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31

2004.04.22

툭하면 범죄 누명, 짓밟히는 진술권

장애인 두 번 죽이는 ‘형사소송법’ … 수사·재판에서 허위자백 유도 ‘인권침해’

  • 이남희 기자 irun@donga.com

    입력2004-04-14 14:5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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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툭하면 범죄 누명, 짓밟히는 진술권

    장애인 이동권 쟁취를 위한 연대회의 회원들이 2002년 8월27일 ‘장애인 이동권 보장’을 요구하는 집회를 하고 있다.

    ”저 사람이 가해자 맞습니까?”(형사)

    “저, 저저사사라아느으으… 하아아아아….”(뇌성마비 여성장애인 한공주)

    “(공주의 말을 통역하듯) 예, 맞습니다.”(공주의 올케)

    뇌성마비 장애인 공주(문소리 분)가 경찰서에서 형사 앞에 앉아 피해자 진술을 하고 있다. 공주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는 형사를 위해 공주의 올케가 옆에 붙어 통역을 한다. 공주는 성폭행 가해자로 몰린 종두(설경구 분)를 구하고 싶지만, 노력할수록 입과 몸이 뒤틀려 말을 할 수가 없다. 올케 조차 공주의 말을 지레짐작해 그녀의 뜻과는 전혀 다른 대답을 하고 만다. 경찰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종두에게 “(저런 장애인한테도) 성욕이 생기대?”라고 묻는다. 사랑하는 사람이 끌려가는 것을 보며 공주는 온몸으로 발작하지만, 아무도 그의 진심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영화 ‘오아시스’에 나오는 이 장면은 사람들의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 어떻게 진실을 왜곡할 수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형사사건 처리과정에서 장애인의 진술권이 보장받지 못하는 현실은 비단 영화 속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거동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장애인들이 억울한 누명을 쓰고, 모욕을 당하는 일은 너무나 빈번하다. 이 때문에 장애인 피의자나 피고인이 수사나 재판 과정에서 자신의 의사를 충분히 전달하고, 비장애인과 차별받지 않을 수 있는 여건이 갖춰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형사사건 처리과정에서 정신지체 장애인에 대한 인권 침해는 특히 심각하다. 이들은 자신의 의사를 제대로 표시하지 못한 채 억압적인 수사 분위기와 경찰의 유도 신문에 말려 범인으로 몰리는 경우가 적지 않다.

    개 쓰다듬다 ‘개 도둑’으로 몰려

    툭하면 범죄 누명, 짓밟히는 진술권

    영화 ‘오아시스’에서 뇌성마비 장애인 한공주가 피해자 자격으로 경찰의 조사를 받고 있다(왼쪽). 공주는 자신의 뜻이 경찰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자, 몸을 벽에 부딪혀 극렬하게 항의하고 있다.

    전남 여수에 살고 있는, 정신지체 3급인 쌍둥이 안모군 형제(19)는 2002년 12월 개 도둑으로 몰려 경찰에 불구속입건 처리됐다. 안군 형제는 당시 밤에 집으로 가던 중 개 농장에 묶여 있던 개가 귀여워 개를 쓰다듬고 있었다. 술에 취해 있던 개주인 서모씨가 이들을 보고 “개 도둑이야”라고 소리 질렀고, 이에 놀라 도망가던 동생은 서씨에게 붙잡힌 뒤 맞아 턱뼈가 부러졌다. 집으로 돌아온 형제를 본 아버지 안씨(정신지체 2급·51)가 뒤늦게 서씨를 고발하려고 파출소에 갔으나 오히려 안군 형제는 절도미수로 긴급체포됐다. 담당 경찰관이 3, 4세 지능의 안군 형제보다 서씨의 진술을 받아들인 것. 더욱이 수사과정에서 경찰이 형을 CCTV가 설치돼 있지 않은 방으로 데리고 들어가 머리를 박게 하고, 욕을 한 것으로 알려져 인권 침해 논란이 빚어졌다. 이 사건은 쌍둥이 안군 형제를 보살펴온 이웃의 조용구 목사(51)가 적극적으로 문제를 제기해 바깥에 알려졌다.

    “일반인도 경찰서만 가면 가슴이 뛰는데 이 아이들은 오죽했겠어요? 얘들은 앞뒤를 재서 거짓말을 할 줄도 모릅니다. 분명 개를 훔칠 만한 아이들도 아니고요. 과거에도 이 아이들이 파출소에서 벌을 받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경찰들은 아이들의 기본권리조차 지켜주지 않은 거죠. 그런데 제가 이 아이들을 지켜주는 데도 한계가 있었어요. 재판과정에서 보호자인 저의 진술이 전혀 인정되지 않았거든요.”

    조목사는 있으나 마나 한 보조인 제도에 대해 불만을 토로했다. 현행 형사소송법은 ‘법정대리인, 배우자, 직계친족, 형제자매와 호주’만을 보조인으로 인정하고 있다. 따라서 일가족 모두 정신지체를 갖고 있는 안군 형제 가족에게 현행법의 보조인 제도는 무용지물이다. 조목사는 “아이들에게 절도미수 기록이 남아 있는 게 가슴 아프다”며 끝까지 싸울 뜻을 밝혔다.

    국가인권위원회(이하 인권위)는 2003년 9월 1년 전 전북 전주시 금암2파출소에서 일어난 경찰관 피살사건 수사과정에서 경찰이 정신지체 장애인인 피의자에게서 자백을 얻기 위해 가혹행위를 했다는 판단을 내렸다. 경찰이 절도혐의로 체포된 피의자 조모씨(22)를 위협해 “동료들과 경찰관을 살해하고, 경찰관이 소지하던 권총 1정을 훔쳤다”고 허위자백을 하도록 만들었다는 것. 문제는 최초로 살인 혐의를 자백한 조씨가 성적발달장애 및 경도(輕度)정신발육지체(IQ 54) 등으로 군 면제 판정을 받은 사람이란 점이다. 인권위는 형사들이 조씨의 장애를 알면서도 묵인한 채 적절한 휴식과 수면시간을 제공하지 않고 밤샘 집중조사를 실시했다고 밝혔다.

    툭하면 범죄 누명, 짓밟히는 진술권

    김주현 한국뇌성마비장애인연합 정책기획부장.

    뿐만 아니라 경찰이 조씨에게 “자백을 하지 않으면 전기고문을 하겠다. 묻어버리겠다”고 협박한 증거와 “살인죄를 뒤집어쓸래, 아니면 총기절도죄만 뒤집어쓸래”라며 자백을 유도한 정황도 찾아냈다. 이 사건을 담당한 인권위의 정상영 조사관은 “합리적 판단 능력이 부족한 조씨가 보호자의 입회 없이 조사받는 과정에서 허위자백으로 위기를 모면하려고 했던 것 같다”고 설명했다. 현재 전북지방검찰청은 이 사건을 새롭게 수사하고 있다.

    “처음부터 외부 도움 받을 수 있어야”

    천주교인권위원회 김형태 변호사는 “장애인이 겪는 가장 큰 위험은 수사와 재판에서 객체로 취급받으며, 허위자백을 하도록 유도되는 데 있다”며 “장애인의 허위자백을 토대로 다른 증거들이 억지로 꿰맞춰지는 것을 막으려면 초동 진술단계에서부터 외부의 도움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런 의미에서 형사소송법에 장애인 피의자 신문시 변호인 참여권을 확실하게 명문으로 보장해야 한다는 게 김변호사의 제안이다.

    뇌성마비 장애인의 경우에는 정신지체 장애인과 또 다른 차원의 배려가 있어야 한다. 판단능력을 갖춘 뇌성마비 장애인이 의사 전달력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의사 표현의 기회조차 박탈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뇌성마비장애인연합의 김주현 정책기획부장(29)은 경찰 수사 과정에서 느꼈던 자신의 경험담을 힘겹게 털어놨다. 김부장은 뇌병변·언어장애 2급으로 전신에 경증 경직증 장애와 심한 언어장애를 갖고 있다. 그러나 메신저를 통한 필답 대화에서는 자신의 의사를 ‘완벽히’ 표현할 수 있다.

    “3월 말 최옥란 열사 2주기 추모집회에 참석했다가 경찰에 연행됐어요. 경찰들은 의사 표현에 어려움을 겪는 저를 보고 ‘말 못하는 사람’이라 단정했어요. ‘보조인을 둘 수 있다’고 알려준 형사는 하나도 없었고요. 뒤늦게 도착한 변호인을 통해 묵비권을 행사하겠다고 말했으나 조사는 새벽까지 계속됐습니다. 과거엔 더했어요. 2001년 장애인 이동권 확보를 위한 집회를 취재하던 중 제가 불법적으로 경찰에 연행됐습니다. 조사 경찰은 제 언어장애를 이유로 대화가 통하지 않을 거라 미리 판단해 이전 사람들이 진술한 내용대로 질문과 답을 써 내려갔어요. 당시 경찰의 타깃이었던 한 활동가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기 위해 허위조서를 작성하는 것 같았습니다.”

    툭하면 범죄 누명, 짓밟히는 진술권

    장애인 인권확보 공동행동은 3월22일 오후 2시 국가인권위원회 배움터에서 ‘형사절차상 장애인 인권 침해 사례와 형소법 개정 방향’을 주제로 공청회를 열었다.

    그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경찰 조사과정에서 ‘의사소통의 보조’가 원활하게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진정한 의사소통이 이뤄지기 위해서 장애인의 장애 특성을 이해하고, 참을성과 관심으로 지켜봐주는 태도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 아울러 개인의 언어장애 패턴에 따라 노트북 컴퓨터 등의 의사소통 보조기기를 제공하는 것도 의사소통을 돕는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시각장애인의 경우 증거 능력이 아예 인정되지 않거나 자신의 진술서조차 확인할 수 없는 상황이다. 시각장애1급 여성인 정모씨(26)는 지난해 8월 80대 노인한테서 엉덩이를 맞는 등 성추행을 당해 경찰에 신고했으나 이를 묵살당했다. 경찰은 정씨가 이전에 이미 두 차례의 성희롱 신고 경력이 있다는 이유로, 신고를 무시하고 임의로 수사를 종결했던 것. 특히 이 과정에서 담당 경찰이 정씨에게 “보이지도 않는데 어떻게 아느냐. 저 할아버지가 아가씨 엉덩이를 만졌겠느냐”며 장애를 비하하는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정씨는 이 사건을 인권위에 진정했고 그 결과 서울 S경찰서의 담당 경찰관은 인권위로부터 ‘장애인권교육’이 필요하다는 권고조치를 받았다.

    1급 시각장애인 임모씨(52)는 2001년 2월, 동업자와의 다툼으로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았다. 그는 자신의 진술 내용이 어떻게 기록되는지 확인하기 위해 직원이 동석할 것을 원했으나 이를 거부당했고, 결국 경찰의 손에 끌려 진술서에 도장을 찍었다. 임씨는 시각장애인의 경우 진술서를 확인할 수 없고, 자신의 도장을 어떻게 찍는지조차 알 수 없는 상황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으나 경찰은 이를 무시했다. 이 사례를 상담했던 장애우 권익문제연구소의 박숙경 인권팀장은 “시각장애인이 자신의 진술서나 재판문을 확인할 수 있는 시스템으로의 전환이 시급하다”며 “시각장애인의 경우 자신이 처한 상황이나 재판정의 분위기를 알려주는 등 다양한 차원의 배려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청각장애인은 변호인이나 통역인을 필수로 하는 대상이다. 그러나 변호인이 얼마나 이들의 심정을 잘 대변하고 있는가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도 있다. 법정에서 청각장애인을 위한 수화통역을 맡아온 수원 중앙교회 백종하 목사(44)는 장애인에 대한 이해와 의식이 부족한 변호사들에 대해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한번은 농아인이 면허증이 없는 상태에서 차 운전을 하다가 경찰에 적발됐어요. 이 사람이 당황해서 도망을 가다가 도주 혐의로 구속이 됐죠. 그런데 그의 처지를 호소해주기 위해 선임된 국선변호사가 이 사람을 만나보지도 않고, 자신이 가진 자료를 바탕으로 소설을 쓰고 있지 뭡니까. 1000만원씩 받는 사선 변호사도 다를 바 없습니다. 장애인과의 의사소통을 포기하고, 아예 현장에 나가보지도 않더라고요. 청각장애인을 위해 수화통역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활용할 생각조차 않으니 이런 변호사가 청각장애인의 처지를 어떻게 대변할 수 있겠습니까.”

    보조인 제도 의무화 개정안 요구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장애우 권익문제연구소 등 7개 장애인 관련단체로 구성된 ‘장애인 인권확보 공동행동’(이하 공동행동)은 최근 형사소송법 개정안을 마련하고 있다. 이들은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형사 절차상 보조인의 범위를 ‘신뢰관계에 있는 자’까지 확대하고, 정신지체 장애인 등 진술능력이 취약한 장애인에 대해 보조인 제도의 고지를 의무화할 것을 제안했다. 아울러 통역이 필요한 장애인의 범위를 확대하고, 점역(點譯)서비스나 음성지원을 의무적으로 제공하는 내용을 개정안에 포함시킬 계획이다. 법무부는 “우리나라의 형사법 제도를 국제 인권기준에 부합하게 정비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그리고 공동행동의 개정안을 적극 반영할 태세다. 다만 법무부의 이흥락 검사는 “장애인 범위의 규정은 더욱 세심하게 검토돼야 한다”며 공동행동이 제시한 법안에 대해 이론적 보완을 요구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수사기관의 장애인에 대한 이해도가 턱없이 낮다는 점이다.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박숙경 인권팀장은 장애인 인권에 무지한 수사기관에 쓴웃음을 지었다.

    “법무부와 검찰청, 경찰청이 ‘인권보호’를 기치로 내걸고 있지만, 인구의 10% 이상을 차지하는 장애인 문제를 전담하는 직원은 하나도 없어요. 정신지체, 뇌성마비, 청각장애, 시각장애 등 다양한 장애를 가진 장애인들을 각각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조차 모릅니다. 장애인 인권교육 실시를 위해 모 경찰청을 방문했더니 장애인주차장에 경찰간부 차가 버젓이 세워져 있더군요. 이것이 바로 장애인 인권 침해의 현주소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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