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38

2002.06.13

“내 고향은 월드컵 경기장 동네라네”

난지도 마지막 철거 예정지 상암 ‘모루지마을’ … 뿔뿔이 헤어지겠지만 긍지와 자부심에 뿌듯

  • < 최영철 기자 >ftdog@ddonga.com

    입력2004-10-11 15:4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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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고향은 월드컵 경기장 동네라네”
    서울시 마포구 상암동 340-1 일대 110여 가구 주민들은 2002 한·일 월드컵 개막식과 개막전이 열린 ‘서울월드컵경기장’의 공식명칭을 한결같이 ‘월드컵 상암경기장’이라고 우긴다.

    실제 서울월드컵경기장이 위치한 지번은 서울시 마포구 성산동 515. 상암동에 접해 있을 뿐 행정구역상으로는 분명 성산동이다. 그러나 이들에게 경기장 명칭은 오직 ‘상암동경기장’일 뿐이다. 행여 그들 앞에서 ‘서울경기장’이라 말을 건네면 벼락같이 이런 말이 되돌아온다. “그 경기장이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데….”

    이곳 주민들이 이토록 ‘상암’이라는 경기장 명칭에 집착하는 이유는 뭘까.

    “이 경기장은 힘없고 가난한 상암동 주민들의 피와 살, 눈물 위에 지어진 겁니다. 경기장의 명목상 소유자는 서울시일지 몰라도 실제 소유자는 우리죠.” 4대째 이 동네에 살고 있다는 강신용씨(73)의 얼굴에는 알 듯 모를 듯한 미소가 번진다. 강한 자부심의 한편으로 한없는 허탈함이 교차하는 그런 표정. 강씨는 경기장의 높은 철 지주를 바라보며 이렇게 탄식한다. “이제 우리도 이곳을 떠나야 해요. 속이 쓰려도 어쩌겠습니까. 그래도 내 고향이 세계적으로 알려진 게 어딘데. 어디든 먹고살 데가 있겠죠.”

    강씨가 사는 상암동 2통, 속칭 ‘모루지’마을은 불과 20년 전만 해도 서울시의 온갖 쓰레기가 모이던 난지도 판자촌의 일부였다. 현재는 상암동경기장 인근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자연마을.



    경기장에서 불과 1km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지만 아직도 나무땔감을 쓰는 아궁이 부엌이 곳곳에 남아 있고, 비가 새는 것을 막기 위해 지붕에 비닐천막을 덮은 집이 대부분이다. 내려앉은 기와와 허물어진 담벽 사이로 각종 오물이 흘러나와 냄새가 진동하는, 그야말로 ‘서울 하늘 아래 이런 곳이 있을까’ 하는 의문이 절로 드는 달동네. 동네 곳곳에 1, 2, 3, 4라고 쓰인 붉은색 페인트는 곧 철거될 지역이라는 것을 예고한다.

    “내 고향은 월드컵 경기장 동네라네”
    지난 98년 5월 이 지역에 월드컵경기장 유치가 확정된 이후 이 지역은 상암동 일대의 유일한 달동네로 남았다. 난지천 일대의 판자촌은 80년대 중반 이후 난지도 개발이 본격화되면서 철거됐고, 마을 인근 600여 가구는 경기장 유치 확정과 함께 하나둘씩 떠났다. 이 지역 일대가 택지지구로 지정돼 토지와 건물의 강제수용이 이루어졌기 때문. 그 과정에서 택지지정을 반대하던 주민이 구속되는 불상사도 있었고, 많은 세입자들이 아무 대책 없이 생활 터전을 잃었다. 하지만 월드컵경기장 인근의 주변환경 개선과 택지개발이라는 명분 앞에 이들 주민은 강제철거를 묵묵히 받아들였다.

    상암동 난지도 지역의 마지막 달동네인 ‘모루지’마을도 그 거대한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지난 5월 마을 주민 75%가 택지지구 편입에 동의한 것. 월드컵이 끝나면 곧 보상이 시작되고, 마을 주민들은 이곳을 떠나야 한다. 강제철거 때까지 기다리는 것보다 스스로 나가는 쪽을 선택한 것이다. “이제 인근 철거지역에서 나무땔감을 구해다 불을 때는 것도 한계가 왔어. 대안이 있어야지.” 마을 사람들은 더 이상 저항할 힘이 없다.

    그러나 삶의 터전을 잃고 낮은 수용가격에 대한 절망만 가득 차 보이는 난지도의 마지막 달동네 모루지 주민들에게도 월드컵 개최는 하나의 자부심이자 긍지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택시가 안 들어오던 지역이 세계적 명소가 되고, 내가 살던 곳에서 월드컵이 치러지다니…. 하루에도 몇 번씩 경기장을 둘러보곤 해.”

    월드컵 개막식이 열리던 5월31일 오후 한자리에 모인 모루지마을 노인들은 지난 일을 회상하며 “상암동이 없었다면 한·일 월드컵도 없었다”고 저마다 자랑이 한창이다. 이날 모임은 월드컵 개막식을 기념해 이곳의 터줏대감들이 가진 계모임 자리. 8대째 모루지마을에 살았다는 조경향씨(70)는 상암동에 월드컵경기장이 들어올 수밖에 없었던, 그리고 한국팀이 16강에 들 수밖에 없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내 고향은 월드컵 경기장 동네라네”
    “본래 우리 마을이 전통적으로 축구에 강했지. 일제 치하에도 난지도 벌판에서 새끼줄을 감거나 고무튜브를 말아 축구를 했으니까. 참 축구 어지간히 많이 했다(크게 웃음). 그런 기운을 받은 상암동에 월드컵경기장이 지어졌으니 16강에 들 수밖에….”

    “말도 안 되는 소리 한다”며 옆에서 지켜보던 최춘식씨(68)는 연신 혀를 차며 온 마을 주민들이 경기장 유치 데모에 나섰던 97년 당시를 회상했다. “사실 우리가 쫓겨날지도 모르고 끈질기게 상암동경기장 유치를 주장했어요. 갑자기 인천 문수경기장으로 월드컵 주경기장이 옮겨진다는데 참을 수가 있어야지. 서울시내를 돌아다니며 데모한 덕에 경기장이 서울로 왔는데 그런 우리를 몰라주고 이곳에서 나가라니….”

    그랬다. 이곳 모루지마을 주민들은 97년 8월 인천시 문수동과 서울시 상암동을 두고 주경기장 여론이 양분되자 주경기장 유치를 위한 데모에 앞장섰다. 아이, 어른, 노인 할 것 없이 마을 전체 주민이 상암동경기장 유치에 발 벗고 나선 것. 상암동 조기축구회 이병만 회장은 그때의 감동을 이렇게 전한다. “98년 5월6일 상암동경기장 유치가 확정되던 날 난지도 산 꼭대기에 올라가 마을 주민 모두가 만세삼창을 불렀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만약 우리가 떠난 고향 동네에 아파트만 덩그러니 들어섰다면 참을 수 없지. 그래도 난 누가 고향이 어디냐고 물으면 월드컵경기장 동네라고 이야기한다. 어쨌든 한국팀이 16강에 꼭 진출해야 할 텐데….” 얼마 전 수색지역으로 이주한 권봉옥씨(68)는 내 고향은 ‘상암경기장’이라고 힘주어 강조하며, 개막전을 보기 위해 일찌감치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전통적인 상암동의 축구 열기가 이어진 것일까. 지난 76년 생긴 상암동 조기축구회는 10회 이상의 전국대회 우승 실적을 낼 만큼 유명한 팀으로 성장했다. 팀 고문과 현재 팀원 중 국제심판과 국내심판 자격증을 가진 사람만 두 명이 있을 정도다. 축구에 대한 열정은 모루지마을 아이들도 마찬가지.

    개막식과 개막전이 있던 날 오전과 오후 모루지 아이들은 마을 코앞에 있는 서울서부면허시험장 주차장에서 따가운 햇빛을 받으며 축구를 했다. 개막식 때문에 학교(상암초등학교)가 쉬자 모두 이곳에 모인 것. 비록 주차장에 그어진 흰색 선을 골대 삼아 하는 동네축구지만 마을에 사는 초등학생 중 축구화를 가지지 않은 학생은 한 명도 없다.

    9명의 남학생 중 본격적인 축구선수의 꿈을 키우고 있는 아이만 두 명. 전 국가대표 하석주 선수와 이름이 같아 ‘제2의 하석주’라 불리는 이석주군(12)은 프랑스팀의 지네딘 지단이, 비쩍 마른 데다 수비에 특히 강해 ‘홍명보’라는 별명을 가진 이요한군(11)은 멕시코팀의 블랑코가 가장 존경하는 선수다. 축구공도 월드컵 공식 지정구인 피버노바의 모조품을 사용하고 있다. 지금 그들의 유일한 소원은 멋진 새 축구화를 가지는 것.

    “우린 비록 얼마 후에 헤어져도 분명 상암경기장에서 대표선수로 다시 만날 거예요.”

    얼마나 축구를 많이 했으면 올해 초 새로 산 축구화가 다 해어졌을까. 곧 철거될 달동네에 살아도 아이들은 월드컵에 대한 꿈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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