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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나 할걸 의원은 해서…”

깐깐한 정치관계법 여의도 ‘돈가뭄’ … 초선들 마이너스 통장 개설 낯익은 풍경

“교수나 할걸 의원은 해서…”

“교수나 할걸 의원은 해서…”

5월14일 17대 총선 초선의원들이 국회 본관 앞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이들 중 상당수는 ‘돈 가뭄’에 시달리고 있다(위). 3월2일 정치관계법이 통과된 뒤 오세훈 전 의원(왼쪽)이 이재오 의원(아래 가운데) 등과 악수하고 있다.

하워드 딘은 미국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존 케리 상원의원에게 패배했으나 그의 혁명적 ‘정치자금 거두기’는 세계 각국의 정치인들에게 ‘벤치마킹’ 대상이 되고 있다. 경선 당시 민주당 내 경쟁자들조차 그의 ‘노하우’를 좇았을 만큼 인터넷을 통한 모금 전략은 돋보였다. 인터넷 블로그(Blog)를 기반으로 모은 자금이 무려 1800만 달러. 거둬들인 정치자금의 40%에 해당하는 액수다. 인터넷을 통한 정치자금 모금은 어느덧 한국에서도 주류로 떠올랐다.

세비로만 의정 활동 버거운 현실

한국의 딘을 꼽는다면? 열린우리당 의원들은 유시민 의원을 지목한다. 유의원은 벌써부터 정치자금 모금한도 1억5000만원을 모두 채웠다. 17대 국회가 문을 열기도 전에 ‘자금 농사’를 마무리한 것. 깐깐하게 개정된 정치관계법(이른바 오세훈법. 오세훈 전 의원은 이 법 때문에 17대 의원들에게 질타의 대상이 되고 있기도 하다) 탓에 후원금 통장 잔고가 ‘0원’인 의원이 적지 않은 가운데 모금 액수 1위를 달리는 ‘탁월한 능력’은 질시와 부러움의 대상이다. ‘인지도’가 적지 않은 구실을 했지만, 유의원의 ‘전략 전술’은 마치 벤처기업의 그것을 보는 듯하다(상자기사 참조).

유의원을 비롯한 몇몇 의원들을 제외하면 17대 의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돈 가뭄’을 호소한다. 16대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줄어든 후원금 탓이다. 한나라당 K의원은 “지금까지 1100만원을 모았다”면서 “후원금이 들어오지 않아 걱정”이라고 했다가 동료 의원들에게 면박을 당하기도 했다. 연봉은 8000만원이 넘지만 씀씀이가 많다 보니 세비로만 의정활동을 하기엔 버거운 게 현실이다. 우리당 한 의원은 “후원금을 1000만원 넘게 모았으면 부자라는 얘기가 돈다”며 “교수 출신 의원들은 농으로 힘들어 못살겠다, 교수나 할 것 그랬다고 푸념하기도 한다”고 전했다.

9월13일 한나라당 이성권 의원은 모처럼 비행기를 타고 지역구가 있는 부산으로 떠났다. 주마다 한두 차례 지역구를 찾는 그는 비행기보다 KTX(고속철도)를 주로 이용한다. 그가 KTX를 이용하는 이유는 단 하나, 비용이 들지 않기 때문이다. 국회법에 따라 의원들은 무료로 철도를 이용할 수 있다. 반면 비행기는 10% 할인 혜택만 받는다. 비행기를 타고 월 8차례 지역구를 방문할 경우 120만원의 비용이 발생한다. 13일 비행기를 이용한 이유는 공무 목적이 아니라 둘째 아이 출산에 맞춘 사적인 방문이었기 때문이다.



17대 국회 최연소(35살) 남성 의원인 그는 특별히 가깝게 지내는 중진의원이나 재계 인사들이 많지 않아 정치자금 모금에 애를 먹고 있다. 6월부터 8월까지 석 달 동안 그가 거둬들인 후원금은 200만원이 조금 넘는 수준이라는 게 측근의 귀띔. 이의원은 그나마 나은 경우다. 100만원 미만의 입금 내역을 갖고 있는 후원금 통장을 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 정도의 후원금으로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은 제한적이다. 이의원은 “정치자금 규모에 활동 폭을 맞추고 있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정치자금의 투명성에 대한 사회적 요구나 국민적 바람은 하늘을 찌르지만 정치 현장 곳곳에 과거의 패러다임이 남아 있어 이의원처럼 ‘가난한’ 의원들을 압박한다. 상임위 활동, 전문가 집단과의 간담회, 지역구 관리 등 돈을 쓸 곳은 여전히 산재해 있다. 견디다 못한 이의원은 세비 일부를 헐어 지역구 활동 경비로 전용했다. 초등학교 1학년에 다니는 아들과 부인은 친정집으로 피신(?)시켜 생활비를 아낀다. 자신도 서울 여의도 14평짜리 아파트에서 고시공부하는 처남과 ‘자린고비’ 생활을 하고 있다. 국회 앞 김치찌갯집을 단골로 삼으면서 ‘절약 노하우’도 제법 쌓았다고 한다.

“교수나 할걸 의원은 해서…”

2003년 국정감사 시즌 국회는 후원회 포스터로 ‘도배’됐다.

40대 초반의 수도권 출신 A의원. 9월13일 그는 지역구 구의회 의원 및 당원들을 모아놓고 추석 선물 안 주고 안 받기 선포식을 했다. 일부 당직자들이 반발하는 기류를 ‘연출’했지만, A의원은 애써 이를 무시했다. 이에 앞서 국회 직원들에게 후원금 내역을 공개하면서 “사무실을 더는 유지할 수 없을 정도다. 세비를 내놓을 테니 고액 연봉을 받는 보좌관들도 풀제에 동참해달라”고 했다는 소문이 전해지면서 반발은 더 이상 확산되지 않았다.

정치권에서 활동하다 국회에 입성한 A의원은 요즘 바깥에서 보던 국회와 직접 보고 느낀 국회 사이에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수시로 느낀다. 대선 당시 자신과 연을 맺었던 모 중진의원이 주기적으로 ‘오리발’을 지급, 돈 귀한 줄 모르고 정치활동을 해왔던 그는 씨가 마른 정치자금 때문에 연일 입이 바짝바짝 마른다. A의원은 지역구든 국회든 자금 담당자와 얼굴을 마주치면 가슴이 쿵쿵 뛴다고 했다. 부도를 막기 위해 사업자금을 구하러 다니는 중소기업 사장 같다는 것.

“교수나 할걸 의원은 해서…”

정치자금 모금에 나선 전여옥 의원 홈페이지

“교수나 할걸 의원은 해서…”

정치자금 모금에 나선 유기홍 홈페이지.

소리 없이 관련법 개정 고개 들어

A의원의 자금 압박은 다른 의원들과 마찬가지로 들어오는 구멍은 적은데 나가는 구멍이 큰 정치환경이 큰 영향을 미쳤다. 6월부터 8월까지 A의원이 거둬들인 후원금 총액은 540만원. 개원 초 물색없이 지역구 간부들과 두세 차례 술자리를 하고 결재한 카드 값이 지금도 그의 목을 짓누른다. 더욱 큰 문제는 이런 경제적 어려움이 국회 활동에도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준다는 점. A의원은 “지난 총선 당시 진 빚을 갚지 못한 이웃 지역 의원의 경우 지금도 사무실로 빚쟁이들이 찾아오곤 한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재력이 여의치 않은 초선의원들의 마이너스 통장 개설은 어느덧 여의도에서 낯익은 풍경이 됐다. 후원회를 꾸린 뒤 차입금을 갚을 요량으로 돈을 당겨쓰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이맘때 국회 게시판은 후원회 행사 포스터로 도배됐다. 의원회관 대회의실 헌정기념관 국회도서관 등 후원회 행사장으로 선호되는 곳을 잡으려는 치열한 경쟁도 벌어졌다. 국감은 제쳐두고 후원회의 역량을 집중하는 의원들이 적지 않았다. 의원들이 국감 기간에 맞춰 경쟁적으로 후원회를 연 것은 피감기관 등으로부터 정치자금을 ‘걷겠다는’ 노골적인 의도가 담겨 있었다. 피감기관뿐 아니라 공기업 임원을 꿈꾸는 사람들도 봉투를 들고 국회를 찾곤 했다. 그러나 후원회 한 번 열어 수억원을 모금한 의원들의 사례는 ‘전설’로 전해질 뿐이다. 2003년 후원금 내역을 보면 중진의원들은 보통 4억~5억원을 모았고, 3억원이 넘는 의원도 40명에 달한다.

“교수나 할걸 의원은 해서…”

이제는 ‘전설’이 된 오프라인 후원회 정치자금 모금.

‘오세훈법’은 의원들의 ‘가을걷이’ 수단이던 후원회 모금 행사를 아예 금지했다. 현행법은 우편이나 전화·인터넷 등 통신, 예금계좌 등으로만 모금할 수 있고 기업의 기부도 금지돼 있다. 게다가 10만원이 넘는 후원금은 익명으로 기부할 수 없게 돼 있어 의원들의 원성이 자자하다. 우리당 법사위 소속 한 의원은 “기업의 기부가 금지돼 있는 상황에서 어느 개인이 굳이 ‘돈 냈소이다’ 하고 이름까지 밝히면서 은행 계좌에 돈을 넣겠느냐”고 지적했다. 한나라당 이계진 의원은 “다리 쭉 펴고 살기로 했다”면서 “정치자금 창구로서의 후원회는 아예 결성하지 않기로 했다”고 말했다.

‘적자 의원’들은 체면 불구하고 세비 인상을 추진하고 싶지만 입 밖에 꺼내기가 쉽지 않다. 이런 와중에 초선의원들에게 단비가 내릴 여지가 생겨나고 있다. 여론의 관심이 온통 정쟁에 쏠려 있는 사이 소리 소문 없이 ‘현실론’이 힘을 얻으며 관련 법 개정 논의가 이뤄지고 있는 것. 모금 한도를 비롯해 우편 전화 인터넷 예금계좌 등으로만 모금하고, 후원회는 열 수 없으며, 기업의 기부가 금지된 현 규정이 일부 고쳐질 가능성이 크다.

인심 넉넉한 후원자를 둔 중진의원들은 1년에 1억5000만원(선거시 3억)의 후원금 한도를 높일 것을 요구하고 있다. 우리당 이석현 의원은 국회 5분 자유발언을 통해 “후원자들에게 다달이 송금을 요구하는 것은 우리의 후원 감정과 정치 문화에 맞지 않는다”며 “후원회 개최는 다시 합법화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상당수 의원들이 심정적으로 이의원의 주장에 동의한다. 오세훈 전 의원이 앞으로 정치를 안 한다고 요순시대에나 어울릴 법한 법안을 만들었다는 것. 그러나 국민 여론은 여전히 ‘가난한’ 의원들 편은 아닌 것 같다.





주간동아 454호 (p66~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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