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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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초학문 우대’ 지금만 같아라

올 1212억 지원 등 르네상스 시대 꿈꿔… “파격 혜택만큼 사후 평가작업 철저하게 지킬 것”

  • < 김현미 기자 > khmzip@donga.com

    입력2004-10-05 15:4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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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초학문 우대’ 지금만 같아라
    지난 1월 정부가 기초학문 육성을 위해 올 한 해 동안 1212억원을 지원하며, 3년에 걸쳐 약 3000억원을 투입하겠다고 발표하자 대학가는 술렁거렸다. 2001년 기초학문 육성 사업비 190억원과 비교해 엄청나게 늘어난 액수일 뿐 아니라, ‘문·사·철’(文史哲)로 대변되는 인문·사회과학 분야에 연구비가 집중 지원되는 등 사상 초유의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김대중 대통령이 교육인적자원 분야 9개 부처 장관들과 만난 자리에서 “인문과학이든 자연과학이든 기초학문을 발전시키는 방안을 연구해 대책을 세우라”고 지시한 지 6개월 만의 일이다.

    2월 ‘2002년도 기초학문 육성 지원사업’의 집행을 맡은 학술진흥재단(이사장 김성재)이 발표한 구체적 시행계획을 보면 인문·사회과학 분야 지원사업 680억원, 기초과학 분야 지원사업 272억원, 그 밖에 우수 연구자 지원사업 150억원, 우수 학술도서 보급 지원사업 50억원, 대학교육과정 개발연구 지원사업에 60억원이 배정되었다.

    이 사업의 특징은 상대적으로 연구비 지원에서 소외되었던 기초학문 분야를 적극 육성하고 여성 연구자나 비제도권 학자들의 참여 기회를 넓혔다는 데 있다. 인문·사회과학 중점연구 분야를 국학 고전 연구, 국내외 지역 연구, 한국 근현대 연구로 선정한 것이나 기초과학 분야에서 응용 및 대형 프로젝트(BT, NT, IT, ET, ST)를 제외하는 등 고심한 흔적이 역력하다.

    ‘기초학문 우대’ 지금만 같아라
    연구진 구성에서도 교수나 박사 학위자 외에 석·박사 과정생과 대학 3~4학년생까지 연구보조원으로 참여할 수 있는 등 파격적이다. 또 지역연구의 경우 대학 밖 연구소, 박물관, 문화원, 향교, 서원, 서당 등 향토 연구자들을 발굴하고 해외지역 연구에서는 조선족, 고려인 등 재외동포를 포함시키기로 했다. 전문 연구인력 지원은 선정 인원의 20% 선에서 여성 신청자를 우대하는 조항도 삽입했다.

    인문·사회과학 분야는 프로젝트 규모(대중소)에 따라 1억원부터 10억원 이상까지 지원받는 대신, 단서로 ‘공동연구’를 내걸어 수혜 대상을 크게 늘리자 대학마다 때 아닌 연구팀 짜기 경쟁이 벌어졌다. 연구인력 인프라가 빈약한 분야에서는 “갑자기 갈 곳 없던 ‘박실이’(박사 실업자)들이 귀하신 몸이 됐다”며 농담이 오가기도 했다.



    이처럼 대학가를 떠들썩하게 한 기초학문 육성 지원사업은 5월17일 서류제출을 마감하고(기초과학 분야는 5월9일 마감) 심사작업에 들어갔다. 올해 지원액수를 크게 늘린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경우 신청 과제 수가 모두 631건, 신청 연구비는 1640억원에 달해 680억원의 한정된 예산을 놓고 치열한 경쟁이 예상된다.

    지역별 지원 현황을 보면 수도권 대학의 신청이 381건, 지방대학이 250건이다. 최종 심사결과가 나와야 정확한 판단을 할 수 있지만 지방대학의 소외감은 우려할 만한 수준은 아닌 것으로 나타났다.

    이 사업의 설계부터 집행·평가를 맡은 학술진흥재단 김성재 이사장은 “정부 수립 이후 기초학문에 이처럼 대대적인 예산을 편성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라며 “심사의 투명성과 선정의 적합성에서 의심의 여지가 없도록 하겠다”고 강조했다. 취임 1년을 맞은 김이사장으로부터 기초학문 육성사업의 진행 과정에 대해 들어보았다.

    -학계는 예상치 못한 엄청난 액수에 놀라고 있다. 아쉬운 점은 지원금만 강조되고 기초학문 육성의 본래 취지가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인류사회가 직면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기초학문이 더욱 활성돼야 함에도 그동안 경제성을 이유로 기초학문을 소홀히 했다. 그래서 기초학문을 지원하려면 먼저 국민들에게 이 분야가 엄청난 경제적·지적 재산임을 환기시킬 필요가 있다. 모든 콘텐츠는 인문학에서 출발하듯, 기초학문의 굳건한 토대 없이 응용학문도 발전할 수 없다. 근대 이후 우리나라가 외국 이론을 수입만 하는 지식소비 국가가 된 점을 반성하고 지식생산 국가로 재도약하기 위한 기초작업이 기초학문 육성이다.”

    -그동안 학술지원의 관행처럼 인식된 ‘나눠 먹기식 배분’ 문제는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이번 지원사업의 특징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선택과 집중’이다. 학과별로 일정액을 나눠주는 방식이 아니라는 것이다. 집중 지원 대상인 5개 기초학문 분야를 보면 과거 개념과 크게 다르다. 예를 들어 국학 고전연구는 고전문학 전공자나 역사학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승정원일기’에 기록돼 있는 매일의 날씨가 기상학 연구에 중요한 자료지만 한글세대는 그것을 해독할 능력이 없다. 이처럼 5000년 전통이 만들어낸 정보들을 누구나 연구할 수 있도록 기초작업을 하는 데 정부가 지원한다는 의미다. 국내외 지역 연구와 근현대 100년 연구도 그런 의미에서 ‘선택’했다. 특히 해외지역 연구는 어문학이나 특정 국가(미국, 유럽) 연구에 집중되었던 것을 바로잡아 세계문제를 주체적으로 인식하기 위한 연구가 돼야 한다.”

    -기초학문의 위기와 함께 늘 거론되는 것이 박사실업 문제다. 학문 후속세대에 대한 지원 계획은?

    “기초학문 육성사업을 박사실업 구제책으로 보는 것은 곤란하다. 다만 모든 연구를 공동연구 형태로 지원케 해서 자연스럽게 학문 후속세대에 대한 지원이 이루어지도록 설계했다. 구체적으로 보면 각 팀에 반드시 박사학위 소지자가 연구원으로 참여해야 하며(소형 과제 2명, 중형 과제 5명, 대형 과제 20명 이상) 이들에게 연 2000만원 이상의 인건비를 지급한다. 지속적으로 학문에 종사할 수 있는 최소한의 비용이다. 예산으로만 보면 약 2000명 이상의 박사들이 여기에 참여할 수 있다.”

    -학술진흥재단이 연구비를 나눠주는 데만 신경 쓰고 사후 관리가 약하다는 지적도 있는데….

    “기초학문 연구가 1~2년에 끝날 일이 아니기 때문에 3년까지 허용한 점이나 연구비에 인건비를 포함시키고 실패한 연구도 인정하는 등 파격적인 지원을 하는 만큼 책임도 따른다. 우선 선정과정에서 ‘목적이 분명하지 않은 돈은 절대로 주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지킬 것이다. 선정이 끝난 뒤 심사위원 명단을 공개해 투명성을 확보하고 연구에 대한 중간평가는 물론, 모든 연구 결과를 공개해 누구나 사후 평가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또 연구는 연구에서 끝나지 않고 반드시 교육과 연계할 수 있는 방안을 첨부하도록 했다. 심지어 국민의 세금으로 한 연구인 만큼 비전공자도 이해할 수 있는 수준에서 연구 요약본을 작성하도록 했다. 연구비만 챙기고 생산물이 나오지 않는 사례는 철저하게 가려내겠다.”

    기초학문 육성 지원사업은 인문학의 위기와 이공계 기피현상 등으로 뿌리째 흔들리고 있는 한국 대학들에게 가뭄 끝 단비 같은 소식이다. 물론 단비를 한 방울도 흘려보내지 않고 열매를 맺는 데 쓰는 것은 연구자들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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