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31

2002.04.25

‘다섯 살 청년’의 ‘미술관 옆 동물원’

정신지체 장애인 데니스 한 화가 입문 … 재불 조형미술가 심현지씨, 조카 위한 헌신 ‘결실’

  • < 김현미 기자 > khmzip@donga.com

    입력2004-11-01 15: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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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섯 살 청년’의 ‘미술관 옆 동물원’
    이모 : 사슴이 모두 한쪽만 보고 있네. 저쪽도 봐야지 어떻게 이쪽만 모두 보고 있니? 사슴들이 데니스만 바라보나 보지?

    데니스 : 알았어. 그릴게에.

    이모 : 사슴 다리 네 개의 길이가 다 다르네. 이러면 사슴이 넘어지지. 어떻게 해야 돼?

    데니스 : 똑같이 그릴게에.

    이모: 다 잘 그렸는데 하늘 색깔하고 땅 색깔하고 똑같아. 하늘하고 땅하고는 다르지. 안 그래?



    데니스:…(전시회를 기념해 펴낸 책 ‘위드’에서).

    신체연령은 스물다섯, 정신연령은 다섯 살인 데니(재미교포 2세, 본명 데니스 한)와 이모 심현지씨가 동물원에서 보았던 사슴을 그리는 중이다. 이모가 다그쳐 물으면 데니는 시원스럽게 “알았어~” “그릴게에~”라고 대답하지만 사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조차 구분할 줄 못하는 정신지체 장애인이다. 그는 1977년 캘리포니아에서 태어나 생후 1년4개월 무렵 뇌막염을 앓은 후 인지능력이 다섯 살에서 멈추어버렸다.

    ‘다섯 살 청년’의 ‘미술관 옆 동물원’
    그런 데니가 서울 인사동의 번듯한 화랑에서 전시회(갤리러 피쉬 4월1~8일)를 연다고 하자 사람들은 ‘설마’ 했다. 반쯤은 ‘연민’에서 반쯤은 ‘호기심’에서 전시회를 찾았던 사람들이, 그러나 실제 데니의 그림을 보고는 반해버려 서로 사겠다고 경쟁이 붙을 정도였다. 빨간 야구모자와 아이스크림, 목욕과 파티, 거울에 자기 모습 비춰 보기를 유난히 좋아하는 이 천진난만한 청년에게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그림공부를 시작한 지 4년 만의 일이었다.

    98년 7월26일, 21년 동안 태어나고 자란 캘리포니아 주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본 적이 없던 데니는 큰이모가 살고 있는 파리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동생 데보라와 사촌 미라가 동행했다. 30년 넘게 파리에 살고 이는 이모 심현지씨는 유리조형미술 작가다. 그의 대표작으로 여의도 한화증권 유리 모자이크 조형물, 대한성공회 대성전과 소성전 스테인드글라스가 있다. 하지만 98년 데니가 파리에 온 후 자의 반 타의 반 이모의 작업실은 개점휴업 상태다. 대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고 있다. 바로 그림 그리는 데니.

    이모는 처음 세상 구경을 나온 데니의 손을 잡고 파리의 유명한 음악카페로, 콘서트장으로, 박물관으로 부지런히 쏘다녔다. 느긋하게 아침을 먹고 나면 뷔트 쇼몽 공원, 베르사유 숲, 블로뉴 숲으로 산책을 갔다. 저녁에는 고기 재우고 김치 담가 친지들을 초대했고, 때때로 그들의 초대도 받았다. 파리에서의 생활은 데니에게 하루하루가 축제였다.

    ‘다섯 살 청년’의 ‘미술관 옆 동물원’
    축제가 끝나고 집에 돌아온 이모는 데니에게 스케치북을 쥐어주었다. 그리고 본 대로 느낀 대로 즐거웠던 기억을 스케치해 보라고 하자 데니는 5분도 안 돼 쓱쓱 그려냈다. 하지만 그는 공간개념이 없어 사람을 정면밖에 그릴 줄 모른다. 앞으로 나란히 선 채 똑같은 표정에 똑같은 옷차림, 똑같은 크기의 사람들…. 남녀 구분도 할 줄 몰라 누드전시회를 보고 온 날은 벗은 여자 몸에 모두 ‘고추’를 그려 넣어 배꼽을 잡기도 했다. 여기에 오징어처럼 넓적한 손발이 데니의 트레이드마크다. “데니야, 이모가 몇 번 말해야 알겠니? 이렇게 발을 올린 모양이 다 똑같고, 크기도 얼굴도 똑같으면 안 된단 말이야!” 이모의 조바심에도 데니는 딴청만 부렸다.

    ‘다섯 살 청년’의 ‘미술관 옆 동물원’
    이모는 새로운 지도법을 생각해 냈다. 대가들의 그림을 모사하는 것이었다. 일단 고흐부터 시작했다. 그림의 내용은 무거웠지만 색채는 눈부셨다. 다음에는 성경 속 이야기를 모티프로 환상적인 색채를 보여준 샤갈의 그림으로 넘어갔다. 데니의 취약점인 다양한 포즈의 인물상은 마티스의 화집을 놓고 베꼈다. 피카소는 보여줄 필요도 없었다. 데니의 그림은 처음부터 피카소의 그림과 너무 닮아 있었다.

    “파리에 왔을 때 처음 피카소 뮤지엄에 데리고 갔더니 그 자리에서 데니가 ‘이모, 나도 이렇게 그릴 수 있어’라고 하는 거예요. 그때 새삼스레 깨달았죠. 대가들은 늘 완벽을 추구하지만 결국 말년에는 신 앞에 굴복하고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돌아갑니다. 그들의 말년 작품을 보면 꼭 데니의 그림처럼 천진난만해요.”

    그때부터 거꾸로 데니에게 이모가 배웠다. 심현지씨는 파리 유학중 두 아이를 낳았지만 어떻게 길렀는지도 모를 만큼 아틀리에에 틀어박혀 작업에 몰두한 지독히도 이기적인 엄마였다. 다행히 두 남매가 저절로 자라준 뒤 늘그막에 데니와 살면서 그는 넉넉하게 마음 쓰는 법부터 배웠다. “전에는 사람이 싫어서 피해 다녔어요. 아이들이 번잡하게 노는 게 보기 싫어 저희 집으로 초대할 때는 아이를 맡기고 꼭 혼자 오라고 말했죠. 요즘은 정반대예요. 데니가 좋아하니까 꼭 아이들도 데리고 오라고 신신당부해요.”

    데니는 1998년 여름 첫 파리 여행 때는 한 달, 99년에는 4개월, 2000년에는 6개월, 이런 식으로 차근차근 부모와 떨어져 사는 연습을 했다. 요즘은 아예 파리로 거처를 옮겼다. 데니가 고집 부리고 떼쓸 때 가장 쓴 약이 “미국으로 보내겠다”는 말일 정도로 이제는 파리에 적응했다.

    ‘다섯 살 청년’의 ‘미술관 옆 동물원’
    그 사이 데니의 그림 솜씨도 쑥쑥 늘었다. 첫 파리 방문 때는 마커로 스케치만 하더니 두 번째 방문 때는 수채화 물감을 쓰기 시작했고, 네 번째 방문 때부터 캔버스에 아크릴 물감을 사용했다. 이제 피에르 블레즈의 현대음악과 마리아 칼라스의 노래를 들으며 의젓하게 그림을 그린다.

    데니의 그림을 주위 사람에게 한두 점 선물했더니 의외로 반응이 좋았다. 이 정도라면 전시회를 열어야 한다며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 지인들도 있었다. 얼떨결에 전시를 약속해 놓고 이모는 걱정이 태산이었다. 좀처럼 데니의 그림에 속도가 붙지 않았던 것이다. 그림 그리기가 싫어지면 물 먹는다고 부엌을 들락날락하다가 나중에는 자신이 무엇 때문에 부엌에 왔는지조차 잊어버리고 멍하니 서 있는 데니를 볼 때마다 이모는 가슴이 탔다.

    그러나 남 보기에는 더딘 것 같아도 데니는 조금씩 발전했다. 3년 전 몽파르나스역 앞에서 본 회전목마를 지금도 빙글빙글 돌아가는 듯 실감나게 표현했고(회전목마), 센 강에 반사된 에펠탑은 두둥실 떠내려갈 것 같다(‘센 강물에 떨어진 에펠탑’). 여름 밤 음악카페의 풍경은 서커스처럼 신이 난다.

    4월 장애인의 달에 맞춰 서울에서 열린 전시회는 대성공이었다. 벽에 걸린 서른두 점의 그림이 순식간에 팔렸다. 데니는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1500만원이라는 거금을 벌었다. 미국으로 이민해 좀더 나은 생활을 위해 고생했지만 큰아들의 병 때문에 기쁨이란 것을 잊고 지냈던 데니의 어머니는 고국 땅에서 활짝 웃을 수 있었다. 아니, 쏟아지는 플래시 세례를 받으며 의젓하게 포즈 잡는 아들을 보며 오히려 울음을 감추느라 이를 악물어야 했다.

    며칠 뒤면 데니의 생일이다(4월23일). 꼭 스물다섯이 된다. 하지만 시간개념이 없는 그에게 나이란 암기해야 할 숫자일 뿐이다. 남들이 성큼성큼 어른이 될 때 데니는 굼벵이처럼 더디게 자란다. 대신 언제나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살며 자신이 소유한 단순한 행복을 세상 사람들에게 선물하는 화가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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