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76

2003.03.20

교문 나서는 순간 ‘쪽박’ 찰라

대책 없이 대학 포기 땐 ‘혹독한 시련’ … 저임금 불안정 취업 반복 ‘빈곤층’ 될 수도

  • 안영배 기자 ojong@donga.com

    입력2003-03-13 15:4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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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문 나서는 순간 ‘쪽박’ 찰라

    채용박람회에 몰려든 취업 희망자들.

    지난해 서울시내 한 인문계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용산 전자상가에서 컴퓨터 부품을 배달하는 일을 하고 있는 이성칠씨(가명·20)는 이미 오래 전부터 이 일을 그만두겠다고 마음먹고 있다.

    “대학에 진학할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고 컴퓨터 조립에 관심이 많아 용산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일을 배워보기로 했어요. 친구나 애인한테도 공장에서 일한다고 말하는 것보다는 용산 전자상가에서 일한다고 하는 게 좀 그럴 듯해 보이잖아요? 그런데 오전 9시경에 출근해 하루종일 오토바이를 몰며 부품 배달과 수금 등 자질구레한 업무를 도맡아 하다 보니 일도 너무 힘들고 수금 과정에서 스트레스가 많이 쌓였어요. 게다가 퇴근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아 개인적으로 공부할 여유마저 없으니 컴퓨터 조립 일을 배우기도 쉽지가 않았죠.”

    이씨는 “학교 공부를 좀더 열심히 해 2년제 컴퓨터 관련 학과에라도 진학하지 않은 것이 후회스럽다”면서 조만간 일을 그만두고 대학입시를 준비할 생각이라고 밝혔다.

    이씨처럼 고교 시절 아무런 대책 없이 사회에 진출했다가 후회하는 인문고 출신들이 적지 않은 게 우리 사회의 현실이다. 서울 인문계 고교인 중앙고에서 직업선택반 담임을 맡고 있는 김원휘 교사는 사회에 진출한 제자들 중에 한 직장에서 6개월 이상 근무하는 경우를 찾아보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지난해 3학년 전체 학생들 중에서 직업선택반을 지원한 60명의 제자들을 지도했습니다. 제자들 중에서 14명이 4년제 대학과 전문대에 진학했고, 나머지 46명이 취업을 했죠. 그런데 6개월 뒤 취업한 제자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 알아보니까 10명 정도가 처음 선택한 직장에 남아 있을 뿐 나머지 아이들은 대학 진학이나 다른 진로를 찾기 위해 직장을 그만뒀더군요.” 김교사의 말이다.



    “6개월 이상 한 직장에 있는 경우 드물어”

    김교사는 또 직장생활을 하는 10명의 제자들도 학교에서 1년 과정으로 배운 전공과목을 제대로 살려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전공과 무관한 영업직이나 판매직, 생산직 등에 종사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이들 역시 경제적 형편 때문에 직장생활을 할 뿐이지 자신의 업무에 만족하고 있는 상태가 아니라는 것.

    인문고 출신들이 자신이 일하고 싶은 분야의 직장을 구한다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만큼이나 어렵다는 게 취업정보 전문가들의 말이다. 자동차 정비, 정보처리, 경찰공무원, 사무보조, 비서, 은행창구직 등 전통적인 고졸자 일자리를 전문대 이상의 고학력자가 잠식해가는 것이 가장 큰 원인으로 꼽히고 있다.

    공고나 상고 같은 실업계 출신이라고 해서 형편이 나은 것도 아니다. 서울의 한 화장지 제조업체에서 일하다 적성에 맞지 않아 그만두고 다른 일자리를 구하고 있는 박정우씨(가명·23)는 ‘고졸 출신’이란 점이 취업 과정에서 가장 큰 장애가 되고 있다고 밝혔다. 서울의 실업계 고교에서 정보처리과를 전공하고 자격증까지 딴 박씨지만 자신의 전공을 살릴 만한 IT업계에서는 번번이 전문대 졸업 이상의 학력을 조건으로 내걸었다는 것.

    이에 따라 취업을 목표로 하는 실업계 고교에서도 졸업한 뒤 곧장 취업에 나서는 학생보다 대학 진학을 선택하는 학생 수가 월등히 많은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3월 초 현재 3학년 전체 학생(407명) 가운데 대학에 진학한 학생들이 무려 182명(4년제 대학 32명, 전문대 150명)으로 나타났는데 대학입시가 끝나는 3월 말까지는 숫자가 더욱 늘어날 전망입니다. 전체 학생들 중 80%가 진학을 원하고 있는 반면 취업을 원하는 학생들은 20%에 지나지 않아요. 20%의 학생들 역시 평생직장을 염두에 두고 취직하는 게 아니라 임시로 거쳐가는 직업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상황이죠.”

    서울 청운동의 경기상업고에서 학생들의 취업상담을 하고 있는 관계자의 말이다. 이 학교 정문에 걸려 있는 ‘축(祝) 2003학년도 서울시 4년제 대학 합격자 5명’이라는 플래카드가 실업계 고교의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는 듯했다.

    교문 나서는 순간 ‘쪽박’ 찰라

    제3회 직업교육훈련박람회에 선보인 카지노게임 (맨 왼쪽)과 손톱미용술 시범 . 경기 성택조리과학고의 조리실습실(오른쪽).

    결국 4년제 대학 출신자나 전문대 출신자에게 일자리를 빼앗기고 있는 인문고나 실업고 출신들에게 남아 있는 일자리는 전공과 무관한 서비스 업종이나 이른바 ‘3D’ 생산직.

    그러나 이들 직종에서 고교 출신들이 버텨내는 것도 쉽지는 않다. 여고를 졸업한 뒤 서울의 한 퓨전음식점에서 근무하고 있는 김정희씨(가명·20)는 “일주일 내내 하루 12시간씩 서서 일하면서 받는 월급이 고작 75만원인 데다가 손님들에게 서빙하면서 받는 스트레스가 너무 심해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지만 고교 졸업장 가지고는 마땅히 갈 데도 찾을 수 없어서 참고 일하는 것뿐”이라고 말했다. 또 3D 생산직의 경우 근로환경이 열악한 데다가 해외 산업연수생 유입으로 임금이 수년째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어 고졸자들도 취업을 꺼리는 상황이다.

    고졸자들의 근로조건만 놓고 따지자면 여성이 남성에 비해 그나마 좀 나은 편. 여성들은 서비스업종이나 생산직종에 정규직으로 채용되는 기회라도 있지만 ‘군미필’의 남성들은 정규직으로 채용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경기 평택의 지방산업단지에서 일하고 있는 김철우씨(가명·21)는 군대 문제가 걸려 있어서 2년째 정규직이 아닌 임시직 신분으로 일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가 오전 8시에 출근해 하루종일 일하고, 때로는 야근이나 특근을 하면서 받는 월급이 한 달에 70만원 정도. 김씨는 고교를 졸업할 당시 컴퓨터 관련 자격증을 가지고 있었지만 컴퓨터 회사가 대졸자만 찾는 바람에 할 수 없이 이곳에서 기계부품을 단순 조립하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 이번이 세 번째 직장인 김씨는 “나와 비슷한 처지의 친구들은 대부분 6개월을 버티지 못하고 회사를 옮겨 다니거나 ‘군대나 가겠다’며 직장을 그만뒀다”고 말했다.

    실제로 평택의 반도체 제조업체 인사담당자인 김병수씨는 중소 제조업체들의 경우 고졸 출신들의 매년 평균 이직률이 30%에 달한다고 밝혔다. 김씨는 이 같은 현실이 미래의 고졸 취업 희망자들에게도 악영향을 줄 수 있다고 말했다.

    “고졸 출신들의 이직률이 높은 것은 취업자들에게 ‘내 직장’이라는 직장의식이 희박한 때문으로 보입니다. 이는 회사는 회사대로 안정적인 노동인력 확보에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고졸자들은 고졸자들대로 정규직에 취업하기 어렵게 만드는 요인입니다. 요즘 제조업체에서는 인문고 출신의 남성들을 채용하기를 더욱 꺼리는 경향이 있어요. 인문고 출신의 남성들은 군대 문제가 걸려 있는 데다 실업계 출신들과는 달리 여차하면 대학에 진학하겠다면서 사표를 던지기 일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고교 출신의 남성들보다는 외국인 근로자를 선호할 수밖에 없죠.”

    결국 특별한 전공이나 기술이 없는 고졸자들은 대학 출신들에게 전공 직종을 빼앗기고 전공과 무관한 생산현장에서도 외국인 근로자들에 비해 경쟁력이 떨어진다는 이야기다.

    이에 대해 노동연구원 정인수 선임연구위원은 “고졸자들은 취직을 해도 저임금과 열악한 근로조건 때문에 불안정 취업과 실업을 반복하다 장기실업자가 돼 빈곤층을 형성할 위험이 높다”고 지적했다. 이는 경제활동 통계에서도 확인된다. 노동연구원에 따르면 1994년 고졸자 실업률이 3.8%로 대졸자(5.9%), 전문대 졸업자(6.7%)보다 낮았으나 2001년에는 대졸자와 전문대 졸업자 실업률보다 훨씬 높은 6.3%까지 올라갔고, 해마다 그 비율이 높아지는 추세라는 것.

    노동연구원 전병우 박사는 “우리나라 노동정책이나 사회적 관심이 전문대 이상의 고학력 실업에만 맞춰져 있어 고졸 실업문제는 사각지대가 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결국 고졸자들은 스스로 철저한 자기개발과 취업 준비를 하지 않는 한 사회로부터 소외당하는 계층에 머물게 될 수도 있다는 무서운 경고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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