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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병직 교수의 5분 세계사

“기억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와 미래다”

중일 역사공동硏 3년 만에 보고서 펴내 … 난징학살 놓고 여전한 대립

  • 안병직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ahnbj@snu.ac.kr

“기억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와 미래다”

2006년 말부터 중국과 일본 양국 학자들이 진행해온 ‘중일(中日) 역사공동연구위원회’가 그동안의 작업을 마감하고 최근 보고서를 제출했다. 이 위원회는 과거사를 둘러싼 양국 간 역사인식의 괴리를 해소하고 상호이해를 증진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하지만 보고서 내용을 전하는 외신에 따르면 공동작업이 그 취지를 온전히 달성한 것 같지 않다. 무엇보다 양국 간 해묵은 쟁점인 난징(南京)학살 희생자 수에 대한 견해차가 여전하다는 소식이다.

난징학살은 1937년 중국을 침략한 일본군이 그해 연말 당시 중국 국민당 정부의 수도였던 난징을 점령한 뒤에 일어났다. 난징 함락 후 약 6주 동안 일본군은 무법천지의 상황에서 군민(軍民) 가릴 것 없이 수많은 중국인을 무자비하게 학살하고, 부녀자를 닥치는 대로 겁탈하며, 방화와 약탈을 일삼는 등 온갖 만행을 저질렀다.

태평양전쟁 종전 후 전범재판 통해 주목받아

난징학살은 난징에 체류하던 외국인들을 통해 사건 발생 즉시 외부 세계에 알려졌다. 그러나 역사적 사건으로서 난징학살이 주목받게 된 계기는 태평양전쟁 종전 후 시행된 전범재판이었다. 1945년 8월 일본이 항복하자 중국 국민당 정부는 난징사건 조사에 나섰고, 난징에 군사법정을 설치했다. 이 법정은 중국인 생존자의 증언, 외국인의 목격담 등을 토대로 학살을 조직하고 잔학행위에 가담한 죄목으로 4명의 일본군 장교를 처형했다. 패전국 일본을 점령한 미군이 주도한 도쿄의 국제전범재판도 난징학살을 중대한 전쟁범죄로 다뤘다. 도쿄전범재판은 중국원정군 총사령관으로서 A급 전범으로 기소된 육군 중장 마쓰이 이와네(宋井石根)를 학살 방조 혐의로 교수형에 처했다. 난징학살과 관련, 도쿄와 난징의 양 전범재판에서 밝힌 사실은 대체로 일치했다. 약 2만명에 달하는 부녀자의 겁탈, 도시의 3분의 1을 잿더미로 만든 방화와 약탈 등이 그러했다. 하지만 학살 희생자 수에서만큼은 양 재판의 내용이 상당히 달랐다. 난징재판에서는 30만명, 특히 검찰 측의 기소문에는 43만명이라는 수치가 등장한 반면 도쿄재판에서는 20만명, 특히 마쓰이의 선고문에는 10만명이라는 수치가 언급되었다.

전범재판 이후 난징학살은 중일전쟁 당시 일본군이 자행한 잔학행위의 상징이자 대명사가 되었지만 이 재판으로 학살의 전모가 명료하게 드러나지는 않았다. 사실 전범재판은 난징학살에 대한 역사적 평가의 끝이 아니라 오히려 시작이었다. 전범재판 이후에도 학살의 성격, 규모, 명령계통, 책임소재 등을 둘러싸고 중일 양국 간, 그리고 일본사회 내부에 논란과 갈등이 끊이지 않았던 것이다.



가해자 측 일본에서 난징학살은 도쿄전범재판을 통해서야 알려졌고, 이후에도 한동안 크게 주목을 받지 못했으나 결코 망각되지는 않았다. 난징학살은 1950년대 말까지 중등학교 교과서에 수록되었으며, 특히 좌파 지식인들이 난징에서의 일본군 만행을 폭로하는 데 앞장섰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퇴역 군인들을 중심으로 난징학살을 부인하는 목소리도 등장했다. 그들은 도쿄전범재판에 제시된 대부분의 증거가 조작된 것이라 여겼고, 수십만명 대량학살은 기술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점을 강조하며 일본군의 무죄를 주장했다.

1950~60년대 잠복해 있던 상이한 전쟁기억 간의 갈등은 1970년대에 공개적으로 표출되었다. 그 계기를 제공한 것은 ‘아사히(朝日)신문’의 기자 혼다 가쓰이치(本多勝一)였다. 그는 1970년대 초 난징학살 현장을 방문하고 목격자의 증언 및 기타 증거자료를 수집해 ‘아사히신문’에 학살폭로 기사를 연속으로 게재했다. 혼다의 보도는 전후 일본에서 처음으로 대중매체를 통해 일본군의 잔학행위를 알린 것으로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혼다의 글은 스즈키 아키라(鈴木明)라는 필명의 문필가에 의해 곧 공개적으로 논박되었다. 그는 “난징학살을 입증하는 구체적 자료가 부족하고, 처음부터 정치적 선전이 개입된 이 사건의 진상이 많은 부분 왜곡되었으며, 난징학살이란 결국 선정적 저널리즘이 과장하고 조작한 ‘환상’에 불과하다”는 주장을 폈다.

1970년대 혼다와 스즈키의 논쟁은 1980년대 이후 전쟁의 기억을 둘러싸고 출판계와 매스미디어, 법정과 거리에서 치열하게 전개된 ‘기억의 전쟁’의 리허설이었다. 한편으로는 1970년대 초 중국과 국교정상화 이후 일본인의 중국 방문이 늘어나고 중국에 대한 우호적 감정이 증가함에 따라 일본의 침략전쟁과 전쟁범죄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 확산되었다. 중일전쟁에 참가한 퇴역 군인 가운데도 일본군의 잔혹행위에 대한 증언이 이어지고, 정부의 교과서 개입에 항의하는 소송이 제기되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1980~90년대에 정부와 보수 지식인, 극우단체를 중심으로 전쟁을 합리화하고 전쟁범죄를 호도하려는 시도가 두드러졌다. 일본 정부는 중일전쟁의 침략성과 잔학행위를 서술한 교과서를 수정하려 했고, 일부 각료는 학살의 존재를 부인하는 발언을 통해 파문을 일으켰다. 또 민족주의 성향의 보수 지식인들은 도쿄전범재판의 역사인식을 문제시했고, 극우단체는 물리력을 동원해서라도 잔학행위 공개를 저지하려 했다.

중국인 84%, 일본 하면 난징학살 연상

일본사회에서 난징학살의 기억이 양극화되는 기저에는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대립이 있다. 한쪽은 평화의 이념과 가치를 앞세워 일본의 군국주의와 천황제를 비판하고 과거와의 단절을 추구한다. 다른 한쪽은 민족적 정체성과 자긍심의 회복을 위해 도쿄전범재판이 강요한 민족사에 대한 ‘자학’에서 벗어나 민족의 생존을 위해 치른 전쟁을 정당한 것으로 보고자 한다.

한편 침략전쟁의 피해자인 중국에서의 학살 기억은 일본과 달리 전체적으로 통일된 것이었다. 그럼에도 그 기억은 결코 정체된 것이 아니었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양상을 보여주었다. 중국은 1970년대 이전에는 난징학살에 상대적으로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냉전 상황에서 일본과의 교역을 유지해야 할 필요성에 따라 과거사 문제로 일본을 자극하길 꺼렸다. 난징학살과 관련해서는 오히려 미국과 타이완 등 반공 적대세력을 겨냥한 정치적 선전에 초점을 맞추었다. 즉 학살 당시 난징에 체류하던 미국인 선교사들이 일본군에 협조해 중국인 학살에 앞장섰다거나, 난징의 참변에는 수도를 포기한 국민당 정부의 전략에도 책임이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일본군의 잔학행위가 망각된 것은 아니었다. 1960년대 난징대 역사학부를 중심으로 학살 생존자의 증언 자료가 발굴, 수집되었고 일본군의 만행을 규탄하는 전시회도 지속적으로 열렸다. 그러나 난징학살에 대한 조사와 연구 결과는 정부와 당 내부 열람용에 그쳤으며 난징에서 연례적으로 개최되는 추모행사의 초점도 일본군에 의한 학살의 희생자가 아니라 ‘혁명의 순교자’로서 국민당 정부에 의해 처형된 공산당원들에게 맞춰졌다.

난징학살에 대한 상대적 무관심은 1970년대 이후 중국 국내외 정세 변화와 함께 달라졌다. 그동안 문화혁명 등 내부 혼란을 수습하고 체제 안정을 이룬 중국이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전쟁의 기억 보존과 강화에 나섰던 것이다. 특히 1980년대 초 일본 정부의 교과서 파동과 함께 난징학살은 중일전쟁에 대한 기억의 핵심으로 부상했다. 침략전쟁을 미화하려는 일본 정부의 시도에 맞서 난징학살의 생존자들이 전후 처음으로 TV 등 대중매체에 등장하여 공개적으로 증언했고, 학살에 관한 자료집과 연구서들이 출간되었다. 특히 종전 40주년인 1985년에는 난징학살 희생자 기념관이 개관되어 학살 관련 사진과 문서, 학살현장에서 발굴한 유골 등이 전시되었다. 개관 10년 만에 400만명이 방문한 기념관 입구에는 ‘희생자 30만’이라는 수치가 중국어, 일어, 영어로 병기되었다. 1990년대로 접어들어서는 난징 항전과 일본군의 만행을 소재로 한 소설, 생존자의 체험을 토대로 한 논픽션 등이 출간되었으며, 난징학살을 다룬 장편영화와 TV 다큐멘터리들이 제작되었다. 전체적으로 1980년대 이후 난징학살의 기억은 중국 국민에게 대중화되었고 반일정서의 확산에 기여했다. 1990년대 후반 약 1만명의 중국 국민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응답자 84%가 일본과 관련해 일차적으로 난징학살을 연상할 정도였다.

난징학살에 대한 일본과 중국사회의 기억은 집단기억의 본질과 기능을 웅변으로 보여준다. 기억은 불변하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정치적 상황이나 시대적 맥락에 따라 재구성되고 변형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기억은 과거가 아니라 오히려 현재나 미래와 관련된 것이라 할 것이다.



주간동아 2010.03.02 725호 (p72~73)

안병직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ahnbj@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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