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26

2012.02.27

“아버지 영정과 제단 치워라 최태민이 시키는 대로 해라”

  • 한상진 기자 greenfish@donga.com

    입력2012-02-24 17:5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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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육영수여사추모사업회 박근혜 회장의 폐쇄 통고

    ● 박근혜“그런 사실 자체가 없었다”


    “아버지 영정과 제단 치워라 최태민이 시키는 대로 해라”

    경북 문경에 있는 박정희기념관 ‘청운각’.

    지난해 8월 경북 문경시는 박정희기념관 ‘청운각’을 추모공원으로 조성한다고 발표했다. 청운각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37년부터 약 3년간 문경보통학교 교사를 지낼 당시 거처했던 곳이다(상자기사 참조). 청운각은 1976년경 문경의 한 사업가가 처음 기념관으로 꾸몄고, 1978년에는 박 대통령이 직접 다녀가기도 했다. 최근까지 박 전 대통령 제자들이 청운각에서 제사를 지내왔다.

    청운각은 지난 30년간 우여곡절을 겪었다. 박근혜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이하 비대위원장)이 박정희·육영수기념사업회 회장을 맡던 1989년에는 청운각을 관리하던 박 전 대통령의 제자와 박근혜 회장이 운영 문제를 두고 볼썽사나운 공문을 주고받기도 했다. 당시 박 회장의 측근이던 최태민 목사가 이 사건에 깊이 간여했다는 증언도 나온다. 박 회장과 최 목사가 공문 등을 통해 “박정희 기념관인 청운각에 걸린 박 전 대통령 영정과 제단을 떼라”고 주장했고 청운각을 관리하던 박 전 대통령 제자가 “그렇게는 못 한다”고 버텼다는 것이다.

    ‘주간동아’는 청운각을 둘러싼 지난 30년간의 역사 속으로 들어갔다. 1980년대부터 90년대 초까지 청운각 관리를 맡았던 박 전 대통령의 제자이자 박정희·육영수 숭모회 회장을 지낸 이순희(83) 씨 등을 만나 청운각을 둘러싼 그간의 사연을 들었다. 관련 문서들도 찾아냈다.



    박정희 제자가 사들여 기증했던 기념관

    1985년 육영수여사추모사업회(이하 추모사업회)는 청운각을 매입해 보존해달라는 청운각보존관리위원회 설립 추진대표 이순희 씨의 진정서를 접수했다. 그 당시 추모사업회 이사장은 이호 전 법무부 장관이었다. 그러나 추모사업회는 기념관을 매입할 자금이 없었다. 결국 이씨는 자신의 이름으로 부동산을 매입해 추모사업회에 기증했다. 이씨는 “내 명의로 가지고 있으면 내가 죽은 후 자식들이 이 기념관을 팔아버릴 것 같아서 추모사업회에 기증하기로 마음먹었다”고 말했다.

    이씨가 기념관 매입을 추진하던 1985년 추모사업회는 기념관을 넘겨받으면 관리권을 이씨 측에 주고 매달 운영 경비를 지불한다는 약정서를 이씨와 맺었다. 1985년 8월 작성된 약정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았다.

    # 1. 1985년 8월 본 재단은 문경 소재 박정희대통령 각하 기념관 청운각을 영구히 보존키 위하여 관리 보존에 필요한 일절의 관한 사항을 관리보존위원회 대표 이순희, 이종기 두 남매에게 위임한다.

    2. 금후부터 청운각 보존을 위한 관리비 일절을 본 재단에서 부담할 것을 보장한다.


    1985년 10월 5일 이씨가 작성해 추모사업회에 전달한 ‘기념관 기증각서’에도 다음 내용이 들어 있다.

    # 위 부동산을 영구히 보존키 위해 재단법인 육영수여사추모사업회 측에 기증합니다. 단 추모사업회 측은 기증자인 이순희에게 관리권을 주고 그에 따르는 제반 관리비 일체를 책임지기로 결정하여 기증각서를 드립니다.

    이씨가 기념관을 최종적으로 매입한 시점은 1987년 8월 28일이다. 그 당시 이 기념관은 문경시 소유였다. 이씨는 “기념관을 매입하려고 도교육청, 문경시, 문교부 등 관계기관을 다니며 일을 처리하다 보니 2년여의 시간이 걸렸다. 경상북도 교육청은 개인에게는 그 땅을 팔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매매가 이루어지기 전에 추모사업회 측과 기증각서, 약정서 등을 체결한 것이다. 기증각서를 교육청에 제출하고 나서야 매각 허가가 났다. 당시 돈으로 2400만 원을 주고 기념관을 매입했다”고 말했다.

    추모사업회는 청운각을 기증받은 뒤 약정서에 적힌 대로 관리비를 이씨 측에 보냈다. 그러나 처음 약속한 것보다 턱없이 적은 액수였다고 한다. 이와 관련해 이씨는 “매달 300만 원 정도의 관리비를 받기로 했는데, 추모사업회가 돈이 없다면서 매달 30만 원만 보냈다. 관리인 두 사람의 월급, 공과금과 유지 보수비용을 감안하면 한 달에 최소한 300만 원은 있어야 했다. 부족한 돈은 나와 내 동생이 개인 돈으로 충당했다”고 말했다.

    “천만 번 고마워 해야 할 박근혜 씨가 결제한 데 대해…”

    또한 이씨는 “그나마 추모사업회가 보내주던 지원금 30만 원도 9개월여 만에 중단됐다”고 말했다. 5개월 정도 아무런 소식이 없자 이씨는 이 문제를 상의하려고 당시 박근혜 회장의 측근이던 최 목사를 찾아갔다고 한다.

    그러나 이씨 측과 추모사업회의 사이가 나빠진 결정적 이유는 돈 때문이 아니었다. 관리비 문제로 갈등을 빚을 즈음부터 추모사업회 측이 ‘기념관에 있는 박 전 대통령의 영정과 제사용 제단을 치우라’는 내용의 공문을 이씨 측에 여러 차례 보낸 게 더 큰 이유였다고 이씨는 주장한다.

    그 당시 추모사업회는 이씨 측에 청운각 폐쇄를 통보하는 공문(통고문)을 2~3차례 보냈다고 한다. ‘박 전 대통령의 영정과 제단을 없애지 않으면 청운각을 폐쇄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이씨는 당시 추모사업회가 보낸 통고문 중 하나를 ‘주간동아’에 공개했다. 1989년 8월 24일 작성된 통고문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 통고문

    발신인 : 재단법인 육영수여사추모사업회

    수신인 : 청운각 관리인 이종기 귀하

    육영수여사추모사업회는 귀하에게 박정희대통령각하의 영정과 제단을 철거하시고 이 통고를 무시하면 청운각에 대한 폐문조치를 하겠슴 이에 통고합니다.

    1989. 8. 24

    재단법인 육영수여사추모사업회 회장 박근혜


    이씨와 추모사업회 측이 청운각 운영 문제로 갈등을 빚을 당시는 박근혜 회장이 1975년 설립한 ‘육영수여사추모사업회’를 ‘박정희·육영수기념사업회’로 개편한 뒤였다. 박 회장은 1988년 10월 26일 ‘박정희대통령 육영수여사 기념사업회’(이하 기념사업회)를 발족하면서 신문에 광고를 싣기도 했다. 당시 신문광고는 이순희 씨를 기념사업회 자문위원으로 소개했다.

    이씨 측은 추모사업회가 통고문을 보낼 때마다 의견서(意見書)나 계고서(戒告書)를 기념사업회에 보내 항의를 표시했다. ‘왜 딸이 부친의 업적을 기리는 기념관을 폐쇄하려 하느냐’는 내용이었다. 이씨는 자신들이 기념사업회에 보냈던 의견서(1989년 6월 30일자)와 계고서(1989년 8월 4일자)를 지금도 보관하고 있다. 그중 계고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았다.

    # 기념사업회 임원여러분께

    일차 및 이차에 걸쳐 귀회에 청운각폐쇄조치에 대한 부당성을 다각도로 말씀드림과 아울러 그에 따른 대화를 요청한 지 일개월여가 지났으나 하등의 반응도 없이 묵살일변임으로 부득이 아래와 같이 최종적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 아래-

    1. 폐쇄조치 통보행위는 소유권 행위의 일환임으로 공부상 소유권자인 귀회의 대표 박근혜씨를 상대로 소를 부득이 제기치 않을 수 없습니다.



    3. 천만번 고마워해야 할 박근혜씨가 결재한데 대해 이해가 안 됩니다.

    4. 추모하는 스승의 육친을 끝내 소의 대상으로 삼아야 할 불행한 현실과 아픔은 전적으로 귀회의 잘못으로 인한 것임을 밝혀 둡니다.



    7. 7월 31일자로 폐문하였습니다.


    “아버지 영정과 제단 치워라 최태민이 시키는 대로 해라”

    박정희·육영수 기념사업회의 청운각 폐쇄 통보에 맞서 이순희 씨가 기념사업회 측에 보낸 의견서와 계고서.

    이씨는 청운각 문제가 원만히 해결되지 않자 최 목사와 박근혜 회장을 찾아갔다. 1989년 11월경이었다. 먼저 최 목사를 찾아가 항의했다. 이씨는 최 목사에게 관리비 지급을 중단한 이유, 영정과 제단을 없애라는 공문을 발송한 이유 등을 따져 물었다. 그러나 최 목사는 “영정은 우상이다. 제사도 지내지 마라.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라”며 이씨에게 면박을 줬다고 한다(16쪽 이순희 인터뷰 참조). 이씨는 최 목사를 만난 며칠 뒤 박 회장도 만났다고 한다. 당시 자리에는 기념사업회 사무국장 한○○ 씨 등이 배석했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박 회장도 이씨에게 “최태민 목사가 시키는 대로 해라. 안 그러면 청운각을 폐쇄시키겠다”고 통보했다는 것이다. 이씨에 따르면, 기념사업회 측은 당시 청운각에 대한 폐쇄를 통보한 이후 실제로 폐쇄됐는지를 확인하려고 기념사업회 관계자 조○○ 씨를 문경으로 내려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기념사업회 측의 바람과 달리, 청운각은 이후에도 이씨 등의 노력으로 명맥을 이어갔다. 이씨는 “기념사업회와 갈등을 빚으면서 얼마간 폐쇄를 했지만 다시 문을 열었다. 내 돈을 들여가며 계속 청운각을 운영했다. 1992년 박근령 육영재단 이사장이 사람을 보내 관리권을 빼앗아갈 때까지 내 가족이 청운각을 관리했다”고 말했다. 이씨는 “지금도 누가 청운각 폐쇄를 결정해 통보했는지 궁금하다. 자기 아버지의 기념관을 딸인 박근혜 씨가 폐쇄하라고 지시했다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벌써 20여 년이 흐른 사건이지만, 청운각을 둘러싼 과거사는 현재 시점에서도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박 비대위원장과 최 목사의 관련성 때문이다. 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 과정에서 박근혜 후보를 가장 크게 괴롭힌 사안은 최 목사에 대한 문제였다. 최 목사가 육영재단과 기념사업회에서 전횡을 저질렀고 박 비대위원장이 이를 묵인하거나 동조했다는 의혹이 발목을 잡았다. 당시 박 후보는 이런 의혹에 대해 “전혀 사실이 아니다. 최 목사는 육영재단 업무에 관여한 사실이 없다”고 반박한 바 있다. 2007년 7월 19일 열린 한나라당 대선후보 결정을 위한 검증청문회에서는 청문위원들과 박 비대위원장 사이에 다음과 같은 대화도 오갔다.

    박근혜, “최 목사는 추모사업에 관여하지 않았다”고 2007년 주장

    ▼ (박근혜 후보가 1990년 11월) 육영재단 이사장을 퇴임한 이유와 관련해 최태민 목사와 그의 딸 최순실이 박 후보와의 친분을 과시하고 (육영재단에서) 전횡을 일삼아 직원들이 반발한 게 원인이라는 말도 있다.

    “어머니 기념사업을 육영재단에서 같이 했고, 당시 최 목사가 기념사업 일을 도왔다. 오해가 있어서 ‘최태민 물러가라’는 식으로 데모가 있었지만, 최 목사나 딸이 결코 육영재단 일에 관여한 적이 없다.”

    ▼ 최 목사가 육영재단 고문의 직함을 갖고 이사장인 박 후보에게 결재를 받기 전에 먼저 결재를 받을 정도로 재단 운영에 깊이 관여했다는데.

    “전혀 사실이 아니다. 제가 무능하다거나 일을 잘 못한다고 폄하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최 목사가 고문직을 직접 한 것이 없고, 최 목사가 연로해 고문으로 예우해서 부른 것뿐이다.”

    2007년 박 비대위원장의 해명이 모두 사실이라면, 1989년 당시 청운각 폐쇄 결정은 박 비대위원장이 직접 내린 것으로 볼 수 있다. 종교를 가진 적이 없다고 밝혀왔던 박 비대위원장이 왜 부친의 영정과 제단을 이유로 기념관 폐쇄 결정을 내렸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당시 폐쇄 결정이 박 비대위원장이 아닌 최 목사의 판단에 따른 것이라면 기념사업회의 중요 재산이자 상징물이던 청운각의 운영에 최 목사가 깊이 간여했다는 증거가 된다.

    ‘주간동아’는 2월 21일 박 비대위원장 측에 청운각 관련 내용을 담은 질의서를 보냈다. 왜 청운각 폐쇄 통고를 했는지, 최 목사가 당시 청운각 폐쇄 문제에 관여했는지 등을 알기 위해서였다. 2월 22일 박 비대위원장 측 관계자는 “질의서를 잘 받았다. 박 비대위원장에게 전달하겠다”는 답장을 보내왔다. 그리고 2월 23일 저녁 박 비대위원장 측은 “이순희 씨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이씨가 주장하는 그런 사실 자체가 없었다”고 밝혀왔다.

    박정희기념관 ‘청운각’은?

    교사 부임 후 2년 9개월간 자취와 하숙…문경시에선 “추모공원 조성”


    “아버지 영정과 제단 치워라 최태민이 시키는 대로 해라”

    추모공원으로 조성 중인 청운각.

    1937년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한 박정희 전 대통령은 그해 4월 문경보통학교에 교사로 부임했다. 청운각은 교사 시절 박 전 대통령이 2년 9개월간 자취와 하숙을 했던 자리다. 당시 이곳에는 주막이 있었다. 우리말과 글을 가르치지 못하던 일제강점기였지만, 박 전 대통령은 밤마다 제자들을 이곳으로 불러들여 한글과 한민족의 역사를 가르쳤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1940년경 이런 사실이 일본인 교사에게 발각된 뒤 박 전 대통령은 일본인 교사들에게 집단폭행을 당하고 학교에서 쫓겨났다. 박 전 대통령의 한 제자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억했다.

    “집단폭행을 당해 코피를 많이 흘리셨다. 흰 와이셔츠가 빨갛게 물들었다. 선생님이 운동장 한가운데 서서 학교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며 ‘총칼을 차고 돌아와 반드시 복수하겠다’고 소리 지르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선생님은 그 길로 만주로 떠나셨다.”

    만주 신경군관학교와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박 전 대통령이 국내에 들어와 가장 먼저 찾은 곳 중 하나도 바로 청운각이었다. 당시를 기억하는 한 제자는 “선생님은 자기가 쓰던 하숙방 마루에 칼을 꽂아놓고 앉아서 문경국민학교장과 군수, 경찰서장을 불러들였다. 이들이 선생님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일본말로 ‘잘못했다. 용서해달라’고 빌었던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대지 1079㎡, 총면적 78.7㎡의 초가집인 청운각에는 박 전 대통령 및 육영수 여사의 영정과 교사 재직 당시 찍은 사진, 책상, 가방 등 유품이 전시돼 있다. 지난해 문경시는 시비 15억 원가량을 투입해 청운각 주변을 매입하고, 추모관과 분향소 등을 갖춘 추모공원으로 조성한다고 밝혔다. 문경시청 관계자는 “추모공원은 3월 말 준공한다. 공원에 들어설 추모관에 박 전 대통령의 공적과 일상생활이 담긴 영상 스크린을 설치해 역사 교육장으로 활용할 예정이다. 박근혜 비대위원장 등 유가족이 참석해주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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