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63

2004.12.09

휴대전화 키드의 반란 ‘광주 커닝 사태’

디지털 편리성과 성적 지상주의‘잘못된 만남’ …자발적 참여·적극적 표출 등 월드컵 거리응원과 닮은꼴

  • 강지남 기자 layra@donga.com

    입력2004-12-02 12: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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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휴대전화 키드의 반란 ‘광주 커닝 사태’
    휴대전화 테러’. 단 한 차례의 시험으로 수백만명의 입시생을 1등부터 꼴찌까지 줄 세우는 수학능력평가시험(이하 수능)의 견고한 위상이 손바닥보다 작은 휴대전화의 공습에 여지없이 무너졌다. 광주에서 휴대전화를 이용한 대규모 커닝 사건이 벌어지자 우리 사회는 ‘교복을 입은 전문사기단’이라도 적발한 양 호들갑을 떨고 있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 그룹’에 속하는 고교생들과 고교 교사들은 담담하다. 결국 터질 게 터진 것 아니냐는 반응이다. “병신들, 적당히 좀 하지”라는 한 고3 수험생의 소감(?)은 이번 사건에 대한 이들의 이해를 적절히 대변하고 있다.

    휴대전화를 이용한 커닝은 전대미문의 사건이 아니다. 예전에도 있었고, 앞으로도 발생할 전망이다. 지난해 경기 J고등학교에서도 학교 시험 때 문자메시지를 이용한 커닝 사건이 발생했다. 공부 잘하는 한 학생이 문자메시지에 답을 적어 다른 교실에서 시험을 보고 있는 친구들에게 전송한 것. 문자메시지 한 통에 3∼4개 교실, 10여명의 학생이 연루된 이 커닝 사건으로 평온하던 학교는 발칵 뒤집혔다.

    “마음만 먹으면 하죠. 수업시간에도 엎드려서 문자 보내면 안 걸리는데, 시험 볼 때라고 해서 걸리겠어요?”(고3 수험생 C양)

    시험장은 더 이상 파놉티콘(panopticon·원형감옥)이 아니다. 파놉티콘에서 재소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간수처럼 시험장 학생들의 동작 하나하나를 감시하는 감독관들은 오늘날 ‘시선의 권력’을 잃었다. 학생들이 품속에 숨겨놓고 얼마든지 몰래 시험장 ‘밖’과 커뮤니케이션할 수 있는 휴대전화를 갖게 된 까닭이다.

    휴대전화 키드의 반란 ‘광주 커닝 사태’
    휴대전화 커닝 수법은 이미 오래된 일 ‘예고된 일탈’



    사실 학생들은 휴대전화까지 동원할 필요도 없다고 한다. 볼펜 딸각 거리는 소리, 발 신호, 기침 소리 등등 커닝의 방법은 무궁무진하기 때문이란다. 그런데 이런 수법은 낯익다. 어른들도 학생 때 즐겨 애용하던 수법이기 때문이다. 사실 조선시대 과거 시험장에서도 커닝이 벌어졌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커닝은 역사적 행위 아니던가. 이번 광주의 수능부정 파문처럼 대규모 커닝은 그동안 안 한 것이 아니라, 휴대전화 같은 수단이 없어서 못한 것 아닌가.

    요즘 청소년에게 휴대전화란 단순히 무선이동통신이 아니다. 노래와 게임과 사진 찍기가 가능한 장난감이자, 또래집단과 자신을 이어주는 끈이자, 화장실 갈 때조차 가지고 가지 않으면 찜찜한 ‘나만의 분신’이다. 깜빡 잊고 휴대전화를 집에 두고 나오면 지각을 불사하고서라도 집에 다시 돌아가는 게 요즘 청소년이다. 더 이상 수업시간에 몰래 ‘쪽지’를 전달하는 학생은 없다. 대신 ‘문자를 날린다’. 같은 반, 옆 반, 심지어 다른 학교 친구에게까지, 수업시간에 몰래 속닥대는 수다는 전파를 타고 공간을 초월하고 있다. 고등학교 2학년 담임을 맡고 있는 박모 교사는 ‘휴대전화 키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했다.

    “수업시간에 휴대전화를 사용하다 적발되면 1주일 압수하는 게 원칙이에요. 그러면 차라리 2주일 대청소하겠다며 매달리죠. 내일 꼭 받아야 하는 전화가 있다면서 내일 하루만 다시 돌려달라는 아이도 있어요.”

    휴대전화 키드의 반란 ‘광주 커닝 사태’

    2002년 자발적으로 월드컵 거리응원에 나선 청소년들.

    휴대전화를 매개로 한 세대간 간극은 학교 안 교사와 학생 사이에서 그대로 나타난다. 아이들은 야간 자율학습시간에 도망쳐 나와 담임 교사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낸다. ‘샌님, 저 집에 가요. ㅋㅋ 낼부터 욜씸히 할게요. ㅠ.ㅠ .’ 선생님에게서 ‘답문’이 오지 않으면 친구에게 하듯 투정도 부린다. ‘저 씹힌 거 맞지요... 흑흑.’ 지각도 문자로 통보한다. ‘늦잠 잤어요. 30분 지각임니당. 지송지송∼.’ 서울 도곡동 중대부속고교 곽준석 교사는 “지각 같은 경우 직접 전화를 걸어 양해를 구하는 게 예의인데도 요즘 학생들은 자신에게 편리하고 익숙한 문자로 통보해 가끔씩 황당할 때가 있다”고 말했다.

    이번 대규모 커닝 사건에 대해 어른들은 “어떻게 전화기로 커닝할 생각까지 했을까”라며 놀라워하지만, 이들에게 이보다 더 친숙한 매체는 없다. 새로 출시되는 휴대전화 모델명과 광고모델, 제품 특성을 줄줄이 꿰는 것은 기본. 이번 휴대전화 커닝에 이용된 초경량 저가상품인 LG-NS1000 모델의 경우 TV 광고조차 하지 않지만, 휴대전화 시장에 통달한 청소년들이 커닝에 적합한 휴대전화 모델을 찾아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지난해 J고등학교 휴대전화 커닝 사건이 벌어졌을 때 교사들을 질색하게 했던 것은 정작 커닝이란 일탈행위 자체가 아니라, 커닝에 대한 아이들의 인식과 태도였다. 커닝을 모의한 아이들은 이번에 광주에서 수능부정 파문을 일으킨 학생들처럼 철통 보안을 유지하며 비밀스럽게 휴대전화 커닝을 모의하지 않았다. 주변 아이들의 귀에 들릴 정도로 열린 자세로 커닝을 모의했고, 따라서 자연스레 학교 당국에도 알려지게 됐다.

    한 교사는 “이 사건이 알려진 뒤 다른 학생들이 보인 반응이 커닝 자체보다 더욱 놀라웠다”고 털어놓았다. 학생들이 커닝 사건에 분개한 이유가, ‘친구들이 나쁜 행동을 해서’가 아니라 ‘하마터면 내가 손해볼 뻔했기 때문’이라는 것. 이 같은 반응은 이번 사태를 둘러싼 수험생들의 반응과도 비슷하다. 인터넷 게시판 등을 통해 ‘얘들이 적발되지 않았더라면 내가 손해볼 뻔했다’ ‘차라리 잘됐다. 덕분에 경쟁자가 많이 줄었다’는 반응이 나오고 있다.

    휴대전화 키드의 반란 ‘광주 커닝 사태’

    광주 수능부정 사건에 가담한 학생 6명이 11월24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영장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고개를 숙인 채 기다리고 있다.

    ‘원죄’는 학생들에게만 있나 … ‘반칙’ 권한 어른들은 무죄?

    일선 교사들은 요즘 청소년들이 이전 세대와 달라진 점에 대해 ‘자신의 이익을 지키는 쪽으로 의사결정을 하며 원칙보다 개인 사정을 더 중시하는 경향이 짙다’고 지적한다. 커닝도 비도덕적인 행위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남의 커닝은 내게 불이익을 가져다주는 행위’로 이해하는 셈이다. 서울 시내 고교에 근무하는 김모 교사는 이 같은 청소년 특성이 드러나는 한 가지 예로 두발 검사 풍경을 제시했다.

    “내가 학교 다닐 때는 나는 적발됐는데 나보다 머리 긴 친구가 적발되지 않으면 그 친구를 운 좋다며 부러워했다. 그런데 요즘 학생들은 당당하게 몇 학년 몇 반 친구가 나보다 머리가 더 길다고 고발한다. 부당하게 혼자서만 불이익 받지 않겠다는 태도다.”

    이 같은 청소년의 새로운 가치 판단기준에 대해 한국청소년개발원 이종원 연구위원은 “압축성장으로 인한 폐단이 청소년 세대에까지 미친 결과”라고 지적한다. 사회 전체가 급속하게 변화하면서 공정한 규칙에 의한 보상이 이뤄지는 사회 체제를 갖추지 못한 혼란스런 상태에서 청소년이 손쉽게 선택할 수 있는 기준이란 ‘이득’이라는 설명이다.

    휴대전화 키드의 반란 ‘광주 커닝 사태’

    수능부정 혐의 수험생들이 사용한 휴대전화는 ‘바(bar)형’으로 폴더를 여닫을 필요가 없다.

    대규모 커닝 사태를 두고 어른들은 크게 근심하고 있다. “어린 학생들이 어떻게 거리낌없이 엄청난 범죄를 저지를 수 있을까”라며 무너진 인성교육과 학생들의 도덕 불감증을 질타하고 있다. 그러나 ‘원죄’는 학생들 스스로 잉태한 것이 아니라 어른과 사회가 제공한 게 아닐까. 한국교육연구소 권재원 연구위원은 “불법 족집게 과외를 통해서라도, 내신 부풀리기를 통해서라도 점수만 올리면 된다는 논리를 이미 학부모와 학교가 아이들에게 가르쳐왔다. 잘못된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점수만 올리면 된다는 어른들의 논리는, 점수만 올릴 수 있다면 커닝도 거리낄 게 없다는 아이들의 논리와 일맥상통한다”고 지적했다.

    아예 ‘커닝’을 권하는 어른도 있다. 지난해 서울 강남의 M학원에서 입시 준비를 했던 강모양은 “유명 국어강사가 수능시험을 한 달쯤 앞둔 강의시간에 ‘수능 시험장에서 이제까지 커닝했다가 적발된 사례는 한 건도 없으니 정 급하면 커닝하라’고 했다”고 말했다. 올해 수능 감독관으로 참여했던 최모 교사는 “자칫 학생의 인생을 망칠 수도 있기 때문에 부정행위를 적발하는 것은 무척 부담스런 일”이라고 털어놨다. 한국교육과정평가원에 따르면 1994년 수능시험이 시작된 이래 적발된 부정행위는 4건의 대리시험 적발이 전부다. 커닝하다 시험지가 몰수된 사례는 없는 셈이다.

    요즘 청소년은 휴대전화와 인터넷이라는 최첨단 정보화 기술을 즐겨 악용하는 악동이기만 할까. 이들에게서 정보화 기술을 거둬들여야만 과거의 온순한 아이들로 복귀할 것인가. 그러나 우리는 이미 정보화 시대의 아들 딸들인 우리 청소년이 표출한 새롭고도 긍정적인 현상을 경험했다. 2002년 월드컵 거리응원과 여중생 추모 촛불시위가 그것. 그런데 재미난 점은 이번 휴대전화 커닝의 행태가 2002년 한반도를 뜨겁게 달궜던 월드컵 거리응원과 속성을 같이한다는 것이다.

    휴대전화 키드의 반란 ‘광주 커닝 사태’

    교실에서 휴대전화 카메라를 이용해 찍은 ‘폰카 사진’.

    이경상 한국청소년개발원 부연구위원은 청소년들이 주축이 되어 벌인 월드컵 거리응원의 특성을 △자발적 참여 △적극적 표출 △개방적 태도 △신공동체주의적 질서의식으로 꼽았다. 이 같은 특성은 휴대전화 커닝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표 참조). 휴대전화 커닝을 벌인 학생들은 서로 모르는 사이임에도 공통의 목적을 가지고 자발적으로 참여해 적극적으로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실천했고, 각각 분담한 일을 질서 있게 수행했다. 결국 월드컵 거리응원과 휴대전화 커닝은 우리 청소년들이 가진 세대적 특성이 낳은, 이란성 쌍둥이인 셈이다.

    이경상 위원은 “이번 휴대전화 커닝은 가상과 현실세계를 뚜렷하게 구별하지 못하는 청소년의 특성이 반영된 결과이기도 하다”고 덧붙였다. “이렇게 일이 커질 줄 몰랐다”는 가담 학생의 고백처럼, 현실세계의 결과는 미처 예단하지 못한 채 가상의 게임을 즐기듯 커닝 행위를 즐긴 속성도 있다는 것.

    월드컵 거리응원과 여중생 사망 추모 촛불시위가 이미 증명했듯, 우리 청소년의 디지털에 기반한 에너지는 무한히 긍정적인 방향으로 표출할 수 있다. 이번 대규모 수능부정 파문은 이 같은 에너지가 ‘학벌 지상주의’란 암초를 만나 그 방향을 180도 전환한 사건이라 하겠다. 한국청소년개발원 이종원 연구위원은 “기성세대가 정보화 시대의 주역이 될 청소년들을 괴롭히는 몇 가지 암초를 제거해준다면, 이들이 가진 무한 에너지는 386세대가 민주화에 기여했던 것 이상으로 사회 발전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휴대전화 키드의 반란 ‘광주 커닝 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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