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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여름 거리 ‘하렘 팬츠’가 주인공

여성성 강조한 아라비아풍 ‘지니패션’ 유행 … 섹시하고 이국적인 멋에 매료

  • 전원경 기자 winnie@donga.com

올 여름 거리 ‘하렘 팬츠’가 주인공

올 여름 거리 ‘하렘 팬츠’가 주인공

서울컬렉션위크, 안나 수이 등 국내외를 막론하고 올해 열린 디자이너들의 패션쇼에는 일제히 아라비아풍의 장식과 하렘 팬츠 등이 등장했다.

6월 첫째 주 서울 도심 L백화점의 패션 매장. 진열장들을 조금만 둘러봐도 올 여름의 패션 경향을 금세 느낄 수 있다. 적지 않은 마네킹들이 하늘거리는 시스루(See-Through) 블라우스에 그물처럼 성글게 짠 조끼를 겹쳐 입고 남자 한복 바지처럼 바짓단을 조인 하렘(Harem) 팬츠를 입었다. 블라우스의 소매와 허리 부분도 레이스 장식이 달려 있거나 바짓단처럼 고무줄로 조여 장식한 경우가 많다. 동화 ‘아라비안 나이트’나 ‘신밧드의 모험’에서 막 빠져나온 듯한 모습, 바로 올 여름 유행하는 아라비아풍 패션이다.

여기에 지난해 월드컵 이후로는 일부 멋쟁이들이나 애용하던 두건을 머리에 쓰는 여성들도 많아졌다. 실제로 거리에 나가 보면 오글오글하게 주름 잡힌 천으로 만든 블라우스에 광택 나는 하렘 팬츠나 하늘거리는 스커트를 입고 머리에 두건을 쓴 여성들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이라크전쟁 전후로 아랍권의 생활상이 언론에 많이 보도된 탓일까. 이 같은 아라비아풍 패션이 어느새 낯설지 않게 느껴진다.

여성복 브랜드 ‘사틴’의 나지현 디자인팀장은 “올 여름에는 섹시하고 어른스러우면서도 여성적인 느낌이 강한 아라비아풍이 유행할 것 같다”고 전망했다. 이 유행의 중심에 있는 의상은 단연 ‘하렘 팬츠’. 흘러내리는 듯한 새틴 소재에 바지 밑단을 끈으로 조여 발목이 드러나게 디자인한 팬츠다. 어찌 보면 몇 년 전까지 촌스러움의 대명사였던 ‘몸뻬’와도 비슷하다. 캐주얼의 활동성을 갖추었으면서도 몸매가 그대로 드러나 섹시해 보인다는 것이 하렘 팬츠의 특징.

화려하고 치렁치렁한 펜던트

올 여름 거리 ‘하렘 팬츠’가 주인공

두건을 고르는 여성들. 긴 두건은 펜던트 목걸이, 링귀고리, 가죽 벨트 등과 함께 아라비아풍 패션을 완성하는 소품이다.

여기에 화려한 무늬의 민소매 블라우스나 끈 달린 톱을 받쳐 입고 대담한 금속 장식이나 석류석, 아쿠아마린, 페리도트 등 유색 보석이 달린 목걸이를 걸면 올 여름 유행 패션이 완성된다. 큰 펜던트 목걸이나 링귀고리, 링팔찌, 치렁치렁한 가죽 벨트 역시 아라비아풍의 유행을 타고 사랑받는 아이템들.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이라크전의 여파는 이처럼 올 봄과 여름의 패션 동향에서도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밀리터리 룩이 봄의 패션계를 휩쓴 데에 이어 여름에는 아라비아풍까지 유행하고 있는 것. 나지현 팀장은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올해의 유행 트렌드는 밀리터리 룩과 여성적이고 로맨틱한 스타일 두 가지다. 그런데 이 두 가지가 모두 전쟁에 무관하지 않다. 즉 어느새 전쟁과 익숙해져 있다는 증거다. 밀리터리 룩이 유행한 다음 전쟁에 염증을 느낀 나머지 현실을 도피하기 위해 여성성을 극도로 강조한 패션이 그 뒤를 이은 것이다”라고 진단한다.

올 여름 거리 ‘하렘 팬츠’가 주인공

사라 브라이트만의 새 음반‘하렘’의 뮤직비디오 장면. 브라이트만은 모로코에서 새 음반의 뮤직 비디오를 촬영했다.

삼성패션연구소가 최근 낸 ‘전쟁과 패션’이라는 보고서 역시 이라크전 이후로 밀리터리 룩과 중동의 에스닉풍이 유행을 주도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역사적으로도 전쟁은 ‘패션 리더’ 역할을 해왔다. 1·2차 세계대전은 드레스 대신 군복을 본뜬 테일러드 수트를 보급시켰고, 60년대의 베트남전은 히피 스타일과 청바지를 유행시켰다. 70년대에는 중동전쟁으로 인해 아라비아 민속의상처럼 여러 가지 옷을 겹쳐 입는 레이어드 룩이 유행했다. 이후 91년의 걸프전은 사막의 모래 색깔과 흘러내리는 듯한 아라비아 민속의상 실루엣을 적극적으로 도입한 디자이너 조르지오 아르마니를 톱 디자이너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2003년 춘하 컬렉션에서 크리스티앙 디오르, 알렉산드로 델라쿠아 등이 군복의 카키색을 응용한 패션을 대거 내놓음으로써 다시 한번 전쟁과 패션의 상관관계를 증명했다.

삼성패션연구소의 서정미 수석연구원은 2, 3년 전부터 에스닉 무드에 탐닉해 있던 세계적 패션 동향도 올 여름의 아라비아풍 유행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말한다. “새 세기를 맞아 밝고 긍정적인 분위기의 패션, 특히 여성성을 강조하는 로맨틱한 블라우스가 유행 아이템의 대표로 떠올랐다. 여기에 이라크전의 영향으로 에스닉한 분위기의 디테일들이 첨가된 것이다. 블라우스의 소매 끝이나 허리 부분을 레이스, 프릴 등으로 장식하는 것이 한 예다. 이처럼 현대의 패션은 각 나라의 전통의상과 정치적 사건 등을 접목시켜 점차 다국적, 다문화적으로 변화하고 있다.” 서연구원의 진단이다.

카메라 플래시가 연신 터지고 늘씬한 모델들이 걸친 액세서리가 조명 불빛에 빛나는 패션쇼 현장은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와는 가장 먼 거리에 있을 법하다. 그러나 전문가들의 진단대로 디자인은 사회적 이슈에 점점 더 예민해지고 있다. 피 흘린 전쟁의 대가로 올 여름 전 세계에 ‘지니 패션’이 유행한다는 사실은 ‘세계화’를 아이로니컬하게 증명하는 듯싶다.





주간동아 389호 (p70~71)

전원경 기자 winni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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