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35

2002.05.23

“여자의 일탈 욕구는 무죄”

유하 감독·신현림 시인 솔직 대담 … “외도에 꼭 이유 있어야 하는가”

  • < 정리=구미화 기자 >mhkoo@donga.com

    입력2004-10-04 14:4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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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자의 일탈 욕구는 무죄”
    여성들이 ‘두 집 살림’을 꿈꾸는 이유는 무엇일까. 영화 ‘결혼은, 미친 짓이다’의 유하 감독(39)과 시인 신현림씨(40)가 결혼과 여성의 일탈에 관해 긴 이야기를 나누었다. 최근 영상에세이 ‘슬픔도 오리지널이 있다’를 펴낸 신현림씨는 시인이기도 한 유하 감독이 마련한 문인 시사회를 통해 영화를 보고, 통쾌함을 느꼈다고 했다. 유하와 신현림, 이들 유부남 유부녀가 결혼제도의 허울을 벗기고 그 실체를 보여준다.

    유하: 사회가 변하고 있어요. 시나리오 작업을 위해 취재해 보니 의외로 들키지 않고 두 집 살림 하는 여자들이 많더군요. 남녀 모두 12세 이후로 누군가를 계속 사랑해 왔는데 적령기가 되어 결혼을 하면서 한 사람만 바라봐야 한다는 건 일부일처제가 가진 태생적 한계지요.

    신현림: 그런데 어느 정도 경제력이 뒷받침되니까 두 집 살림도 가능한 거잖아요. 남편에 대한 큰 불만이 없더라도 나를 좋아하는 다른 사람이 나타나면 연애하고 싶은 여유가 생길 정도로. 호스트바에서 일했다는 사람 얘기를 들었는데 여자들이 그곳에서 즐기는 수준이 상상을 초월하더군요. 말로만 들었지만, 애들도 크고 남편은 일에 몰두할 때 정작 자신을 쏟아낼 곳이 없는 여자들은 방황을 하게 되나 봐요.

    유: 영화 속에서 두 집 살림 하는 연희는 이 시대 여성의 잠재적 욕구를 행동으로 옮긴 거죠.

    신: 두 집 살림 하는 게 요즘은 파격적이라기보다 남녀 누구나 마음속에 가진 일탈의 욕구 같아요. 왜냐하면 현대인의 정신을 공황상태로 몰아가는 요소들이 너무 많잖아요. 불안하고…. 특히 늙는다는 것,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그때그때 자기 감정에 충실하려는 욕구를 크게 만들거든요.



    유: 요즘 여성들이 욕망에 솔직해진 거죠.

    신: 하지만 현실적으로 두 집 살림 하는 사람이 그렇게 많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유: 지금까지 결혼이라는 걸 사랑의 완성이라고 보고, 웨딩마치로 끝나면 해피엔드로 봤잖아요. 그런데 그렇지 않은 게 현실이지요. 결혼은 개인과 개인의 만남이기보다 집안끼리의 결합이고, 집안의 대소사부터 여러 책임이 따르거든요.

    신: 결혼은 현실이지요. 사랑해서 결혼하지만 살다 보면 너무 복잡해지거든. 그런 결혼이라는 제도 자체가 피곤해서 결혼을 미루는 사람들도 많잖아요.

    유: 게다가 한번 결정하면 되돌릴 수 없기 때문에 결혼에 대해 이기적일 수밖에 없죠. 결혼은 보험이기도 하거든요.

    신: 도박이기도 하죠.

    유: 그 도박을 최대한 잃지 않기 위해 가능한 한 조건을 따지는 거죠. 안전하게 베팅하기 위해….

    신: 결혼은 수용생활 같기도 하죠. 결혼이라는 틀에 꽉 막힌 채 그것 말고는 달리 갈 길이 없잖아요. 물론 결혼이 주는 위안도 있겠지만.

    유: 결혼한 여자가 다른 만남을 꿈꾸는 건 여자들도 남자와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이죠. 남자들은 끊임없이 한눈을 팔아요. 여자도 마찬가지예요. 저도 아내가 집에서 미남배우를 보며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을 보면 그것도 다 정신적인 스와핑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우리나라 사람들이 배우자가 외도해도 그냥 살아가는 이유는 결혼의 번잡함이 주는 구속력 때문이죠. 앞으로는 천편일률적인 예식장 결혼이 아닌 간편한 결혼이 보편화되고, 이혼도 쉽게 할 수 있는 그런 제도가 마련되었으면 좋겠어요. 프랑스에는 동거가 꽤 일반화되어 있잖아요. 인격 대 인격으로 만나 사랑을 하고, 사랑이 식으면 헤어져요. 사랑이 식었는데도 계속 서로를 붙잡고 있을 이유가 없거든요.

    신: 그런 다양한 결합 방식이 다음 세대에는 가능할까요?

    유: 가능해져야죠. 인간이 결국은 행복하기 위해 결혼하는 건데, 결혼으로 자꾸 뭔가를 참아야 하고, 고통스럽다면 삶의 질을 떨어뜨리는 거잖아요.

    신: 정말 행복하려고 결혼했는데 실제 행복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많이 못 봤어요. ‘처음엔 사랑해서 결혼했겠지만 `지금은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여자의 일탈 욕구는 무죄”
    유: 예전에는 결혼이 성관계를 합법화하는 의미가 컸어요. 아주 오래 전엔 결혼하면서 비로소 연애를 시작하는 경우도 많았지요. 일면식도 없이 결혼식에서 처음 만나니까요. 하지만 요즘은 모든 게 개방되어 있어 합법적인 ‘성관계를 위해 결혼하는 사람은 드물 거예요. 배타적으로 `성관계는 너희끼리만 해야 한다’고 결정되는 순간 오히려 성적 매력은 날아가 버리거든요. 그래서 불온하지만 은밀한 관계를 가질 때 그 강도는 격렬해질 수밖에 없어요. 인간의 본능이거든요. 이런 결혼제도의 불합리함 때문에 여자의 두 집 살림이 현실적으로 존재한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사실 지금까지는 일부일처제가 아니라 일부다처제가 맞지요. 우리나라처럼 매춘의 장이 열려 있는 곳도 없으니까.

    신: 우리나라의 남녀 결합방식이 좀더 다양해져야 하는데 아직 그렇지 않은 게 문제죠.

    유: 남자들이 외도하는 영화는 많았잖아요. 지금까지 남자는 큰 죄의식을 느끼지 않고 바람을 피워왔어요. 반면 드라마나 영화에서 여자들이 바람피울 때는 도덕적으로 충분한 동기가 있어야 하는 것처럼 그려졌어요. 대부분의 경우 남편이 학대하거나 성적으로 문제가 있지요. 하지만 사실은 그런 것만은 아니잖아요. 여자의 외도가 꼭 이유가 있어야 되는 건 아니지요.

    신: 나이를 먹으니 서글프고, 아기 키우며 특별한 사회활동을 하는 것도 아니어서 그저 갇혀 있다는 느낌만 들 뿐이죠. 남편이야 사회적으로 승승장구하지만. 여성의 소외감을 무시할 수 없어요. 물론 너무너무 건실한 부부도 봤어요.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의외로 많지는 않아요.

    유: 오순도순 살기 위해선 부부간에도 긴장감이 중요해요. 그런데 부부가 되면 긴장감이 사라지는 게 대부분이지요.

    신: 일상이 되니까요.

    유: 결혼하고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면 남자들은 ‘의무방어전’이라는 표현을 써요.

    신: 의무방어전이 뭐죠?

    유: 의무적으로 아내와 관계를 맺는 걸 말하죠. 남자들 중엔 ‘의무방어전’이란 말을 모르는 사람이 없어요.

    신: 여자들도 의무적으로 하는 사람이 꽤 되던데….

    유: 글쎄 그렇다는 거죠. 요즘은 결혼식에 가도 주례사에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이라는 말이 없죠. 평생 함께 사는 것보다 실제로 부부가 긴장감을 어떻게 유지하고 사느냐가 중요하니까요. 그 긴장감을 평생 유지하면 누가 봐도 좋은 부부가 되는 거지만 대부분이 그 긴장감을 잃게 되죠. 그 긴장감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일부일처제가 깨져야 한다고 봐요.

    신: 글쎄 일부일처제가 굉장히 무모하다는 것은 공감을 하는데, 깨지는 건 좀더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유: 반드시 이 시대에 깨져야 한다는 건 아니죠. 굉장히 견고한 제도라서 쉽게 깨지지도 않을 테니까요. 그 전에 사고방식이 바뀌어야죠. 지금 상태에서 사실은 이런 문제의식만 갖고 살아도 생활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거예요.

    신: 외도하는 여자들의 내적 심리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유: 지금까지는 사실 결혼한 여자는 남자에 예속된 존재였고, 우리나라만큼 여자를 무시하는 사회도 없어요. 심지어는 자기 아내가 외도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를 만큼 무관심한 남자도 많으니까요.

    신: 아내의 존재를 마치 공기처럼 지극히 당연하게 여기니까 그렇지요. 여자들에게도 남자들과 똑같은 일탈 욕구가 있다는 걸 이번 기회에 남자들이 좀 알았으면 좋겠어요. 여자가 외도하는 것의 옳고 그름을 따지기 전에 여자들이 외도를 하는 구조적인 원인을 생각해 볼 수 있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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