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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의 달인’에서 ‘식객’까지 요리만화의 힘

맛대결과 최고의 맛집 소개 등 재미와 정보 동시에 … 음식·요리에 대한 관심 증대에 일등공신

  • 이명석 만화평론가·문화비평가

‘맛의 달인’에서 ‘식객’까지 요리만화의 힘

‘맛의 달인’에서 ‘식객’까지 요리만화의 힘

‘신의 물방울’에서 주인공이 디캔팅하고 있는 장면

우리 시대의 미식가들은 변두리 허름한 국밥집도 무시하지 않는다. 뜻밖의 국물맛에 경탄의 소리가 터져나올 땐, 재빨리 디카(디지털 카메라)와 수첩을 꺼내 ‘궁극의 메뉴’에 그 요리를 추가한다. 단골 일식집의 밑반찬 하나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이거 낫또가 예전 맛이 아니군요.” 그러면 당장 요리사가 튀어나와 무릎을 꿇고 “역시 손님의 혀는 속일 수가 없군요”라며 사과할 것 같다. 근사한 와인을 혀끝으로 매만지다 “마치 새벽 기차를 타고 내린 간이역에서 아침 햇살을 맞는 느낌이군”이라고 말하며 술보다 자신의 미사여구에 더 취한다. 모두가 세상의 온갖 진미를 선보이며 그것으로부터 만들 수 있는 모든 문화를 만들어내는 요리 만화 때문이다.

모든 요리에 원조 다툼이 있지만 요리 만화에서만은 멱살잡이가 필요 없다. 1983년 연재가 시작된 하나사키 아키라의 ‘맛의 달인’은 본고장 일본에서는 물론 한국에서도 요리 만화 보급의 선구자다. 신문사 문화부 기자 지로가 ‘완벽한 메뉴’라는 특집 시리즈를 만들며 그의 아버지이자 전설적인 미식가인 우미하라의 ‘최고의 메뉴’와 대결해 나가는 과정을 그린 이 만화는 일본 전체에 식도락 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렸다.

‘맛의 달인’이 등장한 1980년대는 일본인들이 고도성장을 통해 경제적 안정을 얻고 정치와 사회보다는 취미와 여가에 더 큰 관심을 쏟게 된 시기다. 이 시대의 초보 직장인들은 1970년대의 만화 문화 속에서 청소년기를 보낸 사람들로 재즈, 낚시, 골프, 요리 등 취미생활을 다루는 만화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이러한 직장인 대상 취미 만화 중 가장 큰 인기를 모은 것이 요리 만화다. 한국에서는 199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인 요리 만화 붐이 시작되어, 식탁 위의 요리와 종이 안의 만화가 서로를 끌어당기며 풍성한 미식 문화를 만들어내고 있다.

미식가 만화



‘맛의 달인’에서 ‘식객’까지 요리만화의 힘

‘미스터 초밥왕’의 한 장면.

‘완벽한 메뉴’를 찾아가는 ‘맛의 달인’, 최고의 와인 컬렉션을 차지하기 위한 품평 대결 ‘신의 물방울’, 전국을 돌아다니며 최고의 맛을 소개하는 ‘식객’ 등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는 요리 만화에는 묘한 공통점이 있다. 주인공들이 요리를 만들기보다는 맛보는 데 더 열정적이라는 사실이다. 보통의 독자들은 요리사보다는 미식가 쪽에 감정을 이입하기가 쉬운 모양이다. 요리는 귀찮고 솜씨도 없지만, 맛있는 것 먹고 칭찬하는 일은 누가 마다하랴.

미식가 만화는 미식 투어 블로거들에게 항상 새로운 도전 메뉴를 제시한다. ‘맛국물로 간을 한 히레까스, 덮밥이 그렇게 맛있다는데 어느 일식집을 찾아가야 할까?’라는 식이다. 근사한 식당을 찾아간 데이트족에겐 “캐비아라는 건 말이죠. 원래…” 하면서 요리 만화에서 본 정보를 슬쩍 내보이며 잘난 척하는 재미를 준다.

‘맛의 달인’에서 ‘식객’까지 요리만화의 힘
요리 만화에 나오는 인물만큼 정밀한 미각을 가진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러나 화려한 미사여구로 요리를 칭찬하다 보면 지상 최고의 요리를 맛본 것처럼 느껴지게 마련이다.

‘신의 물방울’은 본격 와인 만화로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다. 일본에서는 이 만화에 나오는 와인마다 품귀 현상을 빚어 산지 가격이 폭등했고, 한국에서는 ‘신의 물방울 와인 투어’가 만들어질 정도다. ‘식객’은 가상의 맛집을 등장시키는 다른 요리 만화와는 달리 대한민국에서 ‘영업 중’인 식당들을 찾아간다는 점에서 더욱 실용적이다. 현재 영화와 드라마로 함께 만들어지고 있는데, 과연 만화 속의 풍성한 표현을 따라갈 수 있을지.

요리사 만화

‘미스터 초밥왕’ ‘라면 요리왕’ ‘따끈따끈 베이커리’와 같은 만화는 제목에서 바로 알 수 있듯이 특정 테마의 요리에 집중해서, 주인공이 온갖 강자들을 물리치고 최고의 요리사 자리에 오르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미식가 만화에도 대체로 라이벌 구도가 있지만, 요리사 만화에는 끝도 없이 새로운 강자들이 등장한다. 오늘 맛의 승부에서 이기지 못하면 내일 낙향해서 평생을 눈물 속에 지낼 것 같은 뜨거운 열기가 전편에 흐른다.

‘미스터 초밥왕’ 초반부에 나오는 조이와 대정의 대결은 승부 모드의 가장 전형적인 예. 특급 참치로 만든 초밥에 참치 머리라는 파격의 재료로 대항하고, 적초를 넣은 환상의 밥에는 물맛으로 승부하는 천연수 밥이 맞서고, ‘요리는 역시 마음의 문제’라며 가족을 생각하는 연어와 연어알 초밥이라는 구성력이 마지막 승부의 열쇠로 등장한다.

대결 모드에 어울리는 주인공들의 필살기는 요리 만화를 무협지로 변신시키기도 한다. ‘짜장면’에서는 대한민국 요식업의 최고 경쟁 분야라고 할 수 있는 자장면의 다채로운 면뽑기 기술이 나오는데, 서부의 건맨 복장을 하고 나타난 요리사 ‘고무장갑’은 전설의 기술 ‘줄넘기 면뽑기’를 보여준다. ‘미스터 초밥왕’의 쇼타가 한 손으로 초밥을 만들어내는 일수법을 특기로 내세운다면, ‘키라라의 일’의 소녀 초밥 요리사는 두 손을 이용해 초밥의 네 부분을 서로 엇갈리게 눌러 완성하는 ‘혼테가에시’로 천수관음의 경지를 보여준다.

레시피, 레스토랑, 내 맘대로 요리 만화

만화책 속에 산해진미가 펼쳐지면 뭐 하나? 집에는 수프도 없는 라면 반 개와 냉장고에서 말라비틀어져 가는 밑반찬밖에 없는데. 이런 방구석 미식가 겸 요리사를 위해 일군의 ‘레시피 만화’들이 기다리고 있다. 항상 1000원 이하의 재료로 가난한 가족의 저녁을 준비하는 ‘빈민의 식탁’과 따뜻한 부정으로 일류 레스토랑 못지않은 맛을 만들어내는 ‘아빠는 요리사’ 등.

이들 만화 속의 요리는 대부분 가정에서 직접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특별한 사랑을 받는다. 어느 초특급 베스트셀러 요리책 편집자는 ‘빈민의 식탁’에서 힌트를 얻은 뒤 ‘극도로 저렴한 재료비의 요리’를 테마로 해서 인터넷의 아마추어 요리사를 섭외해 책을 탄생시켰다고 고백한다.

최고의 프랑스 레스토랑과 최고의 남자를 한꺼번에 얻는 ‘맛있는 관계’, 무책임한 오너의 괴팍한 취향으로 만들어진 묘지 옆 레스토랑의 고난기 ‘헤븐’, 자유분방하지만 전통 에도 일식집의 자존심을 굽히지 않는 ‘오센’. 요리와 요리사를 넘어 레스토랑 자체를 테마로 삼은 요리 만화들도 적지 않다. 이들은 요리와 그릇의 관계, 전채와 메인과 와인 리스트를 구성하는 방법, 예약 손님의 접대와 문제 손님의 해결책 등 외식 문화 전체를 세련된 솜씨로 다루고 있다.

홍차 속의 요정 왕자와 함께 다채로운 차 문화를 즐기는 ‘홍차 왕자’, 골목길의 베이커리 카페에서 꽃미남들과 속삭이는 ‘서양 골동 양과자점’, 사건 해결보다는 자신의 식탐 채우기에 바쁜 ‘절대미각 식탐정’, 귀여운 ‘사모님’ 정신으로 요리사를 들들 볶는 ‘심부인의 요리사’. 왠지 주객이 전도된 느낌이지만, 이들 만화에서 요리를 다루는 방식 역시 새로운 재미를 준다. 세상의 진미를 모두 맛보기도 힘들지만, 요리 만화의 진수를 꿰뚫기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주간동아 2006.12.05 563호 (p42~44)

이명석 만화평론가·문화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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