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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DLE’ VINTAGE Wine 구입하셨나요?

아이들 태어난 해 생산된 와인 수집, 아주 특별한 의미

  • 고형욱 와인평론가

‘IDLE’ VINTAGE Wine 구입하셨나요?

‘IDLE’ VINTAGE Wine 구입하셨나요?
와인 애호가들은 나이를 묻는 방식이 보통 사람과 다르다. 예를 들어 “실례지만 빈티지가 어떻게 되세요?”라고 물으면 “1975년산인데요”라고 답하는 식이다.

와인 좋아하는 사람들이 나이 얘기를 할 때는 꼭 빈티지에 대해 말하는 것 같다. 다른 술과 달리 와인은 자기 생년을 가지고 세상에 나온다는 게 특징이다. 이런 차별성이 빈티지에 대해 애착을 갖게 하는 이유 중 하나다. 와인 애호가라면 누구나 자신이 태어난 해에 생산된 와인을 마시는 걸 기쁨으로 여기곤 한다.

공상과학 소설이 아니어도 미래에 대한 예측은 가능하다. 2015년쯤 벌어질 상황에 대해 와인 친구들과 농담반 진담반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만약 당신 아들 친구가 군 입대를 앞두고 인사하러 왔다고 하자.

“음, 잠시 기다려보거라” 해놓고 와인을 꺼내러 가는 것이다. 아들을 위해 20년 전 구입해 재어둔 와인 한 병을 꺼낸다. “너도 우리 아들과 동갑내기이니 1995년생 맞지?” 그러고는 1995년산 레드와인을 선물로 주는 것이다.

“군대 가기 전에 아버님하고 식사하면서 마시도록 해라.”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자기 빈티지이기 때문에 이 와인 한 병은 깊은 인상을 줄 것이다. 아마도 자신이 태어난 해에 생산된 와인을 선물로 받은 아들의 친구 주변에서 당신은 평생 존경의 대상이 될 것이다.

몇 년이 더 지나 딸이 결혼한다. 이날을 위해 특별히 준비한 와인은 샴페인이다. 1995년이나 96년산 샴페인 중에는 이 정도 세월을 버틸 만한 것이 많다. 많은 양은 아니지만 그날을 기약하며 사두고, 마시고 싶은 마음을 떨치기 위해 기억에서도 지워버린 샴페인을 창고에서 꺼낸다. 예식이 열리는 호텔에는 신랑 신부 양가 부모와 지인들 테이블에 샴페인 글라스를 준비해달라고 요청해둔다. 모두에게 기쁜 날, 30년 가까이 나이 든 샴페인을 한 잔씩 따르면서 “이 샴페인처럼 멋있게 늙어가면 좋겠다”라고 덕담을 던지며 건배하면 아마 모든 사람들이 생각에 잠겨 행복해할 것이다. 와인 한 잔이 주는 기쁨이란 바로 이런 게 아닐까.

요즘 와인 애호가들 중에 아이들 빈티지를 특별히 골라 사두는 이들이 많다. 처음 ‘아이들 빈티지’란 말을 들었을 땐 ‘idle vintage(한가한 빈티지)라니 어떤 해를 말하는 걸까?’ 하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것이 자식, 즉 ‘아이들이 태어난 해 생산된 와인’을 뜻하는 한국식 와인 신조어라는 것을 알고는 배를 잡고 웃었다.

그런데 주변에 아이들 빈티지를 수집하는 사람이 꽤 많을 뿐 아니라, 많게는 100병 이상 사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여유가 있다면 다양하게 마실 수 있기 때문이다. 아이가 미성년일 때는 어른들끼리 축하주로 마실 수도 있다. 성년식 때 아이한테는 와인 맛만 보여주고 부부가 축하하며 즐길 수도 있다. 아이가 대학에 들어가면 가족 모두 둘러앉아 마실 수도 있다. 어쩌면 죽는 순간, 아이를 위해 모아둔 와인의 의미와 생명력을 설명해주며 부모와 자식 관계에 대해 마지막 대화를 나눌 수도 있다. 아이가 어리면 어릴수록 그 아이가 태어난 해의 와인은 구하기 쉽다. 시간이 흐를수록 와인은 소비되고 사라져가기 때문에 구하기 어려워진다.

‘IDLE’ VINTAGE Wine 구입하셨나요?

프랑스 보르도 최고의 와인 중 하나인 무똥 로쉴드는 빈티지마다 유명인사가 그린 라벨이 부착돼 컬렉터들에게 특별히 인기가 있다.

이미 1990년대 중반에 나온 와인들은 숍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작황에 따라 가격이나 보관 기한에 차이가 있다. 일반적으로 보르도 와인은 이런 경우 기준점이 된다. 전 세계 경매시장에서 빈티지에 따른 공정가가 제시되기 때문이다. 2003년이나 2005년, 혹은 2000년산 보르도 와인은 20~30년 세월은 충분히 버틸 수 있는 것들이 많다. 이미 10년 이상 지난 94, 95, 96년산 와인은 잘 골라야 한다. 벌써 마셨어야 할 와인과 아직 숙성할 잠재력이 있는 와인이 있기 때문이다. ‘황금의 3년’이라 불리는 88, 89, 90년산도 좋은 와인들은 가격이 천정부지로 올랐다. 게다가 국내에서는 구하기도 어렵다. 91, 92, 93년산 같은 경우는 최악의 빈티지들이었으므로 보르도 말고 다른 나라 와인을 찾아보는 게 나을 수도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사람들이 와인에 대해 알게 되는 상식은 더욱 많아질 것이다. 와인은 대중적 문화코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커갈수록 보관해둔 와인의 가치가 올라가기도 한다. 굳이 가치를 따지지 않더라도 아이들을 위해 모은 빈티지 와인은 물질적 가치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그건 태어난 해가 라벨에 정확히 쓰인 빈티지의 매력 때문이기도 하다. 자신이 태어난 해의 와인은 이미 오랜 시간이 지났으므로 구하기 어려울 것이다. 부모들 와인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와인을 모으다 보면 컬렉션에 끝이 없겠지만, 그럼에도 아이들 와인을 산다는 것은 일반 수집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 가슴에 차곡차곡 담기는 게 아닐까.



주간동아 2007.04.10 580호 (p58~59)

고형욱 와인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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