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36

2002.05.30

‘잃어버린 150만표’ … 나는 투표하고 싶다

대선 앞두고 재외국민 참정권 찾기 운동 확산 … 97년 憲訴서 패소 등 권리회복 멀고 험할 듯

  • < 정현상 기자 >doppelg@donga.com

    입력2004-10-05 15: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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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잃어버린 150만표’ … 나는 투표하고 싶다
    ”미국 일리노이주에 사는 주부입니다. 외국에 살면서 선거에 참여하지 못한 것이 늘 불만이었습니다. 이번에는 기필코 우리의 참정권을 되찾기 바랍니다. 당연한 권리를 빼앗긴 쓰라림을 달리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김영미)

    올 12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참정권을 되찾으려는 재외국민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지난해 11월 국내에서 출범한 ‘재외국민 참정권 회복을 위한 한겨레네트워크’(www.hankyore.net) 등을 통해 이들은 자신들의 당연한 권리를 되찾기 위해 활발히 움직이고 있다.

    우선 이들은 재외국민에 대한 선거권을 제한하고 있는 ‘공직선거 및 선거부정방지법’ ‘국민투표법’ 개정을 위한 서명작업에 돌입했다.

    ‘잃어버린 150만표’ … 나는 투표하고 싶다
    지난 5월 초 열흘 사이에 한겨레네트워크(공동간사 정지석·김제완) 홈페이지에는 수백명이 온라인 서명을 했다. 인터넷 시대이긴 하지만 외국에 거주하는 동포들이 이렇듯 활발하게 자신들의 의견을 개진하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더불어 국회에서도 일부 의원이 관련법안 개정을 추진하는 등 이번 대선에서 재외국민의 투표 여부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민주당 정범구 의원은 6월 임시국회에서 관련법을 통과시키기 위해 물밑 작업을 서두르고 있으며, 한나라당 이부영 의원도 올해 초 관련 법률안 개정을 위해 의원 동의를 받는 작업을 벌였다.



    정부가 파악하고 있는 재외국민은 모두 560여만명이다. 이 가운데 한국 국적을 갖고 있는 이들은 210여만명, 유권자는 150여만명으로 추정된다. 물론 이 수치는 추정치이므로 오차가 있을 수 있지만 지난 97년 대통령 선거 때 39만표 차이로 당락이 결정된 것을 생각하면 그 의미는 의외로 크다.

    최근 갑자기 재외국민 참정권 문제가 떠오른 것은 크게 두 가지로 풀이된다. 하나는 해외에 살고 있는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회원들이 이번 대선에서 노무현 후보에게 힘을 실어주고 싶어하지만, 결과적으로 자신들에게는 선거권이나 부재자 투표권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부터다. 이들이 법 개정을 통해 자신들의 권리를 행사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운동이 확산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잃어버린 150만표’ … 나는 투표하고 싶다
    캐나다의 유철희씨는 “투표권 없는 영주권자의 비애라니…. 이제 투표하고 싶은 인물이 나왔는데 나에게 투표권이 없다니 말이 안 된다. 내 몫을 돌려달라”고 서명부에 적고 있다.

    둘째, 재외국민 참정권 회복운동에 공감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 특히 프랑스 파리 지역에서는 동포신문 ‘오니바’ 편집인이자 한겨레네트워크 공동 간사인 김제완씨(44) 등이 국내외를 오가며 활동하고 있고, 도쿄와 오사카 등지에서는 재일동포 이건우씨(50) 등이 유권자모임 등을 통해 이 운동의 중요성을 알리고 있다.

    국내에서 출판사를 운영하다 파리로 유학 간 김씨는 1992년 알제리 총선 때 파리에 거주하는 알제리 사람들이 파리 시내 초등학교 건물을 빌려 부재자 투표 하는 것을 보고 충격받았다고 한다. 그 사건을 계기로 그는 한국 동포들의 참정권 문제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당시 현지 동포신문 등을 통해 목소리를 높여보았지만 정작 본국에서는 별다른 반향이 없었습니다. 이후 한겨레네트워크 등을 조직하고 국회 공청회 등을 통해 문제제기를 꾸준히 해왔습니다. 올해 프랑스 대선 중 뉴욕의 프랑스인들이 자국 영사관에서 부재자 투표 하는 장면을 TV로 보았는데, 우리 재외동포들도 그런 감격의 날을 맞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잃어버린 150만표’ … 나는 투표하고 싶다
    국내인들의 무관심 속에서도 김씨가 희망을 버리지 않은 것은 일본인 친구 고이토 주니치씨의 영향이었다. 주니치씨는 재외 일본 국민의 참정권 회복운동을 주도적으로 펴온 사람이다.

    일본 역시 우리처럼 헌법에는 국적을 가진 모든 사람에게 국내외를 막론하고 국가적 사안에 대한 투표권을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하위법인 선거관련법이 해외에 거주하는 일본인의 투표권을 제한해 왔다. 이에 93년 주니치씨를 중심으로 한 일본해외유권자협회(Japanese overseas voters association)가 결성돼 활발한 운동을 벌인 결과 99년 5월 개정선거법이 통과되면서 참정권을 회복하게 된 것이다. 물론 당시 정권교체라는 일본 내 정치적 분위기도 여기에 큰 몫을 했다.

    일본의 경우 가장 먼저 이 운동을 편 곳은 뉴욕이었다. 당시 뉴욕에 거주하는 한 법학도가 투표권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돌리기 시작하면서 이 운동이 바람을 탔다.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진 파리 거주민들도 이 청원서에 서명하는 작업에 참여했고, 해외유권자협회가 결성돼 미국 프랑스 영국 독일 페루 등 국제적 네트워크를 통한 연대가 이뤄졌다. 당시 파리에서 서명운동을 하던 주니치씨는 프랑스 거주 일본인의 10%인 1500여명의 서명을 받는 큰 성과를 올렸다.

    그러나 한동안 진전을 이루지 못하다가 주니치씨가 동료와 함께 정부를 상대로 헌법소원을 제기하면서 여론이 움직였다. 결국 패소 판정을 받았지만 재외국민이 투표권을 되찾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국내에서도 지난 97년 대선을 앞두고 재외국민에게 참정권을 주지 않는 것에 대한 헌법소원이 제기되었다. 일본 미국 프랑스 등지에서 참정권 회복을 위한 움직임의 일환이었다. 결과는 물론 패소였다. 당시 헌법소원의 내용은 재외국민의 선거권을 인정하지 않는 ‘공직선거 및 선거부정방지법’(제37조 1항 및 제38조 2항)에 대한 것이었다.

    이에 대해 헌법재판소는 재외국민에게 선거권을 주지 않거나 국외 거주 내국인에게 부재자투표권을 주지 않는 것이 기본권을 제한해 위헌 소지가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러나 납세와 국방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 이유, 기술상의 문제와 국가 재정의 부담, 공정성 확보, 내국인과의 형평성 등을 이유로 위헌이 아니라고 결론지었다. 헌재 판결의 이 같은 논리는 곧 이 운동의 반대론자들이 내거는 논리가 되었다.

    그러나 참정권 회복을 위한 운동을 펴는 쪽의 논리는 이렇다. 우선 재외국민이 납세와 국방의무를 이행하지 않는다는 논리에 대해, 이들은 국민기본권에 해당하는 참정권은 의무를 다하는 국민에게 반대급부로 주어지는 게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납세와 병역을 부담할 능력이 없는 국민이나 수형자들에게도 이 권리가 부여되고 있다는 것.

    또한 선거 기술상의 문제가 초래된다는 것은 유권자들에게 우편물을 보내는 기간 등으로 인해 현행 법정 선거 기간으로는 촉박하다는 것인데, 이것은 앞으로 국회에서 논의를 거쳐 선거 기간을 연장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재정 부담은 분명 늘어나겠지만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가난했던 60년대에 이미 해외 부재자투표를 실시했다는 것.

    헌법재판소가 제기한 내국인과의 형평성 문제란, 해외 거주자들은 스스로 투표권에 장애가 되는 상황을 초래했기 때문에 국내 거주자들과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는 논리다. 그러나 해외 거주자들은 대부분 본국 법을 따르고 있는데 그 법이 부여하는 권리를 보장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바로 법의 형평성을 어기고 있다는 게 찬성론자들의 주장. 참정권은 그 특성상 자신의 적극적인 의지나 행동을 통해 권리를 실현하는 것이어서 참가 여부는 개인의 문제인데, 그 제도 자체를 현실적 논리로 반대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의견이다.

    한겨레네트워크 공동 간사인 정지석 변호사(42)는 “OECD 가입국 중 유일하게 우리나라만 재외국민에게 선거권을 부여하지 않고 있다”면서 “우리보다 경제적 여건이 열악한 러시아 태국 대만 알제리 등 대부분의 나라에서 인정하고 있는 재외국민 선거제도에 대해 헌법재판소가 이같이 시대에 뒤떨어진 결정을 한 것은 유감”이라고 말했다.

    재일동포 헌법소원단 대표인 이건우씨는 이번 대선을 앞두고 다시 한번 참정권 문제를 제기하고 나섰다. 지난 3월 이씨를 포함한 재일동포 2세 및 3세 5명은 “국가가 헌법에 규정된 재일동포의 참정권을 박탈하고 이를 장기간 방치함으로써 참정권 등 기본권을 침해하고, 민족적 자긍심을 훼손해 왔다”면서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현재 이 사건은 서울지방법원 민사 49단독에 배당돼 준비 절차가 진행중이다.

    이 문제와 관련해 헌법재판소가 지난 99년 내린 결론 가운데는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스스로 기본권 침해상황을 초래한 유학생이나 상사 주재원과 달리, 국가의 명령을 받고 외국에 파견돼 근무중인 공무원 군인 등에 대해서는 국가가 특별 배려를 해야 한다는 것. 이 내용과 관련, 한겨레네트워크측은 외국 파견 공무원을 청구인으로 한 헌법소원을 준비중이다. 정지석 변호사는 “헌법재판소의 입론 과정에 공감하는 것은 아니지만 결론적으로 재외국민의 참정권을 침해하는 위법 조항에 대해 위헌 결정을 이끌어낼 수 있다면 법 개정 과정에서 폭넓은 논의가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참정권에는 선거권 피선거권 공무담임권 국민투표권 등의 의미가 담겨 있다. 형식적으로는 재외국민에게도 피선거권은 주어져 있지만 사실상 아무 의미가 없는 상황이다. 재외국민 참정권 회복운동은 선거권뿐만 아니라 여타의 권리도 되찾자는 것이다. 94년 유학을 떠나 현재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파리 사무국에 근무하는 옥우석 연구원(34)은 “참정권은 기본적인 권리이므로 정치적 고려 등 현실적인 문제를 떠나 원칙적으로 해결돼야 한다”면서 “두 번이나 대통령 선거에 참가하지 못해 아쉬웠는데 이번에는 꼭 내 권리를 찾아 투표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동안 자신들에게 참정권이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던 재외국민들이 권리 찾기에 분주해진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들이 한국 사회에 관심을 가질수록 그만큼 더 국력은 커질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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