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69

2011.01.03

‘착한 중독’ 신바람 피가 뛰고 있다

한국인 신바람에 대한 정신의학적 분석…존재감 확인과 자기만족, 기분 좋아지면 더 가열

  • 손석한 연세신경정신과 원장·의학박사

    입력2011-01-03 10: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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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착한 중독’ 신바람 피가 뛰고 있다
    “신바람 나는 일터를 만들자” “한국인이 신이 나서 일하면 누구도 못 당한다”는 말을 많이 들어봤을 것이다. 신바람이란 단어를 사전에서 찾으면 ‘신이 나서 우쭐우쭐하여지는 기운’이라고 돼 있다. 신이 난다는 것은 어떤 일에 흥미를 느껴서 열정을 쏟는 상태를 말한다. 한국인은 왜 신이 나면 놀라운 일을 해낼 수 있을까. 정보통신(IT) 분야 세계 최고 기록, 자동차 및 조선 산업의 눈부신 발전, 월드컵 때의 함성, 국제통화기금(IMF) 시절의 금 모으기, 축제와 같았던 촛불집회 등은 그야말로 신이 나고 흥을 느껴서 자발적으로 행동한 결과였다. 이런 한국인의 신바람은 어디서 유래했으며, 앞으로 어떻게 될까. 또 무엇이 우리의 신바람을 일으키는가.

    우리 민족은 예부터 농경사회를 기반으로 집단거주 방식의 삶을 살았다. 그러다 보니 함께 씨앗을 뿌리고 수확하며, 보릿고개의 배고픔도 함께 넘겼다. 즐거움과 괴로움을 공유하는 집단생활이야말로 신바람의 원동력이었을 것이다.

    ‘도덕지능’ 높을수록 더 큰 만족 추구

    날씨가 모질어 곡식이 걱정돼서 들판에 나가보면 옆집 사람이 나와 있다. 조금 있으면 마을 주민이 모두 모여든다. 서로 ‘으샤, 으샤’ 하면서 기운을 북돋운다. 수확이 잘돼서 먹을 것을 싸들고 마을 광장으로 향한다. 역시 제각각의 먹을거리를 들고 모인다. 서로 ‘영차, 영차’ 하면서 기분을 한껏 낸다. 비슷한 얼굴에 같은 억양과 말투를 쓰는 사람들끼리 느끼는 동질성이 이들을 뭉치게 만든다. 가까운 시골에만 가도 여전히 남아 있는 전통적인 한국인의 삶 자체다. 이런 삶이 주기적인 신바람을 불러일으켰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개인 차원에서 신바람이 나게 하는 요인은 무엇일까. 이를 알면 기업이나 학교에서도 신바람 나는 직장과 학교를, 아니 ‘신바람 대한민국’을 만들 수 있다. 그것은 첫째, 외부로부터 인정을 받음으로써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려는 심리다. 나라는 사람은 세상의 한 구성원이다. 나를 둘러싼 세상은 다른 사람들로 이뤄져 있다. 따라서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는다는 것은 대단한 심리적 만족이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했던가. 아이가 부모나 교사에게 칭찬을 받으면 신바람이 나서 그 일을 더욱 열심히 하듯, 어른도 주변 사람들에게 칭찬받으면 신바람이 절로 생긴다. 신바람이 나서 열심히 일하면 주변의 칭찬과 인정을 끌어내고, 그 결과 더욱 신바람이 나서 성과가 커지는 선순환의 고리가 형성된다.



    둘째, 자아실현의 마음가짐이다. 평소 자신이 중요하게 여겼던 가치나 신념을 행동으로 옮김으로써 자아실현을 극대화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사회적 봉사나 헌신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다가 어떤 계기로 실천할 일이 생기면 “옳거니, 바로 이때다”라고 혼잣말하면서 신바람 나게 몸을 내던진다. 비록 몸은 불편하고 고생스러워도 마음만은 뿌듯하고 신이 나는 이유다. ‘물 만난 고기’인 그에게 주변의 찬사나 고마움은 그저 덤일 뿐이다. 이때는 외부의 인정과 칭찬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기만족이나 자아실현이 중요하다.

    셋째, 도덕적 만족이다. 신바람이 나면 도덕적으로 만족한다. 도덕이란 말은 언뜻 고리타분하게 들리고, 자신과는 먼 얘기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도덕은 어렵거나 먼 얘기가 아니다. 우리는 누구나 도덕을 좋아한다. 상식과 사회관습에 따라 판단하고 행동하는 도덕은 무척 쉽기 때문이다. 학창시절 도덕시험은 비교적 쉽게 느껴지지 않았는가. 공부하지 않아도 잘 생각해보면 정답을 찾을 수 있는 과목이 도덕이다.

    도덕은 강제성이 없다. 도덕은 자율성을 바탕으로 한다. 반면 법률은 익히거나 외우지 않으면 잘 모를뿐더러 강제성이 있다. 법률은 부담스럽다. 그러나 도덕은 자연스럽다. 그러니 좋아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자신의 말과 행동이 법을 어기는지 잘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관습과 상식을 벗어나는 것인지에 대해선 늘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도덕이다. 다른 사람을 위하는 마음, 성공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마음, 행복을 위해 신나게 사는 마음 등이 신바람의 원동력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도덕적 만족을 얻고자 한다. 개인의 ‘도덕지능’(MQ·미국의 정신의학자 로버트 콜스가 주창했다)이 높으면 높을수록 더 큰 도덕적 만족을 추구한다. 그 결과, 세상 사람들과 즐겁고 원만하게 교류할 수 있다.

    넷째, 기분 좋아짐이다. 신바람 난다는 현상 자체가 그의 기분을 좋게 만든다. 사람은 기분 좋은 일은 지겹지 않아서 언제까지 계속할 수 있다. 좀 더 열심히, 오래 또는 자주 하려고 한다. 기분이 좋아진다는 것은 두뇌에서 쾌감을 담당하는 신경전달물질인 도파민(dopamine)이 분비됨을 의미한다. 도파민을 분비하는 신경세포가 많이 분포돼 있는 ‘보상체계(reward system)’가 활성화돼서 한 번의 신바람이 여러 번의 신바람으로 반복, 확대, 재생되는 것이다.

    사실 도박이나 마약에 중독된 사람들의 뇌도 보상체계가 활성화돼 있다. 그러나 결국 그것이 고갈해 황폐화되는 것이 결말이다. 하지만 선행이나 즐거운 일을 할 때의 신바람은 가벼운 중독 상태의 뇌를 거치지만, 결코 고갈되지 않는 게 특징이다. 그래서 신바람 중독은 위험하지 않으면서 질병도 아닌 ‘착한 중독’이다.

    ‘쾌감 담당’ 도파민 분비로 기분 좋아져

    한국인의 신바람 문화의 미래는 현재로선 그리 낙관적이지 않다. 신바람은 서로 일체감을 느낄 때 효과가 극대화되는데, 지금의 우리 사회는 너무 상반되게 쪼개져 있기 때문이다. 부자와 가난한 자,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 노조와 사측, 정규직과 비정규직, 반북과 친북 등으로 말이다. 신바람이 나더라도 반쪽짜리요, 끼리끼리 신바람일 뿐이다. 상대 진영의 신바람에 찬물을 끼얹으려는 마음 역시 존재한다.

    또 행동 통일이 거의 불가능하다. 사회가 복잡해지고, 각자의 이해가 얽혀 있으며, 이념과 표현의 자유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서로의 최대공약수를 발견하려 노력하고 정치적 이슈가 아닌 다른 차원에서의 민족적 동질감, 즉 ‘우린 한국 사람이다’라는 것을 느끼는 순간 우리의 신바람 문화는 언제든지 부활할 것이다. 그렇게 명맥을 유지해나갈 것이다.

    농악대의 놀이마당을 지켜보면서 흥겨워하는 어린아이들을 보라.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들썩들썩 어깨춤을 추는 우리를 보라. 노래할 때 음정과 박자를 잘 못 맞추는 우리가 ‘쿵더덕 쿵덕’ 박자는 결코 틀리지 않는다. 우리 몸에 한국인의 피가 엄연히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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