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간동아 로고

  • Magazine dongA
통합검색 전체메뉴열기

하재봉이 만난 영화, 영화인|‘개와 늑대 사이의 시간’ 전수일 감독

시간이 파괴한 것에서 삶의 리얼리티를 발견하다

시간이 파괴한 것에서 삶의 리얼리티를 발견하다

시간이 파괴한 것에서 삶의 리얼리티를 발견하다
땅과 하늘이 결혼하는 황혼녘, 모든 세포가 부드럽게 열리면서 우주의 이 신비한 접촉을 예민하게 감지한다. 이때를 프랑스 사람들은 ‘개와 늑대 사이의 시간’이라고 부른다. 멀리서 보면 개인지 늑대인지 구분이 안 되는 ‘모호한 시간’이라는 뜻이다. 이렇듯 황혼녘에는 모든 것이 혼돈에 차 있다. 분명한 것은 하나도 없다.

2005년 2월 촬영돼 뒤늦게 개봉한 전수일 감독의 ‘개와 늑대 사이의 시간’은 그의 데뷔작 ‘내 안에 우는 바람’과 ‘새는 폐곡선을 그린다’로 이어지는 시간과 기억에 관한 3부작 중 마지막 작품이다. 이 영화는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 파노라마 부문과 페사로 국제영화제, 낭트영화제, 브리즈번 영화제 등에 초청된 바 있다.

시간과 기억에 관한 완결편 … 페사로·낭뜨 영화제 등에 초청

‘개와 늑대 사이의 시간’은 원래 충무로의 한 영화사에서 제작하기로 했다가 촬영 한 달 전 제작자가 손을 놓아버렸다.

“일단 시작한 이상 멈출 수가 없었다. 부산영상위원회에서 부산영화 제작지원금 3000만원을 받았고, 카메라도 실비로 대여받아 촬영했다. 3억원의 제작비를 빚으로 다 마련했다. 4만7000자의 코닥필름도 30% 할인된 가격으로 샀다. 필름값이 비싸기 때문에 사전 준비를 철저히 했다. 롱테이크가 많아 NG가 나면 안 됐다. 보통 두 번이나 세 번째 컷에 오케이 사인을 냈다.”



김영하의 원작 소설을 영화화한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에서 상업적 변신을 시도했지만 상업성과 작품성을 모두 놓친 전 감독은 초심으로 돌아가 ‘개와 늑대 사이의 시간’을 만들었다. 눈 위에 반사되는 푸르른 겨울의 빛처럼 영화는 차갑고 강건한 기운에 싸여 있다.

영화감독 김(안길강 분)은 은행에서 빚 독촉을 받는 데다 스태프들의 인건비를 주지 못해 심리적 압박을 받고 있다. 더구나 오랫동안 왕래하지 않았던 강원도 속초의 숙모가 “6·25전쟁 때 헤어진 북한의 숙부를 중국에서 만나기로 했다”면서 그에게 같이 가자고 한다. 그래서 김은 고향 속초행 버스를 탄다. 그곳은 설국처럼 눈으로 덮여 있다. ‘개와 늑대 사이의 시간’에서 하얀 눈이 갖는 상징은 매우 깊다. 단지 겨울을 나타내는 차가운 배경이 아니라, 기억을 덮는 망각의 재료인 동시에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는 유일한 단서가 되기도 한다.

속초에서 김은 어린 시절 헤어진 동생을 찾아 헤매는 영화(김선재 분)를 만난다. 김은 그녀의 주변을 맴돈다. 차로 그녀가 가려는 길을 안내하기도 하고, 그녀가 원하지도 않는데 보호해주려다 폭행을 당하기도 한다. 영화가 어린 시절 사북 탄광지대에서 잃어버린 동생을 찾듯, 김도 자신의 고향 마을을 찾는다. “내가 어디에 사는지 알아요?”라고 묻는 김의 말은 이 영화의 궁극적 지향점이 자아를 찾는 여행임을 알려준다. 즉 ‘개와 늑대 사이의 시간’은 나와 또 다른 나 사이의 시간인 것이다.

시간이 멈추면 그것은 공간화된다. 김의 고향인 속초는 그런 점에서 시간이 멈춘 공간이다. 김과 영화는 자신의 현재적 삶을 이루는 것들에서 떠나 각자 삶의 원류를 찾고자 한다. 영화의 시간적 배경인 겨울, 그리고 푸른(흰색이 아니다) 눈은 그들이 각자 자신의 삶이 시작된 태초의 시공간을 찾아 떠나는 것을 묵묵히 지켜본다. 김과 영화는 서로 다가서고 물러서다, 결국 폐허가 된 건물에서 섹스를 하지만 다음 날 아침 영화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다.

파괴돼가는 고향 이미지 그리려는 그만의 색깔

남은 것은 무엇인가. 옛 고향 건물들은 바뀌었고, 예전 사람들은 지금 그곳에 살지 않는다. 무엇인가 질문을 던지면 이해할 수 없는 답이 돌아온다. 그들이 그토록 삶의 오류를 수정하고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찾아간 시원의 공간인 고향도 결국 소통되지 않는 막막한 공간이었다. 탄광지대였던 사북은 이제 카지노로 변했다. 탄광촌은 문을 닫은 지 오래고, 그곳에 살던 사람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곧 무너질 건물들, 폐허로 변해버린 도시, 그러나 이곳에는 카지노가 들어서고 새로운 금광을 찾아오는 사람들로 북적거릴 것이다.

“홍상수 감독의 ‘생활의 발견’에서 짧게 등장한 안길강을 보고 주인공 김 역으로 캐스팅했다. 여주인공 김선재는 묘한 신비감이 있다. ‘시간은 오래 지속된다’에서도 조금 어색하긴 했지만 진정성이 있는 연기를 보여줬다.”

시간이 파괴한 것에서 삶의 리얼리티를 발견하다
김의 쓸쓸한 여행은 숙모의 죽음으로 마감된다. 온 곳으로 다시 돌아가는 김의 오디세이를 지켜보면서 우리는 타인을 완벽하게 이해하기 어려워진 현대인의 삶을 떠올린다. 영화의 엔딩 장면은 하얀, 아니 푸른 눈밭을 둥그렇게 맴도는 여자를 물끄러미 지켜보는 김의 모습이 장식한다. 머리와 꼬리가 없고 시작과 끝이 없는 삶. 여기도 아니고 저기도 아닌 곳에 서 있는 길 위의 삶. ‘개와 늑대 사이의 시간’은 그 삶을 이야기하기 위해 시간을 멈추고 공간을 찾아가지만, 그곳 역시 폐허로 변해갈 뿐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개와 늑대 사이의 시간’은 ‘새는 폐곡선을 그린다’를 촬영하기 위해 강원도 속초의 집들을 찾아 헤맸던 전 감독의 경험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는 파괴돼가는 고향의 이미지를 그리고 싶었다. 영화감독 김처럼 전 감독의 고향은 속초다. 그는 초·중학생 시절 직접 현상과 인화를 했다. 사실 그는 이 영화에서 김의 어린 시절을 많이 촬영했지만, 주인공의 정서를 해치는 것 같아 편집 단계에서 다 빼버렸다고 한다.

그의 다섯 번째 영화는 탄광촌 이야기를 그린 ‘검은 땅의 소녀와’다. 프랑스의 오브젝티브 뚜르나주 영화사와 합작으로 제작된 영화로, 올 2월 촬영했고 5월에 후반 작업까지 끝냈다. 개봉 시기만 남겨놓은 상태다. 전 감독은 ‘개와 늑대 사이의 시간’을 찍으면서 탄광촌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다. 영화에도 나오는 것처럼, 예전의 탄광지대는 지금 카지노가 됐다. 광부들은 폐광이 되니까 일자리가 없어 떠났다. 진폐증 환자도 많지만 진폐증만 가지고는 입원이 안 된다. 합병증이 있어야 한다. 입원하면 생활비와 자녀 학자금 등 보조금이 나오니 광부들은 일부러 다른 병을 만들어 입원한다. 전 감독은 이 이야기를 듣고 ‘검은 땅의 소녀와’라는 시나리오를 썼다. 아버지가 병을 만드는 것을 광부의 딸이 도와주는 비극적 리얼리티가 살아 있는 작품이다.

그는 이 영화를 찍기 위해 아직도 1970~80년대 탄광촌 분위기가 남아 있는 강원도 태백, 철원의 지하 800m 갱도에 네 번이나 들어갔다. 촬영 허가를 받는 것이 쉽지 않아서 태백의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의 도움을 받아 광산노조를 설득해 겨우 촬영에 들어갈 수 있었다. 지하 갱도는 습도가 너무 높아 카메라에 물이 흐를 정도였다. 더운 먼지도 앞을 가렸다. 30분을 기다려 카메라가 온도에 적응하고 먼지가 걷히면 촬영에 들어갔는데, 네 번째에야 촬영에 성공했다. 그 부분만 HD 카메라로 찍었다.

현재 부산 경성대 영화과 교수인 전 감독은 1학기가 끝나고 여름방학이 시작되면 시나리오 헌팅을 가고 영화 찍을 준비를 한다. 12월이나 1월에는 직접 현장에 가서 최종 준비를 하고 2월 한 달간 촬영하는 방식으로 지금까지 다섯 편의 영화를 찍었다.

3월 투르영화제 이어 11월 리옹 아시아영화제서도 회고전

3월 프랑스 투르영화제에서는 전 감독 회고전이 열렸다. 올 가을에는 파리 아르에세 극장에서 전 감독의 영화 네 편이 한꺼번에 개봉한다. 11월 리옹 아시아영화제에서는 전 감독의 회고전이 열릴 예정이다. 그리고 2008년 2월에는 ‘히말라야의 소녀와’라는 제목의 여섯 번째 영화를 네팔에서 찍는다. 4000m가 넘는 고지에서 35mm 장비로 영화를 찍기는 어렵다. 그래서 슈퍼 16mm 필름으로 찍으려고 한다.

“필름에 익숙해서 디지털로 영화를 찍는 것이 더 힘들다. 필름은 심도가 7대 1까지 가는데 디지털은 3대 1 정도밖에 안 된다. 내 영화는 이미지의 힘이 강하다. 공간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데, 화면의 깊이가 중요해서 나와 디지털은 잘 안 맞는 것 같다. 공간의 디테일한 느낌이나 색감 등 미묘한 것을 디지털로 표현하기란 불가능하다.”

‘히말라야의 소녀와’는 시나리오가 파리영화제 프로젝트에 선정됐다. 전 감독은 7월 초 파리로 가서 제작자들과 미팅하고 공동제작 여부를 논의할 계획이다. 철학적 사유와 뛰어난 상징적 이미지를 통해 범속한 삶의 본질을 탐구하는 전 감독의 영화는 ‘개와 늑대 사이의 시간’에서 ‘관념의 육화’라는 값진 성과를 거뒀다. 시간 3부작을 마친 그가 소녀를 주인공으로 하는 연작을 통해 또 어떤 세계를 보여줄지 기대된다.



주간동아 2007.07.10 593호 (p74~76)

다른호 더보기 목록 닫기
1232

제 1232호

2020.03.27

n번방이 다시 숨은 곳, 디스코드

목차보기구독신청이번 호 구입하기

지면보기 서비스는 유료 서비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