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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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우리를 무력하게 만드나

  • 김찬호 한양대 강의교수

    입력2006-01-16 10: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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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엇이 우리를 무력하게 만드나
    매일 식탁에 오르는 김치에서 기생충 알이 나왔다는 발표에 모두가 경악했다. 그러나 그 알이 다 기생충으로 부화하는 것은 아니고, 혹 몇 마리가 부화한다 해도 건강 상태가 좋으면 별 문제가 안 된다는 후속 발표가 이어졌다. ‘웰빙’에 대한 관심이 지대해지면서 우리는 건강정보에 점점 민감해진다. 어떤 음식에서 발암물질이 검출됐다느니 하는 보도에 귀를 기울인다. 그러나 발암물질 역시 모두 암을 발병시키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심지어 건강한 사람의 몸에서도 하루에 1000개 정도의 암세포가 생겨난다고 한다. 다행히 모두 즉시 제거되기 때문에 탈이 나지 않는 것일 뿐.

    과학의 힘은 어떤 현상의 원인을 객관적으로 밝혀주는 데 있다. 인과관계가 명료하게 규명됨으로써 우리는 무지몽매의 암흑에서 해방될 수 있다. 14세기 서양에서 흑사병이 창궐해 인구의 4분의 1이 죽어나갈 때도 쥐벼룩 같은 발병 인자는커녕 ‘병균’이라는 개념조차 알지 못했다. 사람들은 신에게 복종하지 않은 대가로 받는 벌이라고 생각했고, 수도사들은 제 몸에 채찍질을 하면서 하염없는 속죄 의식을 벌였다.

    근대과학은 이러한 불합리의 굴레에 매여 있던 인류에게 계몽의 빛으로 다가왔다. 실체에 관한 진실을 소상하게 해명함으로써 허황된 믿음과 주술적인 속박에서 풀어준 것. 더 나아가 사물과 환경을 통제하고 조작할 수 있는 여지를 한없이 넓혀주었다. 그 핵심에는 보편적인 인과론 법칙이 깔려 있었고, 과학적인 사유는 현대인의 상식으로 정착돼왔다.

    그러나 과학적 패러다임이 위력을 발휘하면서 또 다른 덫이 생겨났다. 바로 단순한 인과론이다. 기생충 알이나 발암물질의 예처럼 A가 B를 유발한다고 할 때, 그 맥락과 조건은 매우 복잡하다. B가 아닌 C나 D라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는 가능성도 상존한다. 물론 과학도들은 어떤 인과관계가 성립하는 독특한 계(界·system)에 대해 면밀하게 연구한다. 그런데 그 지식이 대중에게 전달될 때는 지극히 단편적이고 피상적인 모델로 둔갑하기 일쑤다. 정보가 범람하는 환경에서 사람들은 요모조모 따지는 것을 귀찮아한다. 무조건 A는 B라는 식의 단순한 결정론이 설득력을 갖고, 결과적으로 정보로서 경쟁력을 획득한다. 그리고 그것은 또 다른 무지를 양산한다.

    단답형 사고와 단선적 인과론 함정 여전



    과학적인 사실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인간과 삶을 바라보는 눈이 지극히 단순한 결정론에 빠지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평생성적 초등 4학년에 결정된다’는 식의 담론이 얼마나 많은 부모와 아이들을 두려움으로 몰아넣었는가. 인생은 몇 가지 일반론으로 환원될 만큼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배움과 성장에는 엄청나게 다양한 경로가 존재한다. 외국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데도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조기 유학에 여러 해 동안 엄청난 돈을 투자했는데도 수업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아이가 있다. 공부를 못해도 성공한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고, 성공하지 못해도 행복한 사람들 또한 대단히 많다.

    단답형 사고와 단선적 인과론, 그리고 흑백론적 결정주의가 우리를 무력하게 한다. 어설픈 도식과 이미지로 미래를 예단하고 한정짓기 때문. 그래서 몇 가지 결점이나 제약 조건을 절대화하면서 스스로 위축돼버린다. 그러나 핸디캡을 극복함으로써 오히려 커다란 성취를 이룩한 사례들을 우리는 수없이 알고 있다. 지금 드러나 있는 현상 이면에 감춰진 잠재 능력, 획일적인 시스템으로 평가되지 않는 존재 가능성을 보는 눈이 청소년과 부모들에게 필요하다. 장차 펼쳐질 일생의 시나리오에 대한 다양한 상상력을 복원할 때 우리는 천박한 결정론의 횡포와 강박에서 벗어난다. 그 자유로움에서 생성되는 생명의 에너지로 자신만의 고유한 미래를 창조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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