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01

2005.09.06

“축구는 협회 장난감이 아니다”

“모든 것 감독 때문” 매번 핑계 … 기초 실력 높일 귀중한 28개월 까먹어

  • 김화성/ 동아일보 스포츠전문기자 mars@donga.com

    입력2005-08-31 15: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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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은 제갈공명이 살아 있는 사마중달을 내쫓았다. 네덜란드에 있는 히딩크가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두 사람의 목을 잇달아 잘랐다. 코엘류, 본프레레…. 다음은 또 누구 차례일까.

    코엘류는 2003년 2월4일 한국 국가대표팀 감독 취임 일성으로 “히딩크 감독이 이룩한 4강 신화에 더 이상 취해 있어서는 안 된다. 이젠 깨어나야 한다”고 일갈했다. 본프레레도 2004년 6월24일 취임 회견에서 “한국 감독을 맡으면 월드컵 4강이라는 부담이 항상 따라다닌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지만 도전이라 생각하고 수락했다. 한국 선수나 팬들 모두 히딩크의 4강 신화에 등 기대고 편히 앉아 있으면 분명히 좌초한다”고 경고했다. 그리고 14개월 후 그들은 나란히 짐을 싸야 했다.

    코엘류는 2004년 4월19일 고별 회견에서 “14개월 동안 선수들과 훈련할 수 있었던 것은 고작 72시간뿐이었다. 내 뒤에 오는 지도자에겐 2002년 히딩크에게 해줬던 만큼 충분한 지원을 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본프레레도 2005년 8월23일 사퇴 회견에서 “14개월 내내 2002년 히딩크 팀과의 비교에 시달렸다. 하지만 시간이 너무 없었다. 이틀간 훈련해 좋은 성적을 낼 수 있는 감독은 이 지구상에 아무도 없다. 후임 감독에겐 훈련 시간을 많이 보장해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히딩크는 ‘족집게 강사’ 코엘류·본프레레는 ‘가정교사’

    바보 같은 일들이 연거푸 되풀이되고 있다. 왜 똑같은 일들이 고쳐지지 않고 계속되고 있을까. 무엇이 문제인가. 히딩크가 ‘족집게 강사’라면 코엘류나 본프레레는 ‘가정교사’였다. 족집게 강사에겐(수능시험일까지)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 ‘시험에 나올 만한 것들만 뽑아서 집중적으로’ 가르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가정교사는 기초부터 차근차근 가르쳐야 한다. 많은 시간과 인내가 필요하다. 한국은 이미 2002년 히딩크에게서 배웠다. 눈앞의 성적이 아니라 최종목표를 향해 장기적 계획을 세우고 그 일정에 따라 차근차근 앞으로 가야 한다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한국 축구는 전체 200여명 중 20~30위권을 오르내리는 학생과 같다. 이것도 상당히 후하게 봐줘서 그렇다. 아마 진짜 실력은 50위권쯤 될 것이다. 그런데 이런 실력의 학생이 어쩌다 답을 ‘잘 찍어서’ 4등이 됐다. 그리고 그 이후 모든 것이 변했다. 학생은 자신의 실력이 진짜 4등인 것처럼 행동하기 시작했다. 학생의 부모도 이젠 비싼 돈 주고 강사만 모셔오면 자식의 실력이 쑥쑥 느는 것으로 생각했다. 가정교사가 자기 자식을 잘 가르치고 있는지, 아니면 가르치는 시늉만 하고 있는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자식이 가정교사의 말을 잘 듣는지, 아니면 우습게 알고 잘 따르지 않는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이제 한국 축구는 더 이상 2002월드컵 이전의 한국 축구가 아니다. 월드컵을 계기로 한국 축구의 패러다임(틀)이 완전히 바뀌었다. 선수들도 생각이 딴판으로 바뀌었고 팬들의 기대감과 눈높이는 한없이 높아졌다. 그뿐인가. 한국과 상대하는 팀들의 작전이나 선수들의 정신 자세도 그전과는 완전히 달라졌다. 과거에 브라질, 프랑스, 아르헨티나, 잉글랜드 팀과 맞붙었을 때 한국이 사용했던 ‘전원 수비 후 역습’작전을 이젠 오만, 베트남, 몰디브 같은 팀들이 한국을 상대로 즐겨 쓰게 됐다. 한국이 브라질과 비기기만 해도 만족했듯이 오만, 베트남, 몰디브도 한국과 무승부만 돼도 마치 이긴 것처럼 좋아하게 됐다. 당연히 오만, 베트남, 몰디브 선수들은 (한국 선수들이 몸을 던져가며 브라질 공격을 막아냈듯이) 놀라울 정도로 투혼을 불사르며 공격을 막아낸다.

    그러나 한국 선수들은 전혀 이런 상황을 눈치 채지 못하고 있다. ‘4강의 추억’에 젖어 ‘거들먹거리는 축구’를 하고 있다. 축구협회의 한 관계자는 “선수들이 애국심과 사명감보다는 상업적인 것에 휘둘린다. 스폰서나 신경 쓰고 대표팀을 단순히 몸값을 올리는 기회로만 삼고 있다”고 개탄했다. 신문선 SBS 축구해설위원도 “선수들이 월드컵을 통해 눈만 업그레이드됐다. 실력을 업그레이드하기보다는 다른 것에 신경을 쓰니 제대로 경기에 임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 옛날 브라질이나 프랑스 같은 세계적인 팀들이 ‘전원 수비 후 역습’을 펼치는 한국팀을 상대로 어떤 작전과 플레이를 펼쳤는지 기억하는 선수들은 거의 없다. 당시 그들은 한국이 약체인데도 평소보다 더욱 거칠게 몰아붙였고 패스도 얼이 빠질 정도로 빠르고 날카로웠다. 한 골 넣었다고 느슨하게 수비하기는커녕 더욱 공격의 고삐를 죄어 추가골을 터뜨렸다. 게다가 한국은 이제 이전처럼 선수들이 오랫동안 함께 모여 훈련할 수 없게 됐다. 보통 사나흘, 길어야 열흘 정도 손발을 맞출 수 있을 뿐이다. 유럽이나 남미의 축구 선진국들처럼 선수 소집을 하게 된 것이다. 물론 이것은 축구 선진국으로 가기 위한 필연적인 과정이다.

    선수들은 영 딴판, 팬들 기대감 눈높이 한없어

    하지만 한국의 축구 실력은 아직 그들에 훨씬 못 미친다. 옛날만큼은 아니지만 축구 선진국들보다는 당연히 더 많은 훈련 시간을 가졌어야 했다. 한국은 ‘4강 추억’에 젖어 이런 고려도 없이 덜컥 브라질이나 독일, 잉글랜드처럼 사나흘 손발 맞추고 A매치를 치렀다. 더구나 유럽의 해외파들은 13시간이나 걸리는 비행 시간과 시차 때문에 실제 국내파들과 발을 맞출 시간은 이틀 정도밖에 안 됐다. 그들의 몸은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패스미스가 속출하고 똥볼이 어지럽게 날았다. 정말 월드컵 이후 한 번도 시원한 경기를 펼치지 못했다. 오죽했으면 어느 팬은 “차라리 한국 축구가 더 몰락해 다시 기초부터 시작했으면 좋겠다”고 말했을까.

    김호곤 전 올림픽대표팀 감독은 “프로구단 선수 차출 규정을 되도록 지키고 싶지만 현재 한국 축구 실력으로 볼 때 그 규정을 지켜서는 결코 국제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낼 수 없다”고 단언했다. 김호 전 수원삼성 감독도 “히딩크가 이룬 성적은 앞으로 그 누가 감독으로 와도 결코 낼 수 없다. 프로팀들이 1~2년간 주전선수들을 내주고 어떻게 팀을 운영할 수 있겠는가. 히딩크 때는 프로팀들이 그런 희생을 기꺼이 감수했기 때문에 월드컵에서 좋은 성적을 낸 것”이라고 말했다.

    영국의 세계적인 축구 칼럼니스트 랍 휴스는 “이제 한국 축구는 히딩크 감독이 2002월드컵을 위해 훈련캠프를 차렸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상황에 놓였다. 코엘류, 본프레레를 히딩크와 비교하지 말라. 2002 주역이었던 홍명보와 황선홍은 떠났다. 어린 선수가 홍명보의 자리를 하루아침에 메우리라고 생각했다면 큰 오산이다. 조재진, 정조국, 김동현 같은 젊은 선수들에게 황선홍에 버금가는 능력을 보여달라고 해서도 안 된다. 경험이란 한순간에 얻어지는 게 아니다. 월드컵 영웅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생기를 잃어간다. 브라질의 히바우두는 예전의 모습을 찾을 수 없다. 최우수선수였던 독일의 명골키퍼 올리버 칸도 ‘알까기’를 하는 등 예전 실력이 아니다. 그들은 지쳤다. 2002월드컵 무대를 휘저었던 스타들은 피로에 지쳐 퇴보하고 있다. 정말 명심해야 할 것은 월드컵의 과실을 따 먹은 선수는 더 이상 예전과 같은 굶주림을 모른다는 것이다”라며 일침을 가한다.

    그렇다. 한국 선수들은 이제 배가 불렀다. 더 이상 미친 듯이 뛰지 않는다. 거들먹거리기까지 한다. 게다가 손발 맞출 시간도 없다. 비싼 돈 들여 모셔온 가정교사는 더 이상 ‘시험에 나올 만한 문제들’을 족집게처럼 찍어주지 않는다. 부모는 모셔온 가정교사를 내팽개치듯 방치해버렸다.

    코엘류나 본프레레가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한 데에는 그들의 문제도 있지만 축구협회의 주먹구구식 행정과 한국 축구인들의 배타성에도 큰 책임이 있다. 2002월드컵 4강에 취해 외국인 감독을 데려다놓기만 하면 모든 문제가 저절로 풀릴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그것은 큰 착각이다. 히딩크는 사실상 무제한의 선수 선발과 소집 훈련, 각종 인적·물적 지원을 받았다. 하지만 코엘류와 본프레레는 거의 지원을 받지 못했다. 그리고 모든 책임은 그들에게 돌려졌다. 결국 그들의 실패는 한국 축구의 돈과 시간의 손실이다. 또한 국제축구계에서 큰 웃음거리가 됐다. 무엇보다 코엘류와 본프레레의 재임 기간인 28개월이란 소중한 시간을 까먹어버렸다. 기초실력을 높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날려버린 것이다.

    애초 ‘가정교사’를 모셔다놓고 ‘족집게 강사’에게 바라던 효과를 기대했던 게 잘못이었다. 처음부터 ‘세대교체’에 중점을 두어 과감하게 신인들을 발굴해 국제 경험을 쌓게 했더라면 한국 축구를 한 단계 더 높일 수 있었을 텐데 그 황금 찬스를 놓쳐버렸다. 그 과정에서 약팀에 좀 지면 어떤가. 그런 패배 경험은 신인들에겐 정말 뼈가 되고 살이 된다. 결국 축구협회의 ‘여론 눈치 행정’이 ‘돈과 시간’을 낭비한 셈이다. 이제 독일월드컵까지는 9개월밖에 남지 않았다. 이제 다시 족집게 강사를 모셔오는 수밖에 없다. 기초실력을 쌓기엔 시간이 너무 없다.

    前 트레이너 “축구협회장은 늘 선수들과 함께하는 사람”

    2002월드컵 전까지만 해도 한국 축구는 모든 게 ‘잔디구장 탓’이었다. 성적이 나쁘면 잔디구장이 없었던 탓이고, 골문 앞에서 똥볼을 날려도 어렸을 때부터 맨땅에서 공을 찼기 때문이었다. 어쩌다 성적이라도 낼라치면 ‘맨땅에서 일군 자랑스러운 투혼’이 됐다. 그렇다면 10개의 월드컵경기장과 파주에 국가대표 트레이닝센터(NFC)까지 생긴 요즘엔 한국 축구가 비약적으로 발전했는가? 이젠 똥볼 슛을 날리지 않는가? 하늘 높이 날아가는 홈런 슛을 더 이상 보지 않게 되었는가?

    2002월드컵 이후부터 한국 축구의 새로운 핑곗거리는 ‘대표팀 감독’이다. 성적이 나빠도 대표팀 감독 때문이요, 선수들 헛발질도 대표팀 감독의 잘못이다. 겨우 이틀 발맞춰보고 나가서 패스미스가 속출하면 대표팀 감독의 작전 부재 탓이다. 축구협회나 국내 지도자들, 그리고 선수들은 팔짱 끼고 앉아서 대표팀 감독의 잘못을 끊임없이 지적해댈 뿐이다. 대표팀 감독 경질이라는 큰일이 있어도 축구협회 회장은 어디에 숨어 있는지 얼굴조차 보이지 않는다. 그런 일은 기술위원회가 알아서 할 일이지 자신은 관여할 일이 아니라는 듯하다. 2002월드컵 4강을 이뤘을 때 TV에 틈만 나면 정 회장의 얼굴이 나왔던 일이 생각난다. 문득 코엘류 감독이 데려온 조제 아우구스투 전 축구대표팀 피지컬 트레이너의 말이 귀에 새롭다.

    “축구협회 회장이라는 자리는 매일 매일 게임 속에서 살고, 로커룸의 땀을 들이마시며 선수들과 늘 함께해야 한다. 그러면서 또한 모든 결정의 책임을 지는 사람이다. 그러나 정몽준 회장은 빛나는 순간에만 있었다. 그에게 축구는 단순히 장난감에 불과하다.”

    코엘류가 잘리자 2004년 4월19일 로이터통신은 “한국 축구대표 감독 자리는 ‘독이 든 성배(聖盃·poisoned chalice)’라고 비아냥댔다. 본프레레가 도중하차한 2005년 8월23일 2006 독일월드컵 공식 홈페이지(fifaworldcup.yahoo.com)도 “한국 축구대표팀 감독직은 ‘독이 든 성배’가 됐다”고 다시 한번 확인했다. 과연 누가 앞으로 ‘독이 든 술잔’을 덥석 잡아 마실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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