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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추석, 아! 아버지

“잘난 것 없는 가족사? 기록하면 귀중한 역사”

사소한 일상 아이들 숨소리까지 세월의 무게 더하면 국보급 가족 연대기

  • 표정훈/ 출판평론가 kungree@paran.com

“잘난 것 없는 가족사? 기록하면 귀중한 역사”

“잘난 것 없는 가족사? 기록하면 귀중한 역사”

선생 가족 사진. 앉은 이가 어머니 곽낙원 여사. 왼쪽부터 백범의 장남 인, 백범, 차남 신.

쉽다면 쉽고 어렵다면 어려운 ‘문학 퀴즈’부터 풀어보자. 서울의 이름난 대지주 조(趙)씨 집안 3대가 일제 치하에서 몰락해가는 과정을 그리면서, 당시 청년들의 고뇌와 사회상을 사실적 기법으로 묘사한 염상섭의 장편소설은? 독일 북부 뤼베크 상인 가문 부덴브로크 가(家)의 번영과 몰락의 과정을 통해 19세기 독일 시민사회의 전형적인 연대기를 그려낸 것으로 평가받는 토마스 만의 장편소설은? 1805년에서 시작해 나폴레옹전쟁을 거쳐 제카브리스트 반란 전야에 이르는 20년간의 역사적·사회적 사건들이 펼쳐지는 톨스토이의 작품으로 세 귀족 집안의 생활 기록이 중심을 이루는 장편소설은?

정답은 각각 ‘삼대(三代)’,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 그리고 ‘전쟁과 평화’다. 그렇다면 이미 많은 힌트를 제시해 풀기 쉬운 문제 하나를 더 내보겠다. 이 세 작품의 공통점은? 답은 일종의 가족 연대기라는 것이다. 물론 역사적 사실로서가 아니라 작가의 문학적 상상력이 만들어낸 연대기이지만, 세 작품 모두 배경이 되는 시기의 역사와 사회상을 정확하게 그려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허구일망정 무미건조한 사료(史料)의 미로 찾기가 아니라 피와 살을 지닌 인간의 생생한 육성과 체험을 전해준다는 점에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는 자료’, 즉 사료(思料)가 아닐 수 없다.

“잘난 것 없는 가족사? 기록하면 귀중한 역사”

윤치호가 쓴 1919년 3월1일자 영어일기 일부.

선조시대 11년 기록 ‘미암일기’ 보물 제260호

일기 같은 개인의 사적(私的) 기록물은 또 어떤가. 가족 묘지를 마다하고 화장해서 로즈먼 다리에 유골을 뿌려달라는 유언을 남긴 어머니 프란체스카. 그 유언이 내키지 않은 딸과 아들은 어머니의 유품을 정리하다 일기장 한 권과 잡지 ‘내셔널 지오그래픽’을 발견한다. 일기장에는 어머니의 짧지만 영원히 이어가고픈 사랑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일기를 읽고 난 딸과 아들은 어머니의 뜻에 따라 로즈먼 다리, 즉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에 어머니 프란체스카를 뿌림으로써 그 사랑을 영원하게 만든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메릴 스트립 주연의 영화로 더욱 유명해진 로버트 제임스 월러의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다.

“잘난 것 없는 가족사? 기록하면 귀중한 역사”

‘안동선비’ 류영희가 40여년간 쓴 일기의 일부.

소설이나 영화가 아닌 실제를 예로 든다면, 우리나라의 보물 제260호로 조선 선조 때 학자 미암 유희춘(1513~1577)이 쓴 일기 ‘미암일기(眉巖日記)’가 있다. 선조 즉위년(1567) 10월부터 선조 10년(1577)까지 11년의 세월에 걸쳐 조정의 공무에서부터 자신의 개인사까지 날마다 일어난 일들을 빠짐없이 기록해놓았다. 부록으로 부인 송씨의 시문과 잡록까지 실려 있는 미암일기는 조선시대 개인 일기 가운데 가장 방대할 뿐 아니라 선조실록 편찬의 기본 사료가 되었음은 물론, 조선시대 관료들의 문화·사회·정치·경제·풍속 등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료이기도 하다.



외국의 예로는 너무도 유명한 ‘안네의 일기’ 외에도 영국 해군장관과 왕립협회 회장을 지낸 새뮤얼 핍스(1633~1703)의 일기가 있다. 그가 1660년 1월1일부터 1669년 5월31일까지 기록한 전 9권의 일기는 왕정복고 시기 영국 궁정 및 사회 분위기, 공연 문화, 항해 사정, 사교계 등에 관한 솔직하고 자세한 기록으로 17세기 영국 사회사 연구의 귀중한 사료가 되고 있다. 암호와 속기문으로 작성된 일기는 1825년에 와서야 해독됐다. 이외에도 핍스는 영국 해군 회상록을 남겨서 군사사(軍事史) 연구자들을 고무시켰다.

“잘난 것 없는 가족사? 기록하면 귀중한 역사”

필자의 가족사를 담은 책 ‘나의 천년’

지금까지 얘기한 많은 사례들이 필자로 하여금 잘난 것 없는 가족사를 재구성한 ‘나의 천년’(푸른역사)이라는 책을 집필하게 만든 간접적 계기가 되었고, 필자의 조부가 당신의 일생을 회고한 낡은 노트 한 권과 카세트테이프가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인터넷 홈페이지·사진·영상 등 마음먹으면 가능

일제 강점기 1920년대 중반 중앙고보를 다니다가 마르크스 레닌주의 독서회 사건으로 퇴학당한 뒤 해방정국과 6·25전쟁 시기에 남로당 당원으로 활동하다 전향한 이력의 조부는 당신의 사회주의 혁명운동 활동과 속마음을 사뭇 솔직하게 적어 남겼다. 그 ‘기록의 정신’을 헛되게 하지 말아야 한다는 일종의 사명감, 기록의 사명감 같은 것이 나로 하여금 단행본 분량의 원고를 집필하게 만든 것이다.

집필을 위한 자료조사 과정에서 만난 나의 부친과 조부, 그리고 더 먼 조상들의 삶에는 내가 동의할 수 없는 부분, 수긍하지 못할 부분, 심지어 감추고 싶은 부분도 적지 않았다. 예컨대 우리 집안 족보 기록의 진실성 여부도 의심하게 됐으며, 임진왜란의 급박한 상황에서 자신의 직위를 이용해 사리사욕을 채우려다 들통이 나 벌을 받은 조상이 있는가 하면, 나의 조부는 6·25전쟁의 시작을 남침이 아닌 북침으로 믿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조부가 보여준 기록의 정신과 내가 느낀 기록의 사명감이 ‘기록의 윤리’를 전제로 하지 않으면 무의미하다고 판단했고, 그 판단에 충실하고자 했다.

이렇게 말하고 보니 가족 연대기를 기록으로 남긴다는 게 무척이나 별일인 것 같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가깝게는 인터넷 홈페이지가 있지 않은가? 자신의 생각과 생활의 자취를 남기는 개인 홈페이지, 나아가 가족의 일상과 사진, 영상을 담은 가족 홈페이지는 그것에 세월의 무게가 더해지면 훌륭한 가족 연대기가 될 수 있다.

미암 유희춘이 자신의 일기가 대한민국 보물로 지정될 줄 알았을 리 없고, 핍스는 자신의 일기가 영국사의 중요 사료가 될 줄 알았을 리 만무하다. 오늘 하루의 지극히 개인적인 한 사건을 기록하는 사소한 손길 하나가 내일의 역사로 이어질 줄 누가 알겠는가. 그 사소한 손길은 같은 시기의 사소하거나 사소하지 않은 무수히 많은 사건들과 가깝거나 멀게 연결되어 있게 마련이다. 다시 한 번 퀴즈다. 다음은 어느 해에 일어난 일들일까?

중앙정보부는 위장 간첩 이수근을 체포했다고 발표했고, 박정희 대통령의 뜻대로 3선 개헌안이 통과됐으며, 천주교 서울교구장 김수환 대주교는 추기경이 됐고, 육군사관학교 교관 신영복은 남한산성 육군교도소에 수감됐으며, 우리나라 정기발행 복권의 효시인 주택복권이 처음 발행됐고, 조영남은 ‘딜라일라’로 김추자는 신중현에게서 받은 노래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로 각각 데뷔했으며, 박경리는 ‘토지’를 집필하기 시작했고, 중학교 1학년이던 송승환이 TV 연속극 ‘똘똘이의 모험’에 출연했으며, 제3한강교(한남대교)가 준공되었다. 답은 1969년. 바로 필자가 태어난 해다.

“잘난 것 없는 가족사? 기록하면 귀중한 역사”

영화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

우리들 각자와 가족의 삶의 연대기는 그밖의 무수한 삶과 사건의 연대기와 그물처럼 얽혀 있다. 그런 그물의 매듭을 되짚어나가고 싶다는 충동이 일어난다면 부디 억누르지 말자. 인문(人文)을 글자대로 풀이하면 ‘사람의 무늬’가 된다. 짐승이 아닌 ‘사람의 무늬’, 즉 사람만이 남길 수 있는 고유한 자취 혹은 활동이라면 표현과 기억과 성찰, 요컨대 문(文)·사(史)·철(哲)을 들 수 있다.

개인의 사적 기록이건 가족 연대기이건 기록을 남기는 행위와 그 결과로 남은 기록은 표현이자 기억이자 성찰이라고 할 수 있으니 이야말로 기록하는 본성을 지닌 인간, ‘기록하는 인간(Homo Scriptus)’만이 할 수 있는 가장 인간다운 활동, 바로 인문이 아니겠는가. 그것이 학적(學的)으로 깊어지면 인문학이 된다고 볼 수 있으니 인문과 인문학이란 뜻밖에 우리 모두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게 아니다.

“잘난 것 없는 가족사? 기록하면 귀중한 역사”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부침을 겪는 소시민 일가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효자동 이발사’의 한 장면

잠 못 이루는 밤에 일기 한 줄을 적는 사람, 명절에 집안 어르신이 들려주는 가족 이야기를 녹취하는 사람, 가족들과의 즐거운 한때를 영상매체에 담는 가장, 이런 사람들은 모두 ‘익명의 인문학자’들이다. 우리 모두 안에 들어 있는 ‘익명의 인문학자’들이 마음껏 활동하게 되기를!



주간동아 454호 (p60~62)

표정훈/ 출판평론가 kungree@par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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