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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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문화 게릴라의 ‘원조’를 아느냐

92년 출범 ‘현실문화연구’ 대중문화 꼬집기 10년 … 광고·TV 등 영역 확장 ‘새로운 담론’ 형성

  • < 김현미 기자 > khmzip@donga.com

    입력2004-10-05 16: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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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희가 문화 게릴라의 ‘원조’를 아느냐
    1992년 12월12일 압구정동 갤러리아미술관. 화가, 사진작가, 건축가, 평론가, 시인, 비디오아티스트, 디자이너 등 소위 ‘문화인‘ 소리를 듣는 사람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갤러리아미술관에는 각양각색의 네온사인과 상표들을 나열한 ‘압구정의 기호와 이미지‘(서숙진)를 비롯, 서양모델과 그의 포즈를 모방한 한국 여성의 이미지를 대비한 ‘연출된 육체‘(조숙경) 등 12명의 작가가 출품한 100여점의 작품이 전시되었다. 여기에 도정일 강내희 조혜정 김정환 등 쟁쟁한 이론가들이 전시의 의미를 텍스트로 남겼다.

    10년 전 ‘압구정동: 유토피아 디스토피아‘는 미술전시의 개념을 바꾸어 버렸다. 문화는 곧 고급 예술이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깼고, 일상 그 자체도 평론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 전시를 통해 손가락질받던 압구정 오렌지들이 문화연구의 대상으로 부각되었다. 관객들은 아름다운 예술품 앞에서 우아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 비판적 메시지로 가득한 전시물 앞에서 당혹감을 맛봐야 했다. 문화계의 이목은 자연히 이 행사를 기획한 ‘현실문화연구‘로 모아졌다.

    창립초기 ”고급 예술 고정관념 깨라”

    너희가 문화 게릴라의 ‘원조’를 아느냐
    ”강남문화를 상징하는 갤러리아백화점에서 폼 나는 그림을 건 것도 아니고 대중문화 현상을 그대로 담아낸 작품들에다 천민자본주의가 어쩌고 하면서 비판을 했으니 백화점측이 놀랄 만하죠. 매스컴의 집중 조명을 받은 덕분에 넘어갔지만....”(김수기)

    당시 갤러리아미술관 관장으로 현실문화연구(이하 현문) 창립에 참가한 김수기씨는 이 일로 관장직을 접었다. 윤석남 박영숙 김진송 엄혁 김수기 조봉진 등 6명의 ‘현문‘ 동인들은 이렇게 세상에 도전장을 던졌다.



    ”80년대를 지나면서 거대담론의 틀로 현실을 분석하는 데 한계를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렇다면 거꾸로 현실, 우리의 일상에서 담론을 끌어내는 방법이 없을까 생각했지만 어떤 이론적 틀을 갖고 출발한 것은 아니에요. 저는 ‘문화연구‘라는 말조차 몰랐으니까요.”(김진송)

    너희가 문화 게릴라의 ‘원조’를 아느냐
    ‘현문‘의 출발은 80년대 한국 미술비평에 새 바람을 몰고 왔던 미술비평연구회(이하 미비연)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비연‘은 1989년 성완경 교수(인하대.미술사)를 중심으로 창립해 93년 해체되기까지, 형식주의에 안주해 온 기존 미술비평 풍토를 비판한 진보적인 문화운동 집단이었다. 이곳에서 함께 미술운동을 한 엄혁 김진송 김수기는 미비연 활동이 답보상태였던 92년, 현실문화연구팀을 만들었다. 미술이론으로 무장한 김진송 김수기 엄혁 조봉진에게 미술 밖의 세상을 보여준 사람은 화가 윤석남씨와 사진작가 박영숙씨였다. 두 사람이 30대 초반 혹은 20대 후반의 젊은이들과 뜻을 같이 해 현문 창립에 참여했을 때, 이들은 이미 50대 중반의 나이로 자신의 분야에서 확고한 입지를 갖고 있는 기성작가였다. 무엇보다 1984년 창립된 여성운동단체 ‘또 하나의 문화‘(이하 또문)에서 같이 활동해 온 경험이 있었다. 윤석남 박영숙씨는 현문과 또문, 즉 문화운동과 여성운동의 가교 구실을 했다.

    ”젊은 친구들과 팀을 이루면서 나이 차이 같은 것은 의식하지 않았어요. 사실 제가 배운 게 더 많으니까요. 89년에 전시일로 뉴욕에 갔다가 엄혁씨를 처음 만났는데 뉴욕에서 미술기획자로 활동하고 있던 엄혁씨로부터 문화연구에 대해 새벽 3시까지 넋을 잃고 들었던 기억이 나요. 한국에 돌아가면 반드시 문화연구를 공부해야겠다고 결심했는데 엄혁씨가 귀국하면서 자연히 한 팀이 됐습니다.”(윤석남)

    사진작가 박영숙씨도 네 사람을 알게 된 것은 인생에서나 작품활동에서 ‘신선한 자극‘이었다고 회고한다. 이렇게 모인 6명의 창립동인은 발행인, 편집인, 운영위원 혹은 편집위원, 때로는 필자라는 이름으로 활동을 했다.

    92년 ‘압구정동 유토피아 디스토피아‘에 이어 93년 현문의 두 번째 기획 ‘TV 가까이 보기 멀리서 읽기‘ 역시 주목을 받았다.

    여세를 몰아 세 번째 문화연구 ‘광고의 신화.욕망.이미지‘를 내놓았고 이어 미메시스라는 신세대 문화집단이 쓴 ‘신세대 네멋대로 해라‘가 출간 6개월 만에 1만부가 팔리면서 일대 파문을 일으켰다. 신세대 자신에 의한 신세대 문화론이라는 측면에서 언론의 집중조명을 받은 이 책은 ‘전복을 향하여‘라는 서문만큼이나 도발적이어서 기성세대를 놀라게 했다.

    이를 계기로 ‘현문‘은 외부의 젊은 문화연구자들과 소통하게 되었다. 94년 현문팀이 직접 기획한 ‘신세대론 혼돈과 질서‘에는 각 대학에서 사회학, 언론학, 행정학, 시각디자인을 전공하는 석.박사과정 연구자들이 대거 참여했다. 이후 서초동 금호아파트 지하의 현문 사무실은 대학가 문화동아리들이 반드시 거쳐가는 명소이자 문화비평가 혹은 문화게릴라들의 산실이 되었다.

    ”압구정동, 신세대, 결혼, 광고, 서울이라는 공간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우리는 이론의 잣대를 들이대지 않고 감각적으로, 그냥 이야기로 풀어가고 싶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철저히 현장 속으로 들어가는 연구를 해야 했죠.”(엄혁)

    이런 현문의 연구방식은 담론분석이나 메타비평에 머물렀던 문화계로부터 주목을 받았고 역으로 문화생산자의 입장에서 분석의 대상이 됐다.

    1992년 국내 최초로 문화이론 전문지 ‘문화과학‘이 창간된 후 지난 10년 동안 ‘상상‘ ‘리뷰‘ ‘오늘예감‘ ‘대화‘ 등 많은 문화잡지들이 명멸을 거듭한 가운데 ‘현문‘은 계간지가 아닌 테마 기획서 형태로 가장 현실적인 문화분석을 시도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현문‘의 특징 중 하나가 주제에 따라 모였다 흩어지는 프로젝트팀 방식의 운영이다. 젊은 문화연구자 혹은 문화평론가를 자처하는 사람 가운데 ‘현문‘과 인연을 맺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드나듦이 잦았다. 미술비평연구회 출신의 미술평론가 백지숙씨와 이유남씨는 ‘TV 가까이 보기 멀리서 읽기‘의 기획으로 참여했고, 강내희 심광현 이동연 고길섶 등 계간지 ‘문화과학‘팀도 심심치 않게 현문 프로젝트에 합류했다. 현재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이자 문화평론가로 활동 중인 서동진씨는 현문의 문화연구 시리즈 일곱번째 ‘섹스 포르노 에로티즘: 쾌락의 악몽을 넘어서‘를 기획하면서 커밍아웃(동성애자임을 선언)을 하고 동성애인권운동의 선봉에 섰다. ‘신세대, 혼돈과 질서‘에 참가했던 안이영노씨는 이후 신세대 평론가로 나섰다

    1997년 동인 1세대인 엄혁 김수기씨가 제2회 광주 비엔날레 운영에 참가하면서 잠시 현문 활동을 접은 사이 편집장으로 정성철 손동수씨가 바통을 이어받기도 했다.

    한편 창립동인 조봉진씨가 미국 유학을 떠나고 대신 99년 서울대 고고미술학과 동기인 이교동씨가 시카고대학에서 인류학 박사과정을 마치고 돌아와 현문의 편집장으로 합류했다. 현재 그는 현문을 떠나 블루몽크 인터랙티브라는 온라인 게임회사를 운영중이다

    그렇다면 불과 10년 남짓한 한국의 문화연구 역사에서 ‘현문‘의 위상은 어디쯤일까. 문화평론가 이동연씨는 ‘문화연구, 그 쟁점과 미래‘(‘현대사상‘ 97년 가을호)라는 글에서 ”현실문화연구가 해온 작업은 기획중심의 집단연구체제라는 점에서 그간 인문학 위주의 고급 지식인이 해온 개인주의적인 관행들을 극복하려는 노력들이 엿보였다. 그러나 최근 새로운 주제 발견의 빈곤과 현실문화를 바라보는 이론적 부침 현상을 드러내면서 기획출판 중심의 문화연구가 갖는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고 평한 바 있다.

    사실 97년 무렵부터 ‘현문‘은 과거처럼 역동적인 문화생산물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전 편집장 이교동씨는 ”현문의 활동이 출판 중심이 되면서 한계를 느꼈습니다. 문화의 패턴은 이미 두 발자국 앞질러 가고 있는데 우리의 생각이 행동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죠. 이미 글로 씌어졌을 때는 유행에 한참 뒤져 있는데 비평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라는 회의가 들었어요”라고 문화연구의 한계를 털어놓았다.

    그러나 이교동씨는 굳이 ‘현문 스피릿(정신)‘이 있다면 ‘영원한 비주류‘가 아니겠느냐고 말한다. 제도권으로 흡수되지 않은 게릴라 정신. 공교롭게도 현문 창립 동인들은 마흔 줄에 접어들었어도 모두 제도권과는 거리가 먼 길을 걷고 있다.

    현재 이들의 고민은 문화연구의 맥을 이어줄 다음 세대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97년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문화론‘의 열풍이 걷히자 문화평론가 혹은 기획자를 자처했던 젊은이들이 아카데미 쪽으로 편입하거나 정보기술(IT) 등 유망분야로 발길을 돌리면서 한국 문화판은 황폐화되었다. 심지어 ‘90년대 말 이후 문화연구는 공황상태‘라는 말이 나오는가 하면, 김수기씨는 ”현문이 출범하던 90년대 초로 돌아간 느낌”이라고 말한다.

    윤석남씨는 3년 전 ‘동아일보‘ 칼럼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누가 나에게 ‘예술가는 누구인가‘라고 묻는다면 나는 ‘지상으로부터 20㎝ 정도 떠 있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대답하고 싶다. 너무 높으면 자세히 볼 수 없고 현실 속에 파묻히면 좁게 볼 수밖에 없다.”

    지난 10년 현실문화연구는 너무 높은 곳으로 올라가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예술을 지상으로 끌어내리고, 한편 현실 속에 파묻혀 보이지 않는 대중문화의 기호들을 읽어내는 역할에 충실했다. 아쉽게도 지금 문화판에선 현실문화연구가 창립되던 90년대 초반의 폭발적인 에너지를 찾아보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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