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89

2003.06.19

한국戰 화교 첩보대원을 아십니까

  • 정호재 기자 demian@donga.com

    입력2003-06-12 14:4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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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戰 화교 첩보대원을 아십니까
    ”싸우다 죽을 각오로 전쟁에 참가했지. 월급도 못 받고 죽어라 싸웠지만 돌아온 것은 ‘화교’에 대한 차별뿐이었어….”

    지건반씨(75·가운데)는 이름으로 쉽게 알 수 있듯이 화교다. 1927년 중국 산둥성에서 태어난 그는 일본에서 중·고교를 마친 후 47년 인천의 한 무역회사에 일자리를 얻으면서 한국과 연을 맺었다. 국내에 정착한 2세대 화교인 그에게는 남다른 이력이 하나 더 있다. 51년 초부터 53년 종전 때까지 HID(육군첩보부대) 산하 4863부대 소속으로 한국전쟁에 참가한 경험이 바로 그것. 군번도 계급장도 없이 1중대 1소대의 70명의 화교들과 함께 대북 관련 첩보활동을 벌였다.

    “계급 없는, 이른바 군무원인데 하는 일은 장교 이상이었지. 때론 수류탄과 300근이 넘는 총탄을 메고 북한에 10여 차례나 다녀왔다니까. 50년 11월 중공군이 인해전술을 펼치며 몰려오자 우리 화교의 힘이 필요했던 거야.”

    화교들은 전쟁 후반 첩보활동이 강화되면서 중공군과 북한군으로 적절하게 변장해 중공군의 상황을 파악하고 적진을 교란하는 등의 임무를 훌륭히 수행했다. 적진에 들어가면 10명 중 3명만 살아 돌아올 정도로 위험했지만 이들의 활동 덕에 전쟁 막판 서부전선과 철의 삼각지역 전투에서 중공군의 거센 공격을 물리칠 수 있었다.

    서울 종로구 사직동에 자리잡았던 4863부대는 이른바 SC지대, 즉 서울(S)-차이니즈(C) 부대를 운영했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가 불투명해지자 한국정부는 대만의 장제스 총통에게 요청, 왕세유 류국화라는 중국 사관학교 출신의 베테랑 군인까지 지원받았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자 이 부대는 즉각 해산되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70명 중에 전쟁이 끝나자 20여명, 지금은 겨우 5명만 살아남았어. 군번이 없다는 이유로 훈장은커녕 변변한 혜택 하나 받은 것 없었어.”

    6월5일 오전 제48회 현충일을 하루 앞두고 지씨는 참전 동지들과 함께 국립묘지를 찾았다. 이날 행사에는 대만대표부 외교관들과 국내 화교총회 간부들까지 참석해 화교 출신 한국전쟁 전사자 묘역을 참배했다. 지씨는 이날 1973년 박정희 대통령에게서 받은 표창장을 소중하게 펼쳐 보였다.

    “왜 중국으로 가지 않았냐고? 허허, 내 피로 지킨 이 땅이 바로 내 고향이고 나도 한국사람과 다를 바 없어. 국적이 뭐 그리 중요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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