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75

2009.03.03

위안과 꿈 주시던 그 발자취 어느새 그리움으로 남습니다

김수환 추기경 영전에

  • 한수산 작가·세종대 국문과 교수 hsoosan@hanmail.net

    입력2009-02-27 10: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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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안과 꿈 주시던 그 발자취 어느새 그리움으로 남습니다
    내 노트북에는 두 장의 김수환 추기경 사진이 있다. 하나는 신부가 되어 어머니와 함께 찍은 사진이고 하나는 노년에 백두산에 올라서 찍은 것이다.

    생전에 추기경을 뵙기는 했지만 그때 나는 가톨릭 신자가 아니었다. 얼마의 세월이 흐른 후, 나 또한 세례를 받고 신자가 된 어느 날 한 장의 추기경 사진을 만났다. 안개가 짙은 백두산 천지를 뒤로하고 지팡이를 짚고 서 있는 사진이었다.

    그런데 추기경이 서 계신 그 자리가, 왕모래가 부슬부슬 흘러내리는 그 자리가 바로 내가 이마에 기름을 바르며 물의 세례를 받고 천주교 신자가 된 그 자리 아닌가(기구한 곡절 끝에 나는 예비신자 생활 9년 만에야 성당이 아닌 백두산에서 세례를 받았다).

    내가 세례를 받은 그 자리에 추기경이 서 계시다니. 기쁨 속에서 그 사진을 바라볼 때마다 추기경과 내가 그 자리에 선 긴 시차를 넘어서는 이 감동은 도대체 무엇일까를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사랑과 존경이 아닌가. 같은 자리에 설 수 있었다는 그것만으로도 감동이 되는 사랑이고 존경이다.

    그때 백두산을 내려오며 순교의 피로 점철된 한국 천주교 순교사를 소설로 그려내겠다는 약속을 하느님께 드렸다. 그리고 어느새 20여 년의 세월이 흘러갔다. 추기경께서 선종하신 그날도 나는 김대건 신부와 함께 유학을 떠난 한국의 두 번째 신부 최양업의 생애를 소설로 쓰며 하루 종일 서재에 틀어박혀 있었다. 서재를 나온 새벽 2시, 피곤한 머리를 의자에 기대고 쓰러지듯 앉아 있던 그 시간에, 소리를 죽인 채 틀어놓은 한 종교방송에서 ‘김수환 추기경 선종’이라는 자막을 보았다.



    그날 내가 쓰고 있던 글은 최양업 신부의 부모가 순교의 칼날 아래 스러지는 기해박해의 들머리에 와 있었다. ‘주여 당신께 모든 것을 맡기나이다’ 하는 마음으로 쓰는 그 글, 생각해보니 내가 그 글을 싣고 있는 가톨릭신문이 또한 한때 추기경께서 사장으로 봉사하셨던 바로 그 신문이 아닌가(추기경께서는 64년부터 가톨릭시보사(현 가톨릭신문) 사장을 지내셨다).

    신부가 되어 어머니와 함께 찍은 기념사진 속 김수환 추기경은 젊다. 그 흐린 흑백사진 속 한 젊은 신부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나는 이 시대의 사제(司祭)상을 생각했다. 동시대인의 아픔을 함께 고뇌하는, 그 지표와 상징으로 김 추기경을 떠올리기 때문이다.

    형제들을 위한 가난 속에

    그들과 함께 모든 것을 나누면서

    사랑으로 몸과 마음 다 바치고 싶습니다.

    그렇게 기도한 사제의 마음이 그 젊은 모습에 이미 각인돼 있음을 본다.

    ‘목석같은 인간 수환아, 너는 눈물도 없느냐’

    추기경 선종을 맞아 되새기는 수많은 사람들의 추모의 마음에는 몇 가지 공통된 표현이 있다. 고통 받는 자들과 함께해온 사랑, 땅 위의 권력에 분연히 맞선 용기, 끝없이 자신을 비우려 한 깊은 고뇌, 용서를 통해 이룩하고자 한 일치와 평화, 그렇게 우리는 그 모든 것을 갖춘 한 신부로서의 그를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김수환 추기경에게는 늘 함께하는 담론이 있어왔다. 시대의 양심, 인권, 사회정의는 그의 상징이었고, 가난한 자의 눈물을 닦아주고 소외계층에게는 희망이 됐다. 내가 가장 감동적으로 간직하는 추기경의 말씀은 그분이 피정(避靜) 중에 쓰신 메모의 한 구절이다.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목석같은 인간 수환아, 너는 눈물도 없느냐.’

    이보다 더한 사제의 고뇌를 어디서 만나겠는가. 가난한 자 버림받은 자, 나는 왜 그들을 위해 테레사 수녀처럼 살지 못하는가를 늘 고뇌하던 추기경이었다. ‘다 버려야 하는데, 온갖 직위 온갖 영화를 누리며 잘난 체하는 나, 내가 바보지’라고 탄식하신 분. ‘나는 가난한 자 중에서도 가난한 자가 되고 싶습니다’고 했던 그의 목소리가 ‘목석같은 인간아’라고 스스로를 향해 외치는 간절함에 절절히 묻어나지 않는가.

    추기경의 한평생은 우리에게 필요한 이 시대의 신부상 그것이었다. 민주화 운동의 고난에 찬 역정에선 정신적 지주였고, 그분이 머물던 명동성당은 민주화 운동의 성지였다. 가난하고 버림받은 사람들에게는 피난처였다. 노년이 된 추기경을 향해 ‘수구꼴통’이라며 거들먹거리는 사람들조차도 웃음으로 다독이신 그분은 우리를 감동하게 한 영원한 스승이었다.

    그렇다고 높고 거룩한 자리에만 머물러 있던 분도 아니었다. 부부 사이에 갈등하는 신자들을 향해서는 ‘아내와 남편을 서로 탓하지 말고, 나는 하느님이 보기에 어떤가, 내가 이 사람을 사랑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를 돌아보라고 하신 다감한 분이었다.

    무엇보다도 삶의 진정성이 그리운 시대에 ‘진정한 어른’으로 사시면서, 우리에게 용기와 고뇌가 무엇인가 하는 물음을 자성으로 남기신 분, 마지막까지 잃지 않은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과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Pro Vobis et Pro Multis)’라는 사목지침을 남기고 추기경은 그렇게 떠나셨다.

    한 시대의 어른을 이제 보내야 한다. 당신과 함께했던 나날은 동시대인에게 위안이었고 꿈이었다는 말을 전해야 한다.

    주님 안에서 평안하시기를 기도합니다.

    하느님, 저희가 한데 모여 세상을 떠난 김수환 스테파노를 위하여 간절히 청하오니,

    이 세상에서 주님을 바라고 믿었던

    스테파노의 모든 잘못을 용서하시고,

    주님 안에서 영원한 안식과 기쁨을 누리게 하소서.

    한수산 작가는 197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4월의 끝’이 당선돼 등단했다. 81년 필화사건으로 군 정보기관에 끌려가 고초를 겪은 뒤 방황의 시절을 보내다 89년 백두산 천지에서 요한 크리소스토모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한국 천주교의 순교 현장을 답사하며 기록한 순례기 ‘길에서 살고 길에서 죽다’ 등 여러 권의 가톨릭 서적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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