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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 너무 재미있어 중독됐어요”

경기 진성고 토론 동아리 10개 남짓 활발한 활동 … 세상 보는 눈 저절로 성장

  • 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토론, 너무 재미있어 중독됐어요”

“토론, 너무 재미있어 중독됐어요”

진성고등학교 독서토론 동아리 ‘중독’학생들이 자유롭게 토론하고 있다.

책제목에는 보통 글쓴이가 말하려는 모든 게 담겨 있잖아. 오늘은 ‘당신들의 천국’이라는 제목이 뜻하는 게 뭔지, 이 세상에 진정한 천국이라는 것이 과연 존재할 수 있을지에 대해 한번 이야기해보자.”

사회자의 논점 소개가 끝나자 바로 토론이 시작됐다. 경기 광명시 진성고등학교(이하 진성고) 독서토론반 ‘중독(重讀)’의 토론 시간. 책상에 둘러앉은 11명의 2학년 학생들은 이청준의 소설 ‘당신들의 천국’을 놓고, 누구 하나 빠질 것 없이 열띤 토론을 벌였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동상’이 상징하는 것은 무엇인지에서 출발한 논의는, 군사 독재로 점철된 우리 현대사에 대한 재해석과, 피지배자가 지배를 내면화하게 되는 과정에 대한 통찰로까지 끝없이 이어졌다. 반박과 재반박을 넘어선 토론이 이해와 공감으로 향하는 동안 지도교사가 할 일은 그저 조용히 지켜보는 게 전부인 듯했다.

“오늘은 선생님이 들어와 계시지만, 평소에는 토론이 시작될 때와 끝날 때만 계시고 자리를 피해주시기도 해요. 우리들이 자유롭게 의견을 나누고 정리할 수 있게 배려해주시는 거죠.”

‘중독’ 학생들의 말처럼 이들의 토론은 평소에도 지극히 자율적인 분위기에서 진지하고 치열하게 이뤄진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스스로 원해서 하는 토론이기 때문이다.

전국독서토론대회 고교부 싹쓸이



학생의 자율성과 창의성을 강조하는 7차교육과정의 시행과 논술, 구술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대학 입시제도의 영향으로 ‘토론’에 관심을 갖는 고등학교들이 많아지고 있다. 최근 전국새물결독서운동본부가 주최하고 교육부가 후원한 ‘제3회 전국독서토론대회’에서 고교부 대상과 금상, 은상, 지도교사상 등을 석권해 화제를 모은 진성고는 이러한 움직임에서 한발 앞서가고 있는 학교다. ‘중독’을 비롯해 시사토론 동아리 ‘나무’와 ‘야누스’, 문학토론 동아리 ‘글 따라기’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루는 토론 동아리가 10개 남짓 활발히 활동하고 있고, 모든 모임에서 학생들의 자발성이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전교생이 기숙사 생활을 하는 이 학교의 특성상 주중 내내 학교에 머무르는 학생들은 수업시간을 피해 휴식시간과 자율학습 시간을 쪼개가며 토론하는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시험 기간을 제외하면 매주 목요일 오전 7시20분부터 9시10분까지 두 시간 동안 독서토론을 해요. 책을 정하기 위한 예비모임을 하고, 책도 읽어야 하니까 ‘중독’에 들이는 시간이 적지 않은 거죠. 하지만 1년 정도 그렇게 계속하다 보니 스스로 책을 읽고 생각을 정리하는 능력이 크게 늘었다는 생각이 들어요.”(2학년 박수지)

학생들이 토론에 ‘중독’된 것은 바로 이처럼 스스로 커지고 있음을 실감하기 때문이다. 지난 1년 동안 ‘중독’ 학생들은 ‘데미안’ ‘당신들의 천국’ 같은 문학작품부터 ‘지식의 최전선’ ‘제3의 물결’ 같은 교양서와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같은 화제의 소설까지, 폭넓고 다양한 책을 읽었다. 토론을 위해 스스로 정리한 ‘발제문’과 친구들과의 대화를 통해 논점을 정리한 뒤 각자 기록하는 ‘토론 후기’는 구성원들 안에 차곡차곡 쌓여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소중한 자산이 됐다.

“토론, 너무 재미있어 중독됐어요”

시사토론 동아리 ‘나무’ 학생들의 토론하는 모습.

“그냥 책을 읽었을 때는 스쳐 지나가던 부분도 토론을 하고 나면 생생하게 정리가 돼요. 그 안에 담긴 의미와 오늘날 현실에서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까지 이해할 수 있죠.”(2학년 전호준)

이런 친구들을 보고 자극을 받은 학생들이 또다시 토론 동아리를 꾸리기 시작하면서 진성고의 토론 동아리는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다. 이 ‘자발성’의 물꼬를 튼 것은 시사토론 동아리 ‘나무’. ‘중독’이 학교에서 공식적으로 승인된 CA(특별활동) 동아리인 데 비해, ‘나무’는 학생들이 스스로 만들어 지도교사를 ‘섭외한’ 자율 동아리다. ‘우리 하나하나가 나무가 되어 토론의 숲을 이루자’는 의미로 이름 붙인 ‘나무’의 구성원들은 2003년 2월 고재원 교사의 ‘역사시사 탐구’ 특강을 같이 들은 친구들. 기숙사 학교인 진성고에는 담당과목 교사가 지도하는 단과 학원 방식의 특강이 마련돼 있는데, 이들은 매일 아침 뉴스의 헤드라인을 보며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고교사의 독특한 수업 방식에 신선함을 느껴 ‘시사토론반’을 만들자는 데 의기투합했다고 한다.

매주 금요일 오전 6시40분부터 8시40분까지, 아침도 거른 채 토론을 이어온 이들은 이제 3학년이 되어 11월 수능시험을 앞두고 있다. 하지만 인터뷰를 위해 잠시 모인 이 ‘수험생’들은 자리에 앉자마자 중간고사 기간에 벌어진 ‘금성출판사 근현대사 교과서’ 논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지난해 그 교과서를 통해 공부하고, 이번 수학능력 시험에서 근현대사를 선택해 시험을 치를 이들에게 이번 사건은 가장 토론해보고 싶었던 주제이기 때문이다.

“항상 이런 식이에요. 신문을 보다 친구들과 함께 이야기해보고 싶은 내용이 나오면 자연스럽게 그걸 주제로 잡아 토론하는 거죠. 다행히 정치, 경제, 사회, 문화로 각각 관심 분야가 나눠져 있어서 토론 주제가 다양하게 나와요.”(3학년 신명진)

“사안 핵심 이해, 생각 논리적 표현”

‘나무’ 학생들에게 토론은 이처럼 자신이 관심 있는 사안에 대해 뜻 맞는 친구들과 의견을 나누는 것, 그 과정에서 서로의 생각을 정리하고 세상을 보는 눈을 키우는 것이다. 거창하고 낯선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언제나 즐겁고 자연스러울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토론이 늘 쉬운 것은 아니었다. 지난 한 해 동안 이들이 다룬 주제 가운데는 행정수도 이전, 이라크 파병, 자유무역(FTA) 협상, 국가보안법 등 우리 사회를 온통 뒤흔든 굵직굵직한 것도 많다. 독서토론과 달리 특별한 텍스트가 없기 때문에 담당 발제자는 신문, 잡지를 뒤지고 외국 인터넷사이트까지 스스로 번역해가며 발제문을 만들어내야 했다.

“초기에는 발제문 만드느라 밥도 못 먹고 잠도 못 자고 고생했어요. 너무 힘들어서 많이 울기도 했죠. 그런데 이제는 토론이 너무 재미있어요. 기사 제목을 보면 그 안에 담긴 의미가 보이고, 사건의 현상 뒤에 숨은 진실 같은 것이 조금씩 드러나는 것 같아요. 친구들과 함께 토론했던 순간들은 고등학교 시절에서 가장 잊을 수 없는 기억이 될 거예요.”(3학년 정상미)

‘나무’ 학생들은 커다란 파일 3개 분량으로 차곡차곡 쌓인 토론 자료들을 꺼내 보이며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보물’이라고 자랑스러워했다. 이처럼 성실하게 세상을 보고 때로는 격렬하게, 때로는 진지하게 서로와 소통하며 성장한 이들은 종종 각종 시사 잡지에 사회 현안에 대해 기고하거나 EBS 토론 프로그램에 나가 청소년들의 의견을 발표하면서 자신들의 ‘내공’을 세상에 드러내기도 한다.

“토론, 너무 재미있어 중독됐어요”

‘나무’ 학생들이 직접 만든 다양한 주제의 발제문들.

“사람들은 토론이 정말 논술, 구술에 도움이 되는지를 묻곤 하죠. 분명히 큰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해요. 사안의 핵심을 이해하고, 자신의 생각을 논리적으로 표현하는 능력이 쌓이니까요.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과정을 통해 세상과 자기 자신을 좀더 잘 이해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는 점이에요. 나중에 대학에 가거나 사회에서 자신의 일을 할 때 고등학교 시절 제 경험이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어요.”(3학년 선자랑)

‘나무’ 학생들은 대학에 진학한 뒤 고등학교 시절 토론반 생활의 경험을 주제로 한 책을 낼 계획이다. 인풋(input)은 쏟아지지만 아웃풋(output)은 무엇 하나 허용되지 않던 시절, 토론이라는 ‘해방구’를 통해 세상과 소통하고 자신들의 뜻을 펼칠 수 있었던 소중한 경험을 후배들과 공유하고 싶기 때문이다.

진성고 토론반 학생들이 소개하는 토론 잘하는 방법

1) 세상과 삶에 대한 호기심을 버리지 않는다.

2)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친구들과 7~8명 규모의 소모임을 만든다.

3) 주제가 정해지면 논점, 토론 소재 등을 정리해 발제문을 작성한다.

4) 토론이 시작되면 먼저 상대방의 의견을 충분히 이해한 뒤, 논리적으로 반박하거나 동의한다는 마음가짐을 갖는다.

5) 토론을 마친 뒤 주제에 대해 새로 이해하게 된 점과 함께 나눈 이야기들에 대해 반드시 후기를 쓴다.

6) 평소 칼럼이나 에세이 등을 쓰며 꾸준히 글쓰기 훈련을 한다.




주간동아 2004.10.28 457호 (p46~48)

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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