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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기억상실’ 주인공이면 대박?

영화·드라마 주요 소재 ‘트렌드’로 등장 … “있을 수 있지만” 우아한 설정 현실감 결여

  • 김민경 기자 holden@donga.com

‘기억상실’ 주인공이면 대박?

‘기억상실’ 주인공이면 대박?

약물, 교통사고, 심지어 거짓말까지 영화와 드라마 주인공들의 기억상실 원인은 다양하다.

SF 스릴러의 단골 주연은 인간을 넘보는 기계였고, 멜로의 필연적 결말은 불치병이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최근 스릴러와 공포, 멜로 구분 없이 트렌드를 이끌어가는 소재는 단연 ‘기억상실’이다. 200만 관객을 울린 ‘내 머리 속의 지우개’가 있고, 이를 미국 버전으로 옮긴 것이 아닌가 싶은 ‘노트북’-영화제목도 같은 학용품이다-이 있다. 일본 감독 이와이 슈ㄴ지의 ‘하나와 앨리스’ 역시 기억상실증을 모티브로 한 로맨스 영화다.

기억상실을 다룬 스릴러물로는 ‘나비효과’ ‘포가튼’ ‘블랙아웃’이 막 개봉했거나 대기하고 있다.

‘기억상실 영화의 고전’이라 할 마빈 르로이의 ‘마음의 행로’(1942)와 닮은 SBS ‘마지막 춤을 나와 함께’에서는 주인공 현우가 두 번의 기억상실을 겪는다(제작진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생각해보면, ‘파리의 연인’에서 실연당한 이동건이 선택한 길도 기억상실을 위장하는 것이었다.

“다양한 원인, 간편한 극적 장치”

기계시대와 불치병에 싫증 난 작가들이 일제히 기억상실의 매력이라도 발견한 걸까. 영화 속 치매에서부터 약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원인에 의한 주인공들의 기억상실이 과연 과학적으로 혹은 임상적으로 가능한가.



한국과학기술원(KAIST) 정재승 교수는 “나란 결국 내 머릿속에 남아 있는 기억과 타인들의 기억으로 규정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현실의 환자에겐 매우 불행한 질환이지만 영화 속에서 기억상실은 ‘내가 누구인가’를 묻는 철학적 문제를 제기하는 장치인 것이다.

또한 영화평론가 이명희씨는 “기억상실처럼 간편한 극적 장치도 드물다. 기억상실은 배신 같은 주인공들의 비도덕적인 행동에 대한 핑계도 되고, 현실을 회피하는 통로도 된다”고 말한다.

‘내 머리 속의 지우개’와 ‘노트북’은 똑같이 치매에 의한 여주인공들의 기억상실, 그리고 ‘대신 모든 걸 기억하려는’ 남자들의 순애보를 그린다. 다른 것이 있다면 ‘내 머리 속의 지우개’에서 주인공 수진(손예진)이 27세라는 젊은 나이에 ‘유전적 요인’과 스트레스에 의한 치매에 걸린다는 것. 흔히 알츠하이머로 대표되는 치매는 정상적으로 성숙한 뇌가 손상해 파괴되는 현상을 말한다. 노년기에 주로 발생하지만, 드물게 젊은 나이에도 발생할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기억상실’ 주인공이면 대박?

기억상실을 모티브로 해 인기를 얻고 있는 영화 ‘나비효과’.

그러나 정 교수는 “치매 초기엔 건망증인 줄 알다가 나중엔 자신의 주민등록번호나 계절도 잊어버리는데, 건망증에서 치매에 이르기까진 시간이 꽤 걸린다. 영화처럼 급속하게 나빠지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수진이 실연으로 심한 스트레스를 받아 기억상실이 빠르게 진행된다면, 정신의학적으로는 불행한 과거-영화에선 유부남과의 연애-를 잊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그러나 수진은 철수(정우성)와의 사랑을 선택적으로 잊어버린다. 그럼으로써 드라마는 더 비극적인 반전을 갖는다.

한편 ‘노트북’은 한 노신사가 할머니에게 낡은 공책에 담긴 사랑 이야기를 읽어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두 사람에게는 모든 것을 건 사랑이었지만, 기억을 잃어가는 할머니는 이를 기억하지 못한다.

일반적으로 기억상실증은 크게 둘로 분류된다. 하나는 뇌의 관자엽(측두엽)에 위치한 해마(단기를 장기 기억으로 연결)가 손상돼 영화 ‘메멘토’나 ‘첫키스만 50번째’처럼 10분 전에 일어난 일도 잊어버리는 ‘전진성 기억상실증’이고, 다른 하나는 장기 기억을 저장하는 편도체의 문제로 오래되고 감정적으로 굳어진 기억을 잊는 ‘퇴행성 기억상실’이다. 드라마나 영화에선 대개 후자가 등장한다.

‘하나와 앨리스’에선 깜찍한 두 소녀가 머리를 다쳤다 의식을 되찾은 남자 선배에게 거짓말을 한다. 남자선배가 기억상실에 걸려 애인 하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라고. 게다가 앨리스와는 이전에 사귀다 헤어진 사이였다고. 남자는 스스로 기억상실증이라 믿고 앨리스와 헤어진 이유를 고민한다. 말하자면 가짜 기억상실증인 셈인데, ‘파리의 연인’에서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이동건이 기억을 잃어버린 것처럼 행동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환자가 기억상실증에 걸린 것처럼 해 의사까지 속이는 건 불가능하다고 한다. 부천성가병원 정신과 김대진 교수는 “임상적, 심리적 테스트를 거치면 어느 정도의 기억을 잃어버렸는지도 거의 정확하게 나온다. 군대를 가지 않으려 기억상실이라 하는 사람들도 드러난다”고 말한다. 단, 심리와 임상 테스트 예상 답안을 미리 조사하여 가짜 답을 써낼 정도로 ‘전문가’라면 의사도 어쩔 수 없다는 것.

나란히 개봉되는 스릴러 영화들이 모두 기억상실을 소재로 하고 있는 점도 매우 특이하다.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는 ‘나비효과’는 어린 시절 끔찍한 기억에 의해 일시적 기억상실(‘블랙아웃’) 증세에 시달리고 있는 대학생 주인공 에반이 우연히 일기장을 통해 잃어버렸던 기억의 바로 그 지점, 즉 과거로 반복해 돌아가는 내용이다. ‘백투더퓨처’와 같은 설정이지만 그가 과거에서 돌아올 때마다 현실은 완전히 달라져 있다. 이 같은 설정은 인과율 문제를 불러일으키므로, 온갖 경우의 세계가 여러 개 존재한다는 가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이 모든 일이 에반의 머릿속에서 벌어지는 ‘환상’이어야 한다.

즉, 에반은 사고에 대한 충격으로 기억상실에 걸려 있고, 죄책감 속에서 계속 기억을 재구성한다. 그럴 때마다 에반은 대뇌피질에 심한 부하가 걸려 코로 피를 쏟아낸다. ‘나비효과’처럼 할리우드에서 즐겨 사용하는 설정 중 하나는 어린 시절의 성학대 같은 스트레스가 기억을 지우고, 이것이 무의식 세계에 자리잡는다는 것이다.

점점 더 일상적인 질환 경고인가

“일반적으로 기억은 의식적인 것이다. 그러나 망각이라는 현상은 완전히 기억에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 사람이 기억하지 못할 뿐이다. 그래서 ‘암묵적 기억’이라는 무의식적 기억은 어른이 되어 어떤 자극에 의해 되살아나는 경우가 종종 있다.”(서울대 신경정신과 권준수 교수)

특히 정신분석학자들은 기억상실증이 평소 회피하고 싶은 기억이나 정신적 충격을 방어하기 위해 일부러 잊으려고 노력한 결과라고 보기도 한다. 그러므로 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불행한 기억을 잊는 ‘선택적 기억상실증’에 걸릴 수 있다.

드라마 ‘마지막 춤을 나와 함께’처럼 교통사고로 기억상실에 걸렸던 사람이 다시 사고로 옛 기억을 되찾고, 최근의 기억을 잃어버리는 일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권 교수는 “사고로 2차적 기억상실이 일어난다기보다 사고라는 심리적 충격에 의해 기억하기 싫은 것을 잊는 등 심인성 기억상실이 오고, 옛 기억이 되살아나는 경우가 있다”고 말한다.

기억상실을 다룬 영화 중 가장 독창적 줄거리라 할 만한 ‘포가튼’은 인간의 첫 번째 기억, 즉 어머니와 자식의 기억을 다룬다. ‘결코 잊히지 않는 기억이란 없다’와 ‘사라지는 기억이란 없다’는 의학계의 주장이 맞서는 가운데, 주인공의 엄마는 끝까지 아들의 얼굴을 기억해낸다.

일시적인 기억상실을 의미하는 ‘블랙아웃’을 제목으로 한 영화에서는 ‘로힙놀’이라는 강력한 약물이 등장한다. 미국 나이트클럽 등에서 비밀리에 거래되는 이 약은 ‘마인드 이레이저’(mind eraser)라고 불리며 복용 20분 만에 효과가 나타나 8시간 가까이 기억을 잃게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화나 드라마에 등장하는 다양한 기억상실에 대해 전문가들은 ‘드물지만 있을 수도 있다’는 태도다. 영화 속의 예가 장차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이 같은 기억상실 영화나 드라마가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다.

“교통사고 등에 의해 머리를 다치면, 이런저런 기능이 함께 손상된다. 충동을 조절하지도 못하고 판단력도 떨어진다. 드라마처럼 ‘우아하게’ 기억력만 잊는다는 건 현실감이 없다.”(김대진 교수)

‘손예진은 치매에 걸려도 예쁘냐’는 일부 누리꾼(네티즌)들의 반응에 일리가 있는 셈이다.

같은 맥락에서 드라마의 정교한 짜임이나 캐릭터 자리에 기억상실증을 끌어온 작품들은 절반의 평론가들에게서 ‘혹평’을 듣는다. 부실한 드라마 구조와 빈곤한 연기를 로힙놀처럼 강력하지만 간단한 약물로 대신하려 했다는 의혹을 사기 때문이다.

기억상실은 여전히 영화나 드라마 속에서나 있을 법한 설정처럼 보인다. 그러나 의사들은 기억상실이 점점 더 일상적으로 자주 발생하는 질환이라고 말한다. 잦은 음주와 스트레스로 인한 ‘블랙아웃’ 혹은 ‘건망증후군’이 바로 그것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와 드라마들의 진짜 기획 의도 중 하나 역시 현대인들의 기억상실증에 대한 실질적 경고는 아닌지 생각해볼 일이다.



주간동아 2004.12.09 463호 (p66~67)

김민경 기자 holde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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