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76

2003.03.20

“존대말은 귀찮아 … 우리는 반말족”

선후배·사제지간에도 존대말 파괴 확산 … 서열문화 청산 순기능 속 전통 파괴 우려도

  • 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입력2003-03-13 15:5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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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대말은 귀찮아 … 우리는 반말족”
    “나뭇잎, 뭐 해? 같이 놀자.” “그래, 흰구름. 이리로 와.”

    친구들끼리 별명을 부르며 나누는 대화 같다. 하지만 이 두 사람은 스승과 제자 사이. 나뭇잎은 29살, 흰구름은 5살로 24살이나 차이가 난다. 협동조합형 어린이집 ‘공동육아’의 수업 장면이다.

    ‘공동육아’에서는 교사와 학생 사이의 반말 대화가 일상적으로 이루어진다. 40살 이상 차이가 나는 이들끼리도 서로 별명을 부르고 거리낌없이 반말로 이야기를 나눈다. ‘제자는 스승 그림자도 밟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는 낯설 뿐 아니라 버릇없게까지 느껴질 만한 풍경이다.

    그러나 ‘교사와 학생이 상하관계 없는 평등한 인간으로 만나는 것’이 진정한 교육이라고 생각하는 공동육아에서 ‘존대말 파괴’는 제대로 된 교육의 출발점이다.

    공동육아에서뿐만이 아니다. 가정, 학교, 사회에서도 존대말 파괴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한 살이라도 나이가 많으면, 한 직급이라도 높으면 당연히 써야 했던 존대말은 어느새 거추장스럽고 공식적인 관계에서만 사용하는 어법이 되어가고 있는 추세다.



    ‘안티학번제 운동’ 활발히 전개

    이 배경에는 ‘예의바른 사람’보다는 ‘개성 있는 사람’을 존중하고, ‘권위’보다는 ‘평등’을 강조하는 사회 분위기가 깔려 있다.

    사실 가족 언어에서 반말이 존대말을 누르고 대세가 된 것은 꽤 오래 전 일이다. 젊은 부모들은 대부분 자녀들과 반말로 대화를 나누고 부부 사이에도 존대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문화단체 ‘또 하나의 문화’에서 발간한 ‘새로 쓰는 결혼 이야기’에서 한 30대 여성은 “시어머니는 남편에게 존대말 쓰기를 요구했지만 이는 나에게 굴욕적인 것으로 느껴졌다. 나는 어머니에게 ‘저는 절대로 존대말 안 하겠어요’라고 말했다”라고 적고 있다. 평등한 부부관계를 상징하는 도구로 ‘남편과 반말로 대화를 나눈다’는 사실을 내세운 것이다.

    대학 사회에서는 평등한 선후배 관계를 위한 ‘반말 쓰기’ 운동이 벌어져왔다. 연세대 총여학생회장 김한선혜씨는 “대학 내 여성운동가 그룹에서는 90년대 후반부터 나이에 관계없이 모두 반말을 해왔다”며 “선후배를 구별하지 않고 평등하게 대화하는 것이 참된 동료관계의 시작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학번이 높은 이에게 무조건 존대말을 쓰도록 하는 문화는 불필요한 권력관계와 위계질서를 만드는 ‘구악’이라는 것이다. 김한씨는 “진정한 선배의 권위는 후배에게 존대말을 쓰게 하는 데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삶의 모습에서 자연스레 배어 나오는 것”이라며 “서로 반말을 하면서부터 선후배 사이의 토론과 의사소통이 자유로워졌고, 인간관계도 더 돈독해졌다”고 말했다. 존대말은 어색한 사이, 공적인 관계에서 예외적으로 사용하기에 적합한 말일 뿐이라는 것이 김한씨의 생각이다.

    이 같은 ‘반말 문화’는 대학 내에서 일반 학생들에게도 퍼져가고 있다. 학번을 통한 선후배 간 서열 문화에 반대하며 자유로운 관계를 주장하는 ‘안티학번제 운동’도 그중 하나다.

    최근 몇 년 새 재수, 삼수생이 크게 늘어나면서 대학 사회는 ‘학번에 따른 어법’과 ‘나이에 따른 어법’ 사이에서 끝없는 갈등을 겪어왔다. 삼수 끝에 경희대에 입학한 임모씨의 경우가 대표적 사례. “신입생 환영회 자리에서 선배들이 ‘현역이냐’고 물어 삼수생이라고 대답하자 분위기가 이상해졌다. 어떤 선배는 ‘야, 임마. 내가 너보다 어려도 선배는 선배인 거야’ 하면서 가만히 있는 나를 ‘찍어 누르려’ 했고 또 다른 선배는 ‘나보다 나이가 많네… 요…’ 하면서 대화를 피했다. 그 사이에서 나는 존대말을 써야 할지 반말을 써야 할지 고민하다 일찍 자리를 뜨고 말았다”고 털어놓았다.

    “존대말은 귀찮아 … 우리는 반말족”

    2월4일 오전 서울 명동성당에서 가톨릭대학교 2003년 신입생들이 상견례를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새 학기를 맞은 각 대학교 홈페이지의 자유게시판에는 임씨의 이야기와 같은 글들이 수없이 올라와 있다. 대부분 학번에 따라 짜여지는 존대말, 반말 문화에 편입되지 못하는 애환을 담은 내용이다.

    이 때문에 최근 대학 사회에서는 ‘학번에 따른 서열 문화를 없애자’고 주장하는 ‘안티학번제’ 운동이 활발히 벌어지고 있다. 고려대 게시판에서 ‘안티학번’을 주장한 한 학생은 “이제는 기수에 따라 철저하게 서열을 구별하는 군대식 문화가 대학 내에서 사라져야 한다”며 “선후배 관계보다 더 중요한 건 인간적인 관계 아니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서울대 철학과 학생회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최근 열린 오리엔테이션에서 ‘새내기들이 선배에게 존대말을 쓰도록 강요하지 말자’는 캠페인을 벌이기도 했다. 학번 구별 없이 자신에게 편한 어법으로 대화를 나누며 평등한 관계를 맺자는 것이었다.

    철학과 학생대표 승한씨는 “대학생활 초기에 선후배 사이에 존대말, 반말 문화가 굳어져버리면 후배는 자신의 의견을 제대로 펴지 못한 채 선배의 이야기를 무조건 따르게 될 가능성이 높다. 말 자체에 이미 권력관계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존대말 파괴를 통해 선배가 이끌고 후배는 무조건 따라가는 오리엔테이션의 관행을 깨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서구문화 유입·컴퓨터 언어 확산 탓”

    이 같은 철학과의 캠페인은 오리엔테이션에 참가한 학생들 사이에서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서로 격의 없이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어서 좋았다”는 긍정적 평가를 얻었다.

    2000년부터 평등한 어법을 사용하고 있는 여성단체 여성민우회 산하 ‘가족과 성 상담소’ 활동가들도 ‘반말 쓰기’는 순기능이 많다고 이야기한다. 가족과 성 상담소 유경희 소장은 “상담소 식구들은 서로를 생기, 허브, 사자, 공기, 늘바람 등 다양한 별칭으로 부르면서 직급이나 나이에 관계없이 반말을 사용한다. 40대 후반인 나에게 20대 중반의 활동가가 ‘생기, 오늘 오후에 행사 있는 거 알지?’ 하고 묻는 식이다. 서로 존중한다는 합의 하에서 쓰는 반말은 인간관계를 더 친밀하고 평등하게 만들 뿐 아니라 대화와 토론의 폭을 넓혀준다”고 자랑했다. 가족과 성 상담소 외에도 몇몇 시민단체들에서는 반말 쓰기를 일상화하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퍼져나가고 있는 이 같은 반말 문화는 사람을 만나면 무조건 ‘위 아래’를 따져 ‘선배님, 형님, 후배, 아우’로 관계를 정리해야 편안해지는 우리의 전통적 서열 문화에 비추어볼 때 의미 있는 변화라는 평이 적지 않다.

    노르웨이 오슬로 국립대학 한국학과 박노자 교수는 “한국인들은 지나치게 서열과 권위에 집착한다”며 “한국 사회의 복잡한 호칭 문화와 권위주의가 사라져야 진정한 발전이 이뤄질 수 있을 것”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공동육아 김태희 간사도 “존대말 어법은 나이로 인간관계를 서열화해 사람들의 창의성과 자유로움을 억압한다”며 “어릴 때 평등한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이 권위 앞에서도 당당하게 자신의 주장을 내세울 수 있는 독립적인 어른으로 성장하는 만큼 이제는 획일적인 존대말 반말 문화를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에 대해 우려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김병선 교수는 “우리의 존대말은 원래 서로를 존중하는 것에서 출발한 어법이었다”며 “존대말이 없는 서구 문화가 급속히 유입되고 컴퓨터 통신 언어가 일상화되면서 우리 전통이 파괴되고 있는 것은 심각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김교수는 “~하오, ~하게와 같은 다양한 하대체를 되살려 평등하면서도 윗사람에 대한 존중 의식이 살아 있는 우리말 어법을 만들어내야 한다”고 말했다.

    국어문화운동본부 남영신 회장도 “존대말이 무조건 구시대의 악습인 것처럼 비쳐지는 것은 적절치 않다.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한쪽은 하대를 하고 다른 한쪽은 극존칭을 써야 하는 것이 문제인 것”이라며 “평등하고 서로 존중하는 관계를 위해서는 두 당사자 사이에 반말을 쓰기보다는 서로 존대를 하는 어법을 사용하는 편이 더욱 적절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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