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01

2005.09.06

한국 게 섰거라! 러시아 IT가 뛴다

두둑한 ‘오일머니’ 우수한 인력 본격 투자 … 한국 IT 기업들 진출 절호의 기회

  • 모스크바=김기현/ 특파원 kimkihy@donga.com

    입력2005-08-31 18: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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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월16일 모스크바의 관문인 셰르메티예보 국제공항. 화물터미널에 복면을 쓰고 중무장을 한 세무경찰이 들이닥쳤다. 이들은 항공화물로 들어온 수십여 개의 컨테이너를 압수했다. 압수된 품목은 휴대전화로, 무려 300t. 대수로는 2300만대, 금액으로는 1000만 달러가 넘는 것으로 추산됐다.

    러시아 언론은 다음 날 일제히 ‘사상 최대의 휴대전화 밀수 단속이 벌어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압수된 휴대전화는 러시아 시장을 지배하고 있는 한국산을 비롯해 모토롤라와 노키아, 지멘스 등이었다. 이 여파로 시중의 휴대전화 가격이 하루아침에 15%나 뛰는 후폭풍이 일어났다.

    러시아 휴대전화 시장은 3~4년 전부터 중국에 이은 제2의 황금시장으로 불리고 있다. 지난해 러시아에서 모두 3030만대의 휴대전화가 팔린 것으로 집계됐다. 이는 전년에 비해 76%가 성장한 수치. 시장 규모는 중국에 이어 2위지만 성장률은 단연 세계 최고다. 올해도 러시아 휴대전화 시장은 3420만대, 금액으로는 51억 달러(약 5조2300억원)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국제유가의 폭등으로 세계 2위의 석유수출국인 러시아로 ‘오일머니’가 쏟아져 들어오면서 소비자들의 구매력이 크게 높아졌기 때문이다.

    휴대전화 법대로 관세 부과

    그동안 세계 최대의 휴대전화 시장으로 군림해왔던 중국 시장은 포화상태가 되면서 성장률이 떨어지고 나날이 경쟁이 치열해져 수익성도 낮아지고 있는 상태. 이 때문에 전 세계의 휴대전화 제조업체들은 2002년부터 러시아 시장에서 각축을 벌이기 시작했다.



    치열한 경쟁 끝에 러시아 시장에서 1위를 차지한 것은 한국산 휴대전화 단말기다. 지난해 삼성전자는 560만대를 팔아 24%의 시장 점유율로 1위를 차지했고, 100만대를 판 LG전자는 6위, 팬택 계열은 9위를 기록했다. 백색가전과 디스플레이에 이어 휴대전화 시장도 한국 제품이 석권하게 된 것. 모토롤라는 2위로, 노키아는 3위로 밀려났다.

    그동안 워낙 폭발적으로 시장이 성장하면서 이들 거대 메이커 말고도 중소업체들까지 덩달아 러시아 시장에서 ‘대박’을 터뜨렸다. 제품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는 현상이 일어나면서 시장에 내놓기만 하면 무조건 팔렸기 때문. 중국 시장에서 철수한 국내 중견 휴대전화 제조업체들은 러시아 시장에서 꽤 재미를 봤다.

    그러나 지난해부터 러시아 휴대전화 시장 환경이 급변했다.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규모를 갖추지 못한 중소업체들은 힘이 달렸다. 막대한 마케팅 비용과 물량을 쏟아붓는 대기업이 아니면 살아남기 힘들어진 것. 러시아 시장에 들어왔던 한국의 중견업체들은 대부분 고전 끝에 철수했다. 중국에 이어 러시아 시장에서까지 밀려나자 국내 중견 휴대전화 제조업체들은 지난해 줄줄이 문을 닫았다. 맥슨과 세원, 텔슨, 기가텔레콤 등이 러시아 시장에서 마지막 승부를 던졌다가 쓰러진 업체들이다. 삼성과 LG, 팬택의 ‘빅3’을 제외한 한국 업체들에게 러시아 휴대전화 시장은 더 이상 공략하기 쉬운 시장이 아니다.

    한국 게 섰거라! 러시아 IT가 뛴다

    판탈리예프 모스크바주 제1부지사와 악수하고 있는 구본무 LG그룹 회장.

    여기에 새로운 변수는 IT(정보기술) 제품에 대한 러시아 정부의 관세 정책 변화다. 지금까지 IT 관련 제품들은 반(半)불법 통관인 ‘회색통관’으로 수입돼왔다. 예를 들면 IT 제품은 대개 부가가치가 높은 고가이지만 단순 부품인 것처럼 서류를 꾸며 통관시키는 등의 방법으로 수입해온 것. 2004년도 러시아 가전 시장 규모는 80억 달러로 추산되고 있지만 러시아 세관 당국에 공식적으로 신고된 가전제품 수입액은 20억 달러를 조금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러시아에 수출하는 외국 가전업체들은 직접 통관을 할 수도 없었다. 핀란드나 독일 등 인근의 창고까지 가져다놓으면 통관은 세관당국의 비호를 받는 ‘마피아’ 같은 전문조직이 담당했다. 러시아 시장을 한국 제품이 휩쓸고 있지만 정작 한국 측 통계에서 러시아 수출액은 실제보다 훨씬 적다. 최종적으로 러시아로 가는 제품이지만 신고된 수출국은 핀란드나 독일로 돼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양국의 통계 차이는 9월 한러 정상회담에서까지 거론됐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실제보다 적은 양국 간 교역액 통계 수치를 들이대며 경제협력이 부진하다고 불만을 나타냈기 때문. 이에 대해 노무현 대통령이 통계와 실제 상황이 다른 현실을 설명하느라 진땀을 흘린 것으로 알려졌다.

    반면 러시아의 전자제품 유통업체(딜러)들은 거의 세금을 내지 않고 들여온 제품을 팔아 엄청나게 성장했다. 러시아 당국이 이런 사실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모른 체해 왔다. 법대로 관세를 매길 경우 전자제품의 국내 가격이 높아져 소비자들의 불만이 커지기 때문에 가전제품의 보유율이 일정한 수준에 올라갈 때까지 기다린 것이다. 그리고 조용히 지켜보던 러시아 당국이 드디어 8월16일 전자제품 중 가장 규모가 큰 휴대전화 시장부터 칼을 댄 것이다.

    테크노파크 4곳 조성 추진 중

    러시아 당국은 그동안 회색통관한 제품으로 폭리를 취해온 유로셋 등 자국내 대형 유통업체에 대한 수사와 세무조사에도 들어갔다. 앞으로 전자제품 시장에서 점차 회색통관이 자취를 감추고 정식 통관이 이뤄질 것이라는 전망이다.

    이번 휴대전화 대규모 압수로 한국 업체들은 당장 손해를 보게 생겼다. 러시아의 관행에 따라 외상으로 판 대금을 자칫 못 받게 될 처지가 됐기 때문.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오히려 환영하는 분위기다. 불법 통관에 의한 시장교란이 없어지고 제품력으로 경쟁하는 공정한 구조가 자리 잡을 것이라고 기대하기 때문이다.

    러시아 정부가 IT 제품의 통관을 강화하려는 이유 중 하나는 자체 IT 산업을 육성하려는 의도도 숨어 있다. 풍부한 자원과 원천기초 과학기술을 자랑하는 러시아지만 경제구조는 철저히 ‘후진국형’이다. 석유와 가스 등 에너지 자원 수출이 전체의 절반을 넘는다. 경쟁력 있는 산업이라고는 지난해 세계 1위의 무기 수출을 기록한 군수산업뿐이다. 또 언제까지나 고유가가 이어지리라는 보장도 없다. ‘오일머니’를 투자해 하루빨리 대체 산업을 육성해야 하는 것이다.

    러시아 정부가 눈을 돌린 것은 IT 산업이다. 소프트웨어 왕국 인도처럼 러시아도 값싸고 우수한 과학기술 인력이 풍부하다. 러시아는 지난해 IT 산업 육성 5개년 계획을 수립했고 이를 실현할 전초기지로 4개의 테크노파크 조성을 추진 중이다. 테크노파크가 세워질 곳은 모스크바 인근의 핵기술 단지인 두브나와 제2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 제3의 도시로 군수산업 중심지인 니주니노브고로트(옛 고리키), 시베리아의 과학기술 중심지인 노보시비르스크다. 노보시비르스크에는 옛 소련 시절 세워져 대덕단지의 모델인 된 과학단지 ‘아카뎀고로독’이 있다. 2002년 한러과학기술센터가 들어가 있는 상태.

    러시아 정부는 테크노파크에 외국 자본과 기술을 유치하기 위해 이곳에 들어오는 외국계 기업과 연구기관에게는 각종 혜택을 줄 예정이다. 벌써부터 구글과 IBM 등 외국 기업들이 진출을 검토하고 있다.

    러시아는 진대제 정보통신부 장관이 방문했을 때 ‘IT 강국’ 한국 기업의 진출을 강력히 요청했다. 지난해 노 대통령의 방러를 계기로 벤처기술협회를 중심으로 한국 업체들이 러시아에 공동진출하는 방안이 활발히 논의됐다. 그러나 관계기관과의 협의과정에서 더 이상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다.

    한민족글로벌벤처네트워크(INKE) 모스크바 지부 의장인 김태철 HMM 대표는 “2010년이면 170억 달러 규모로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는 러시아 IT 시장에서 한국이 적어도 30%는 차지해야 하는 것 아니냐”며 격변하는 러시아 시장을 읽고 공격적인 진출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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