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23

2004.02.26

민심의 승리인가 또 다른 갈등인가

부안 주민투표 “원전센터 반대” 92% … 위도선 찬성측 투표장 점거 투표 무산

  • 정현상 기자 doppelg@donga.com

    입력2004-02-19 15: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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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심의 승리인가 또 다른 갈등인가

    2월14일 투표를 위해 투표장에 나온 부안군 할머니들.

    전북 부안 주민 대다수는 원전센터 없는 미래를 선택했다.

    2월14일 원전센터 유치 찬반 의견을 묻는 주민투표에 전체 투표권자 5만2108명 가운데 3만7540명(72.04%)이 참가해 3만4472명(91.83%)이 반대의사를 나타냈다. 투표율은 2002년 대통령선거 때의 투표율(73.4%)과 비슷했다. 이번 주민투표가 법적 효력은 없지만 압도적인 다수가 원전유치에 반대표를 던짐으로써 정부는 상당한 정치적 부담감을 안게 됐다.

    지난해 7월14일 부안군이 정부에 유치 신청을 한 뒤 7개월간 38명이 구속되었고 400여명이 부상했으며, 주민들은 일손을 놓은 채 시위 현장으로 내달렸다. 또 지역경제는 피폐화의 길을 걸었고, 주민간 갈등의 골은 깊어만 갔다.

    봄이 더디 오듯 투표일 투표 진행상황은 순조롭지 않았다. 이날 새벽 5시40분께 위도발전협의회 정영복 회장 등 위도 주민 50여명이 투표소인 진리 마을회관에 도착해 투표인 명부와 투표함 등을 기습 점거했다. 정회장은 “공권력이 투입되면 할복하겠다”며 “법적 효력이 없는 투표는 찬반 주민간 갈등의 골만 깊어지므로 양측이 충분히 토론한 뒤 주민투표법이 발효되는 7월 이후 투표를 실시하자”고 주장했다.

    모든 과정 주민 참여 축제 분위기



    이 소식이 전해지자 부안 주민투표관리위원회(위원장 박원순·이하 관리위) 사무실에는 일순간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동안 12회의 읍면 토론회, 2회의 군 토론회를 거치며 객관적인 투표관리에 만전을 기해왔던 관리위의 노력이 물거품이 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덮쳐왔다. 그러나 폭풍주의보가 발효돼 배도 뜰 수 없는 상황이어서 관리위에서 추가 인력을 파견할 수도 없었다. 더욱이 관리위는 찬반 양측의 물리적 충돌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사태 추이를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위도와 달리 육지에서는 투표가 대체로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부지런한 장사꾼들이 새벽부터 투표소를 찾았다. 식당 주인 심모씨는 “밥이 생기는 것도 아닌데 누가 이 추운데 오겠나 싶었는데 이렇게 새벽부터 투표하러 나온 이들이 많아 놀랐다”고 말했다.

    오전 8시 5127명이 투표해 10.29%의 투표율을 보였는데 이는 2002년 대선 당시 오전 9시의 투표율과 비슷했다. 거동이 불편해 휠체어를 타고 나온 김모씨는 투표소를 나서며 “한 표라도 소중헌께 왔제”라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방학 중이라 읍내에 머물고 있는 대학생 김모씨(23)는 “주민 동의 없이 소수가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행정이 부당하다고 생각해 반대표를 던지러 나왔다”고 말했다.

    부안 지역 개인택시 기사 128명은 이날 하루 동안 투표소까지 무료 운행을 약속하고 부지런히 주민들을 실어 날랐다. 병원에서 꽂고 있던 링거를 떼어내고 투표의사를 밝힌 최모씨를 데리고 제1투표소가 있던 동초등학교로 안내했던 택시기사 송서곤씨(53)는 “대한민국 어디든 핵폐기장을 건설해선 안 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정오께 눈발이 휘날리고 바람이 더욱 거세졌다. 오후 들어 날씨 탓인지 투표율이 떨어졌다. 오후 3시 66.1%의 투표율을 보였다. 이때까지도 위도 주민들은 투표에 참가하지 못했다.

    이런 가운데 전북도 공무원 100여명이 줄포면 등에서 주민들을 상대로 투표 불참을 호소하고 다니는 게 목격되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공무원 이모씨는 반대측 주민들에게서 얼굴 등을 맞아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주민투표가 강행되자 범부안국책사업유치추진연맹(위원장 김명석·이하 국추련)은 논평을 통해 “온갖 공갈 협박과 사상 유례없는 조작이 난무한 주민투표는 반핵환경단체가 자체 성적표를 받으려는 작태에 불과하다”고 그 의미를 축소했다.

    그럼에도 이번 선거는 여러 가지 가능성을 보여준 사건으로 기록될 듯하다. 우선 관이 주도한 일이 아니라 주민이 선거관리에서부터 투표까지 직접 참여해 축제 분위기를 만들었다. 그 과정에서 주민들은 자신감과 자부심을 되찾기도 했다. 원전센터 유치에 대한 주민투표를 실시한 적이 있는 일본 니카타현 마키초의 경우 일주일간 투표해 41%의 투표율을 보였던 것에 비하면 단 하루 만에 70%가 넘는 투표율을 기록한 것도 의미 있는 일로 여겨진다.

    민심의 승리인가 또 다른 갈등인가

    몸이 불편한 이들을 투표소로 안내하기 위해 부안 지역 개인택시 기사 128명이 자원봉사자로 나섰다(위쪽). 원전센터 유치에 찬성하는 국추련측은 이날 투표참여 자제를 호소했다.

    또 외지의 자원봉사자 700여명이 선거관리 등에 직접 참가했다는 사실도 특기할 만하다. 종교·시민·사회 단체 구성원들뿐 아니라 개인 자격으로 참여한 이도 많았다. 서울에서 온 자원봉사자 김모씨(42)는 “이렇게 주민이 스스로 자신의 미래를 가꿔나간다는 것은 대단히 소중한 일”이라며 “부안은 다른 어떤 지역보다 발전할 가능성이 많은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민주화를 위한 변호사모임 소속 변호사 40여명이 투표관리를 위해 참가한 것도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투표에 참여한 주민들은 변호사들의 참여를 계기로 이번 투표가 객관성을 확보하게 됐다고 여겼다. 관리위 사무처장 역을 맡았던 하승수 변호사는 “이번 투표를 계기로 그간의 갈등을 털어내고, 황폐화된 지역 경제를 살릴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박원순 관리위 위원장은 개표결과를 발표하는 자리에서 “위도면의 투표가 무산된 일은 유감이지만 높은 투표율을 보인 것은 부안 주민의 성숙한 주민의식과 평화에 대한 열정이 만든 결과”라고 말했다.

    투표 이후 부안은 어떻게 될 것인가? 이번 선거를 승리로 이끈 ‘핵폐기장 백지화 범부안군민대책위원회’(대책위)는 2월15일 오후 부안 수협 앞 광장에서 집회를 열어 ‘반핵·생명·평화를 위해 핵폐기장 백지화와 부안 자치공동체를 선언한다’는 내용의 선언문을 채택했다.

    대책위 김진원 조직위원장은 “앞으로 부안 발전을 위한 장·단기 계획을 세우고 실천해나가겠다”며 “우선 그동안 실추됐던 부안의 이미지를 제고하는 데 주력하고 생태환경을 기반으로 한 관광산업을 육성하는 데 앞장설 것”이라고 말했다. 대책위는 또 군수 소환운동, 구속자 석방운동을 펴는 한편 정부를 상대로 잘못된 행정을 묻는 손해배상청구소송도 고려 중이다. 관리위도 주민투표로 밝혀진 주민들의 의사를 정부에 전달하고 정부가 이를 받아들일 때까지 기구를 계속 유지할 방침이다.

    그러나 찬성측인 국추련은 2월15일 부안군청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이번 주민투표는 법적 효력이 없는 사적인 여론조사에 불과하다”며 “그 결과는 전혀 고려대상이 아니며 정부도 결과를 인정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추련은 또 “주민투표 결과와 무관하게 앞으로 주민들과 대화를 계속하고 설득할 것이다”고 말했다.

    김종규 부안군수는 투표 전날 “주민투표법이 발효되는 7월30일 이후 합법적인 주민투표를 실시하겠다”고 주장했다. 산업자원부도 “부안 주민투표 결과를 인정할 수 없다”며 “2월4일 공고한 대로 5월 말까지 부안군을 포함해 유치를 희망하는 지방자치단체의 신청을 받을 것이다”고 밝혔다.

    이처럼 갈등의 골은 여전하다. 또한 원전센터 유치 문제가 해결된다고 해서 그동안 쌓였던 부안 내부의 문제가 절로 풀리는 것도 아니다. 하승수 변호사는 “주민투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토론회를 거쳤듯 앞으로 주민간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찬반 양측이 서로 머리를 맞대고 발전적 방향을 모색해야 하고, 지역 경제를 되살리기 위한 방법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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