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간동아 로고

  • Magazine dongA
통합검색 전체메뉴열기

승려 행창의 자전거 유럽 기행

산타클로스의 나라 핀란드 따뜻한 인정 ‘감동 또 감동’

‘수많은 호수’ 동화 속 풍경 연상 … 야영지 가는 곳마다 주인들 식사초대

산타클로스의 나라 핀란드 따뜻한 인정 ‘감동 또 감동’

산타클로스의 나라 핀란드 따뜻한 인정 ‘감동 또 감동’

석양에 붉게 물든 핀란드 최대의 사이마 호수, 동화 속에서 막 나온 듯한 숲 속의 시골집(왼쪽부터).

러시아 국경도시 비보르크를 출발할 때부터 내리던 빗줄기는 러시아와 핀란드의 접경 지대인 비무장지대(DMZ)에 접어드는 순간 그쳤다. 러시아 쪽 국경경비소 앞 10여m 지점에 그려진 국경선을 넘었다. 원형의 금빛 별들이 수놓인 유럽연합(EU)의 파란 깃발이 선명하게 다가온다. 이제 자유진영이다.

남북 분단의 현실을 체험하며 자란 세대가 가지는 이미지이겠지만, ‘자유’를 실감하자 희열까지 느껴진다. 역사의 잔재가 알게 모르게 머릿속에 남아 있기에 오는 감정 변화일 것이다.

어쨌든 체제 전환 이후 치안이 극히 불안해진 러시아에서 ‘요람부터 무덤까지’ 보장해주는 사회복지의 천국 스칸디나비아반도로 이동한 데서 느껴지는 차이는 생각보다 컸다.

이제 더는 교통안전사고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인간이 존중받는 사회, 한마디로 선진국 땅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다. 국도변을 따라 몇 km 간격으로 한두 채씩 서 있는 농가들은 하나같이 깔끔하게 단장된 넓은 정원을 갖추고 있다. 창고 건물 한두 동과 정원의 연장으로 보이는 축구장만한 크기의 잔디밭, 한가로이 풀을 뜯는 말들….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에서 선진 북유럽의 안정된 생활 모습이 피부로 다가온다.

호숫가에 홀로 사는 50대 아저씨 “더 쉬다 가라” 간청





해가 많이 짧아진 탓에, 국경에서 20km쯤 떨어진 핀란드 최대의 호수 사이마 호숫가의 도시 ‘랍펜란타’에 접어들자 숲으로 둘러싸인 호수는 이미 짙은 노을 빛에 잠겨 있었다. 엷은 회색 갈대 숲이 우거진 호숫가에 텐트를 펼쳤다.

핀란드의 면적은 한반도보다 1.5배나 넓지만, 대부분의 국토가 수천개의 호수와 그 안에 자리한 크고 작은 섬들로 구성돼 있는 데다 인구는 서울의 절반 정도인 500만여명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아담하고 아늑한 느낌을 준다. 핀란드의 기후와 자연환경을 생각하면 이 나라 사람들은 모두 ‘숲 속 호숫가의 요정’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듯하다. 갖가지 동화의 원천이 된 크리스마스의 상징 산타클로스 이야기가 시작된 곳도 바로 이곳, 핀란드가 아닌가.

수도 헬싱키를 향해 다시 자전거에 올랐다. 차량이 별로 없는 국도 풍경은 한산함을 넘어 고요할 지경이다. 숲 속으로 끝없이 이어지는 지극히 단순한 세계, 내 자신의 숨소리가 유일한 대화 상대다. 하루 동안의 긴 대화가 끝나갈 즈음, 코보라시 외각에 있는 또 다른 호숫가에 멈췄다. 물결조차 잠든 호숫가 텐트 안에서 등잔불을 밝혀놓고는 언제나 같은 식단, 밥과 된장으로 식사를 했다. 짠지 한 조각이 못내 그립지만 허튼 꿈이란 걸 안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 기적이 일어났다. 여명 속에 물안개를 피우는 호숫가에서 세수를 하고 어제 남겨둔 찬밥을 물에 말아 먹은 뒤 출발 준비를 하고 있는데 50대 후반으로 보이는 한쪽 팔이 없는 아저씨가 나를 찾아왔다. 호수 건너편 집을 가리키며 아침을 먹으러 오란다. 방금 식사를 끝냈다며 사양하는데도 막무가내다. 2km나 되는 호숫가를 돌아 일부러 찾아온 그의 초대를 거절할 수 없어, 자전거에 짐을 싣고는 그 집으로 향했다.

산타클로스의 나라 핀란드 따뜻한 인정 ‘감동 또 감동’

핀란드 수도 헬싱키의 상징인 키아스마 교회 전경, 중세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헬싱키 앞바다, 젊은 부부가 사는 시골집 창고에서 젖은 신발과 옷을 등잔불에 말리고 있는 필자, 스웨덴 스톡홀름으로 떠나는 여객선 안에서 만난 친구들(위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클래식 음악이 울려퍼지는 깔끔하게 정돈된 집안. 타오르는 벽난로가 아늑함을 더하는 거실을 지나자 식탁 위에 나를 위한 음식이 한 가득 마련돼 있었다. 그가 권하는 대로 배가 터질 듯이 식사를 한 뒤에야 우리는 비로소 통성명을 했다. 그의 이름은 케툴라. 무슨 뜻이냐고 묻자, 작은 인형 하나를 들어 보여주었다. 너구리다. 순간 나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려버렸다. 그렇게 우리는 자연스레 친구가 됐다.

그의 소유지는 호숫가 서쪽 언덕 일대에까지 뻗쳐 있었다. 그는 아담한 오두막, 긴 겨울 동안의 난방을 위해 준비해둔 장작이 가득한 창고, 석빙고 구실을 하는 북유럽 전통의 반지하 창고와 운치를 더하는 조그만 나루터까지 천천히 소개한 뒤, 자녀들이 모두 성장해 타지로 떠나고 홀로 적적하게 지낸다며 며칠 쉬었다 가면 안 되겠냐고 간절히 청했다.

그가 내준 곳은 나루터가 바라보이는 오두막. 방 하나에 조그만 사우나까지 갖춘 포근한 공간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떠나온 뒤 오랫동안 물을 구경하지 못하다 샤워하고 사우나에까지 앉으니 쌓인 피로가 한순간에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내 ‘친구’는 집을 방문한 손님에게 사우나를 권한 뒤 맥주를 대접하는 것이 핀란드의 오랜 전통이라며 맥주 두 병을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핀란드 사람들의 손님 접대가 북유럽 가운데에서도 가장 융숭하다는 이야기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정말 감동할 정도였다.

우연한 만남 덕에 너구리 아저씨와 동화 속 주인공 같은 며칠을 보낸 뒤, ‘꼭 다시 오라’며 작은 나팔로 무사 여정을 기원하는 그를 뒤로하고 다시 길에 나섰다. 얼마나 달렸을까, 헤어짐을 아쉬워하는 마음 탓인지 비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검은 국도가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할 즈음에는 손발이 꽁꽁 얼어붙고, 신발 안에까지 빗물이 들어차 온몸에서 비가 뚝뚝 떨어지는 상황이었다. 창가에서 따뜻한 불빛이 새어나오는 도로변 집 앞에 자전거를 세우고, 집 부근 잔디밭에서 하룻밤만 캠핑해도 좋겠냐고 물었다. 그런데 아이를 안은 젊은 부부는 빈방이 있으니 집 안에 들어와 자라는 것이다. 장비는 물론 온몸이 젖은 상태라 사양했더니, 마구간 옆 창고에 텐트를 칠 수 있게 안내해주었다. 비바람만 없다면 어딘들 사양하겠는가! 몸을 녹이라며 건네주는 따끈한 차 한 잔까지 마시고, 밤새 등잔불 주위에 군화와 젖은 옷가지를 둔 채 정신없이 잠에 빠져들었다.

핀란드 사람들의 인정에 또 한 번 감동한 것은 다음날 아침이었다. 출발 준비를 마칠 즈음, 창고 밖에서 들리는 아이 소리에 나가보니 부인이 와 있었다. 불편한 잠자리에 잘 잤느냐며 오히려 미안해하더니 함께 아침식사를 하자고 초대하는 것이다. 세상에는 참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많구나, 라는 생각에 가슴속까지 따뜻해져왔다.

스웨덴행 배편 승선 … 여행객들끼리 선상 파티

다시 나선 도로변 풍경은 연일 내리는 비로 하루가 다르게 색감을 더해가고 있었다. 쏟아지는 빗줄기를 등에 업은 채 마침내 수도 헬싱키에 들어섰다. 잿빛 하늘색만큼이나 짙은 회색빛 바닷가에 있는 헬싱키. 무감각한 현대식 콘크리트 건물들 속에 근대풍 건축물들이 드문드문 서 있었다. 시가지 풍경이란 그곳의 역사를 대변하게 마련인데, 오랜 종주국 스웨덴에 의해 제정 러시아에 할양된 식민지 핀란드의 수도인 헬싱키에서는 역사의 정성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다음 예정지인 스웨덴으로 향하기 위해 헬싱키에서 스톡홀름까지의 배편을 예약했다. 12층이나 되는 거대한 여객선 지하 차고에 자전거를 세워두고는 배 위로 올라왔다. 출항한 지 2시간쯤 지난 저녁식사 시간, 배의 복도에는 수천명이 넘는 승객들이 한꺼번에 몰려나와 배가 기울지나 않을까 걱정될 정도였다. 조용히 쉬고 싶지만 사람들로 붐비는 대합실에 초저녁부터 침낭을 펴고 누울 수 없어, 자전거 헬멧과 침낭을 매단 작은 배낭을 든 채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런데 핀란드와 덴마크 젊은이들이 다가오더니 자기들이 예약한 침대 칸에 자리 하나가 비어 있으니 사용하란다. 신세를 좀 지자며 그들을 따라 침대 칸으로 갔더니,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라며 함께 파티를 하자고 했다. 알고 보니 이 배를 탄 사람들 대부분은 헬싱키와 스톡홀름을 오가는 배에서 선상 파티를 하려는 여행자들이란다.

비좁은 침대 칸에서 파티가 한창인 대형 홀로 자리를 옮긴 뒤, 한국 합기도를 배우고 있다며 더듬더듬 우리말까지 하는 핀란드 중년 신사까지 모여 자정이 넘게 이야기꽃을 피웠다.



주간동아 2004.12.09 463호 (p74~75)

다른호 더보기 목록 닫기
1216

제 1216호

2019.11.29

방탄소년단은 왜 그래미 후보에도 못 올랐나

목차보기구독신청이번 호 구입하기

지면보기 서비스는 유료 서비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