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63

2006.12.05

Digital Kitchen ‘블로거 요리사’ 전성시대

직접 만든 요리 사진·칼럼 등 올리고 맛 정보 공유 만드는 재미, 먹는 즐거움 ‘네티즌 북새통’

  • 김민경 holden@donga.com

    입력2006-11-30 13:3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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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igital Kitchen ‘블로거 요리사’ 전성시대
    음식점에서 당신이 가장 먼저 손에 드는 것은? 첫돌상에서 무엇을 집었든, 생물학적 나이가 몇 살이든 당신이 숟가락을 들었다면 구세대, ‘디카(디지털카메라)’를 들었다면 신세대다.

    디지털 신세대라면 식당에서 멸치고추볶음 같은 밑반찬에서부터 김치찌개 같은 주요리까지 디카로 찍은 뒤(이것도 끓이기 전과 후를 비교한다), “육수를 가쯔오부시로 만드는 것이 이 집의 비법이죠”라든가 “대를 잇는 아드님의 청출어람이 빛납니다” 같은 미식 비평을 달아 블로그나 싸이 홈페이지에 올려야 ‘밥을 먹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약간의 재능만 있다면 조명으로 음식을 더 윤기나게 연출한다든지, 디카에 접사렌즈를 달아 돼지고기의 섬세한 육질까지 표현할 수 있다. 간단한 플래시 기술로 찌개가 ‘보글보글’, 설렁탕이 ‘모락모락’하게 만들 수도 있다. 이로써 입맛을 다시는 방문객 리플 수는 가볍게 2배쯤 늘어난다.

    아라키라는 일본 출신의 세계적 작가가 일상적인 음식을 접사 촬영한 작품을 한국에서 전시했던 5년 전, 그의 사진은 ‘엽기적’으로 비쳤다. 음식 사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놓고 평론가 사이에 소란이 벌어졌다.

    놀랍지 않은가. 불과 5년 만에 인터넷에서 수많은 블로거들이 매일 아라키보다 더 탁월한 수준의 음식 사진을 찍어 올리고 있으니 말이다. 이들이 찍는 것은 희귀한 산해진미가 아니다(간혹은 있지만). 대부분 일상적으로 먹는 찌개, 밑반찬, 자장면 같은 음식들이다.

    식도락 동호회 ‘미식가천국’은 회원 8만8000명



    최근에는 집에서 배춧잎을 통째로 커다랗게 부친 부침개 사진이나 반가공 피자 재료로 피자를 직접 만드는 ‘과정’을 함께 올리는 블로그도 크게 늘었다. 요리책에 나온 부침개나 광고에서 보던 피자와 달리 ‘계란을 엄청 넣어’ 많이 부풀기도 하고, 피자 치즈가 도우 밖으로 흘러넘치기도 한다.

    회원 수 8만8000명을 자랑하는 식도락 동호회 ‘미식가천국’(cafe.daum.net/eatmicle)의 운영진 정현희 씨는 “2003년 무렵부터 자신이 직접 요리를 만들어 사진과 함께 올리는 블로거가 크게 늘었으며, 지금 우리 사이트에 올라 있는 음식 사진 10개 중 3~4개는 직접 만든 요리다”라고 말한다. 젊은이들로 붐비는 요리학원에서는 수업 중 디카를 찍어대는 원생이 워낙 많아서 요리 강좌인지 사진 강좌인지 헷갈릴 정도라고 한다.

    이렇게 직접 음식을 만들고 사진과 레시피를 올리는 재미에 푹 빠진 블로거가 크게 늘자 국내 최대 규모의 포털인 네이버는 이런 정보를 같은 포맷(‘템플릿’)으로 만들어 체계화하는 ‘오마이키친’ 서비스를 시험운영 중이다. 홍보팀 이상훈 씨는 “가장 많은 블로그 테마는 영화와 책이지만, 자신이 직접 해본 체험 과정을 점점 더 중시하는 추세다. 여기저기 흩어진 요리 레시피를 모으면 검색 정보의 ‘부가가치’가 생길 것이다. 예를 들어 라면과 스파게티 요리 정보를 검색해 새로운 ‘국수’ 요리를 만들 수도 있다”고 말한다.

    Digital Kitchen ‘블로거 요리사’ 전성시대

    요리 & 스타일링 학원 ‘라 퀴진’의 수업시간. ‘뭔가 창의적인 일’을 하고 싶어하는 젊은이들이 많이 찾아온다.

    싸이월드에서도 요리와 식도락 테마가 단연 인기여서 2004년 10월에 런칭한 1인 미디어 ‘페이퍼’에서 발행률과 인기도가 가장 높은 분야가 바로 요리 레시피다. 싸이월드 홍보팀 류희조 씨는 “음식은 모든 사람이 좋아하는 주제인 데다 ‘페이퍼’가 먹음직스런 음식 이미지를 잘 보여주는 포맷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인스턴트, 속도, 세계화를 내면화된 가치로 신봉하는 디지털 세대가 왜 부엌에만 들어가면 지지고 볶는 재미에 시간 가는 줄 모르는 것일까? 이들에게 요리란 무엇일까?

    같은 시대에도 음식을 대하는 시선은 매우 다양하다. 음식은 한 사회를 미시적으로 파악하는 도구이자 문화이며 의사소통이기도 하다. 맛 칼럼니스트 황교익 씨는 요리사가 ‘어떤 의도’로 음식을 조리하고, 이를 먹는 사람이 그 의도를 읽을 때 비로소 음식이 문화가 된다고 규정한다. 또한 음식은 누군가에게는 노동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놀이가 된다.

    수많은 걸작 요리 만화를 생산해온 일본에서 미식이 ‘대중문화’가 된 때는 1970년대 경제 성장기였다. 여기에 가장 큰 기여를 한 것은 미식 취미를 가능하게 한 돈과 ‘오타쿠’라는 일본식 마니아 문화였다. 이즈미 지하루 교수(서경대)는 “일본 사회가 거대해지자 개인은 정치나 사회에 점점 더 무관심해지고 혼자만의 생활로 파고들어 갔다. 음식은 여기에 가장 잘 맞는 주제다. 요즘 일본에서 요리는 세분화 단계에 접어들었으며, 은퇴한 남성 대상의 요리가 유행 중이다”라고 말했다.

    한국의 블로거들이 이 같은 일본 미식 문화의 영향을 받았음은 명백하지만, 인터넷과 디카라는 새로운 미디어를 확보한 이들에게 요리는 놀이 혹은 예술과 더욱 비슷해졌다. 미술평론가 박유신 씨는 “매일 음식을 만드는 어머니들은 ‘오늘 저녁 뭘 해먹을까’에서 요리 얘기가 멈춘다. 그러나 젊은 층은 에스프레소 기계, 미니 오븐 등 조리기구나 레시피에 대한 관심과 정보가 많다. 이들에게는 요리가 영화 감상이나 만화 읽기처럼 트렌디한 행위이자, 이성에게 매력을 드러내는 수단이다”라고 말한다.

    “디지털 이전 세대에게 요리-음식이란 연구를 통해 밝혀내야 할 ‘관념’과 흡사한 것이었다. 예컨대 언론에 나오는 이규태 칼럼류의 글에서 음식이란 역사, 진위, 의미를 성리학적으로 따져봐야 할 대상이었다. 이에 비해 디지털 세대에겐 내가 먹은 맛, 내가 가진 느낌이 중요하다.”(주영하·민속학자)

    디지털 이전 세대에게 스키야키는 언제, 누가 먹기 시작한 음식이며 제대로 맛을 내는 ‘원조’가 어디인지를 알려야 할 대상이다. 하지만 디지털 세대에게는 ‘내가 어디서 먹은 스키야키가 어떤 맛인지’가 중요하며, 내가 스키야키를 만들었다는 ‘체험’에 방점을 찍는다(배수아의 소설 ‘일요일 스키야키 식당’에 등장하는 스키야키는 이와는 또 다르게 ‘욕망의 상징’이다).

    디지털 세대의 요리에 대한 태도는 예술, 특히 미술 작가들과 닮은 점이 많다. 요리 블로거들은 한결같이 ‘창조의 즐거움’ 때문에 요리를 한다고 고백한다. 국내 요리대회에서 최연소, 최다 수상자인 ‘요리천재’ 한승택(24) 씨는 미술을 전공하다 요리로 진로를 바꿨는데, “미각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남들이 미쳤다고 할 만큼 상상력 가는 대로 요리한 것이 좋은 평을 받았다”고 말했다. 거꾸로 식재료로 작업하는 미술 작가도 드물지 않으며, 오정미 씨처럼 미술 작가이면서 푸드 스타일리스트인 경우도 있다.

    인터넷과 디카 덕에 요리는 놀이 혹은 예술로 승화

    Digital Kitchen ‘블로거 요리사’ 전성시대

    음식 사진을 지속적으로 촬영하는 젊은 여성주의 작가 방명주의 작품. 그녀에게 음식은 때로 가사 노동이고, 때로는 생명이다.

    “미술이 시각예술이라면, 요리는 미각예술이다. 두 분야 모두 재료를 선택해 원재료에서 얻을 수 없는 감동과 ‘미’를 가진 작품을 완성한다. 만들어 대접하고, 대접한 뒤엔 사라지는 요리의 속성은 특히 현대미술의 퍼포먼스와 무척 닮았다. 음식이 배고픔을 해결하는 문제에서 미식 문화가 되면 요리사의 창의력을 점점 더 많이 요구하게 되므로 요리는 갈수록 예술에 가까워지게 된다.”(박유신)

    작가로서의 요리사는 당연히 더 많은 사람들에게 감상되기를 원한다. 요리 블로거들은 블로그 조회수가 늘어날 때의 쾌감은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한 식도락동호회 사이트의 회원은 “회사에서 아무리 별 볼일 없는 사람이라도 요리 사이트에서는 스타가 될 수 있다. 많은 사람의 관심을 끌고 사랑을 받는다. 오프라인으로 선물을 보내오는 사람도 많다”며 “그런 매력 때문에 조명도 구입하고, 비싼 고성능 접사 카메라도 산다”고 말한다.

    결국 요리와 새로운 디지털 미디어가 결합해 독특한 요리 블로그 트렌드가 생겨난 것인데, 식도락이 대중적인 ‘동호회 활동’으로 성장한 것도 90년대 중반 PC통신을 통해서였다. ‘하이텔’ 미식동호회 출신인 한 요리 블로거는 “대학 동아리보다 미식동호회 활동이 훨씬 즐거웠다. 신문의 맛집 정보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우리가 맛집을 찾아다니면서 정보를 ‘생산’하는 재미가 있었다”고 회고했다. 그런 점에서 요리는 고립된 개개인을 연결해준 최초의 미디어 중 하나이기도 하다.

    식도락이나 요리 블로거들에 대해 비판적인 의견도 없지는 않다. 요리 블로그는 사생활을 ‘전시’한다는 점에서 확실히 ‘도덕적 책임감 없이 관음의 욕망에 휘말린 구경꾼 대중의 문화’(바네사 R. 슈와르츠, ‘구경꾼의 탄생’)라는 측면을 가진다. 또 자신이 먹을 때의 기분과 순간의 주관적인 ‘인상 비평’이 곧 음식비평이 되기 때문에 미식 블로거들은 직업적인 요리사들에게는 종종 ‘재난’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지금 요리 블로그의 기능은 이런 단점들을 상쇄하고도 남는다. 요리는 오랫동안 억눌려온 개인의 감각, 타인과의 작은 소통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잘 보여준다. 또한 요리는 나와 함께 음식을 먹을 사람들을 생각하게 만들면서 디지털 속도전에 잠시 브레이크를 거는 행위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요리 혹은 요리 블로그는 내가 이 세상에 무엇인가 창조할 수 있는 존재임을 깨닫게 한다. 미식가이자 작가, 경제학자인 김재준 교수(국민대)는 맛에 대해 건축의 거장 미즈 반 데 로에의 말을 인용해 이렇게 말한다. ‘신은 우리가 사소하게 생각하는 구체적인 작은 부분에 계신다.’

    한 블로그에 ‘가지 썰고, 호박 썰고, 새송이 썰고/ 올리브유 두르고 갈색 빛나게 구웠을 뿐인데/ 왜 이렇게 맛있는 거요’라는 글과 함께 접시 위에 요염하게 누운 황금빛 가지와 호박 사진이 올라 있다. 감동적이다. 요리는 블로그 시대의 예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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