핵심멤버다. 김대통령은 이날 황수석의 발언으로 파문이 일자 황수석을 크게 질책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황수석을 잘 아는 사람들은 ‘황수석답지 않은 신중치 못한 발언’이라고 말한다. 오랜 군생활로 절도와 신중함, 그리고 과묵함이 몸에 배어 있는 황수석으로서는 뜻밖의 언행이라는 것이다.
황수석은 강원도 평창 출신으로 1958년 육사에 입교했다. 그리고 61년 5·16 쿠데타가 나자 당시 4학년 생도로 연대장이던 그는 생도 대표로서 ‘혁명지지 선언’을 낭독하기도 했다. 그 후 62년 소위(육사 18기)로 임관해 김계원 육참총장의 부관에 이어 79년 12·12 사태 당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의 수석부관을 지냈을 만큼 군문에서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그러나 12·12를 계기로 5공 이후 줄곧 불운한 시절을 보내야 했다.
한미 야전군사령부 작전참모(86년), 한미연합사 참모장(89년), 유엔군사령부 군사정전위 수석대표(91년) 등이 95년 그가 소장으로 예편할 때까지의 주요 군경력이다. 그의 뛰어난 영어실력 때문이기도 했지만 주로 ‘외국군 언저리’에서 빙빙 돈 셈이다.
황수석은 95년 소장 예편 후 외무부 본부대사, 파나마 대사(96년) 등을 지내다 DJ 정권 들어 99년 5월 통일부 장관으로 임명된 임동원 외교안보수석의 천거로 그 후임자로 발탁됐다. 황수석은 NSC 멤버인 임동원 현 국정원장의 육사 5년 후배이자 조성태 국방부 장관의 2년 선배다. 정상회담 공식수행원에서 빠진 조성태 장관과 이정빈 외교통상부 장관을 제외하고는 공교롭게도 NSC를 주재하는 박재규 장관측 멤버들이 모두 정상회담 관련 언행으로 구설에 올랐다. 7월29일로 예정된 남북 장관급회담에서 북한측이 “원탁 동무 그동안 욕봤소”라는 ‘농담조’로 회담을 시작하지는 않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