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30

2004.04.15

오페라 나비부인 vs 명성황후 두 나라 과학역사와 그 힘?

  • 박성래 한국외국어대 과학사 교수/ parkstar@unitel.co.kr

    입력2004-04-08 13:5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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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푸치니의 오페라 ‘나비부인(Madame Butterfly)’이 얼마 전 재개관한 세종문화회관 무대에 올랐다. 이탈리아 밀라노의 스칼라극장에서 처음 상연된 뒤 꼭 100년 만의 기념공연인 셈이다. 각종 매체에 소개된 다양한 기사를 보면서 필자는 좀 엉뚱하지만 한국과 일본의 과학 역사와 그 힘의 크기를 비교하게 됐다.

    1세기 전 이탈리아에서 초연된 이 작품은 푸치니의 3대 오페라(라보엠, 토스카, 나비부인)의 하나로 수많은 서양 오페라 가운데 대표작으로 꼽힌다. 작곡가 푸치니가 이 작품을 구상하게 된 것은 1900년 런던 여행에서 연극 ‘나비부인’을 보고 나서였다. 이 원작소설의 작가는 롱(John Luther Long, 1861~1927)이란 미국 아마추어 소설가였다. 그는 일본으로 건너갔던 선교사 부인인 자신의 누이 이야기를 토대로 이 소설을 구상했다고 한다(하지만 나가사키(長崎)를 소개한 일본 책에는 롱이 1897년 일본에 직접 와서 글로버공원을 방문하고 이 소설을 구상했다고 쓰여 있다).

    여하튼 ‘나비부인’의 무대는 바로 나가사키 항구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의 저택이며, 그 집이 바로 롱의 숙소였던 지금의 글로버공원이다. 일본에서 이 공원은 ‘구라바엔(園)’으로 불리며, 나가사키가 자랑하는 ‘나비부인’의 고향으로 세계적 관광지로 부각됐다.

    ‘글로버’란 이름은 이 터가 일본에서 크게 성공한 영국 무역상 토마스 글로버(1838~1911)의 옛집이었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영국 청년 글로버는 1859년 21살의 나이에 일본에서 무역상회에 취직했다가 차츰 성공하여 무역상으로 독립한 뒤 엄청난 부자가 됐다. 그 부를 바탕으로 메이지유신(明治維新) 5년 전인 63년에는 청년지도층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등에게 학비를 지원해 영국에 유학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사업은 80년대에 내리막에 들어섰고 결국 실패한 사업가로 일본에 뼈를 묻었다.

    소설가 롱이 구상한 나비부인의 줄거리는 잘 알려진 대로다. 일본 게이샤 출신의 나비부인이 그녀의 남편인 미국 해군장교 핑커튼을 기다리며 자신의 아들과 함께 이곳 ‘구라바엔’에 살다가, 결국 본처를 데리고 등장한 핑커튼 앞에서 단도로 일본식 자결을 한다는 내용이다.



    지난 한 세기 동안 이 오페라는 세계에서 일본의 위상을 높이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바로 나비부인의 배경이 된 19세기 말의 일본은 이미 과학 분야에서도 서양을 따라잡기 시작했다. 실제로 이 항구도시 나가사키에는 오래 전부터 네덜란드(和蘭)와의 무역을 위해 상관이 설치되어 있었고, 1823년 일본에 온 독일 의사 시볼트는 이곳에 근무하면서 일본 청년들을 모아 의학과 생물학을 가르쳤다. 메이지유신 반세기 전에는 이미 서양과학의 상당 부분이 일본인에게 전해졌는데, 그 대개가 바로 화란 학문인 난학(蘭學ㆍ랑가쿠) 덕분이다. 지금 이 도시 외곽에서 성업 중인 관광용 ‘작은 화란(하우스템보스ㆍハウステンボス)’ 역시 이런 연고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미 100년 전에 일본을 배경으로 한 오페라 ‘나비부인’이 탄생했지만, 시대도 비슷하면서도 더 극적일 법한 ‘명성황후’란 서양오페라는 탄생하지 못했다. 당시 두 나라 과학 수준의 차이가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푸치니의 오페라는 문화의 힘이란 어쩔 수 없이 과학의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을 증명해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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