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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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먹고 끝내는 ‘위원회’ 뭐 하러 여나

취지 퇴색 대부분 ‘유명무실’… 행정 책임 면제, 일부 지자체선 정치에 악용

  • < 김진수 기자 > jockey@donga.com

    입력2004-11-01 15: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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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밥 먹고 끝내는 ‘위원회’ 뭐 하러 여나
    ”딱한 번 회의에 참석할 기회가 있었을 뿐, 전공한 지식을 제대로 활용할 여지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그냥 회의 잠깐 하고 위원끼리 밥 한 끼 먹고 끝나는 판이다. 위원 역할에 회의마저 든다.”

    모 중앙부처 관할 위원회의 위원인 서울 D대 A교수는 정부의 위원회 제도 운영에 강한 의구심을 품는다. 그는 “수년 전에도 서울 시내 몇몇 구청의 위원회 위원으로 위촉된 적이 있으나 모두 회의 한 차례 열지 않았다”며 “자치단체장이 바뀌면 흐지부지되는 위원회 조직도 많다”고 지적한다.

    24.5% 1년간 한 번도 소집 안 해

    행정 정보 및 자료 공유, 폭넓은 주민여론 수렴 등을 위해 각종 정책결정 과정에 민간 전문인력을 참여토록 한 것이 위원회 제도의 요체. 그러나 이런 위원회 대부분이 이름만 걸어놓고 활동은 거의 없어, 유명무실한 위원회 운영에 메스를 들이대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행정자치부에 따르면 전국(중앙부처 위원회 제외)의 각급 위원회는 2000년 말 기준으로 1만509개(2001년 통계는 집계중). 이는 서울(50개), 부산(62개), 대구(71개), 인천(73개), 광주(82개) 등 특별(광역)시ㆍ도의 위원회(1177개)와 일선 시ㆍ군ㆍ구 위원회(9332개)를 모두 아우른 수치로, 99년 말 1만461개보다 0.5% 증가한 것. 전국 지자체 수가 248개이므로 단순히 산술평균해도 한 지자체당 42개에 이를 정도다. 위촉된 위원 수만도 14만2972명이나 된다.



    정책결정의 민주성 확보란 위원회 제도의 취지로만 본다면 위원회 수가 많다고 무조건 탓할 순 없다. 비용 측면에서도 마찬가지다. 위원회 수만 가지고 종종 예산 낭비가 아니냐고 지적하지만, 대다수 위원회 성격이 별도 인력과 사무실을 갖추지 않은 자문ㆍ심의위원회인 데다 회의 참석 때 위원에게 지급되는 수당도 회당 5만원에 그쳐 예산 낭비란 지적은 난센스에 가깝다.

    문제의 본질은 위원회 제도가 ‘운용의 묘’를 살리지 못하는 데 있다. A교수의 체험에서 보듯 상당수 위원회들이 형식적으로 운영된다. 시민단체인반부패국민연대가 지난해 12월14일 연 ‘위원회 실태연구 발표회’에서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중앙부처와 지자체 등 전국 209개 기관(설문에 응답한 기관의 수)에 설립된 위원회 5977개 중 1516개(24.5%)가 1년간 단 한 번도 회의를 소집하지 않았다. 반부패국민연대는 발표회 당시 위원회의 대폭적인 통폐합과 기능 조정이 절실하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무늬’뿐인 위원회들이 난립하는 것일까. 이는 각 부처나 지자체의 개별 법령과 조례들이 관련 위원회 설립을 강제하거나 의무화한 것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자문ㆍ심의 기능을 위한 위원회를 설립해야 하거나 설립할 수 있다는 관련 규정을 두기 때문에 위원회 신설이 계속될 수밖에 없는 것.

    “정비를 안 하는 게 아니다. 하지만 신규 업무 추진과 행정 여건 변화로 새롭게 필요성이 제기되는 위원회도 많아 일률적으로 정비하긴 곤란하다.” 행자부 자치제도과 관계자는 “지자체들이 위원회 기능과 필요성을 충분히 사전 검토하지 않고 기능이 유사한 위원회를 자꾸 신설하는 것도 위원회 난립의 큰 원인”이라 털어놓는다.

    행자부는 매년 초 각 지자체에 설립 목적을 달성했거나, 기능이 중복되고, 몇 년간 한 번도 회의를 열지 않아 명목상의 운영에 그치는 등 실효성 없는 위원회를 정비하라는 운영지침을 내려 정비 결과를 지자체 종합평가에 반영한다. 그러나 권고 수준에 그쳐 실질적인 위원회 ‘감량’ 효과는 미미하다. 더욱이 법령 등에 설립 근거를 둔 만큼 위원회가 ‘자연사’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실제로 행자부의 ‘시ㆍ군ㆍ구위원회 정비 현황’을 보면 일선 지자체들이 99년 6월부터 2000년 12월까지 폐지한 위원회는 1045개인 반면 신설 위원회는 1106개로 61개가 더 많다. 98년 위원회 정비 열풍이 대대적으로 분 이후에도 사정은 그대로다.

    그렇다면 위원회 난립이 가져오는 문제점은 뭘까. 제도 자체의 취지는 좋다 하더라도 실제 활동 없이 명맥만 잇는 ‘빈 껍데기’ 위원회의 난립은 여론 수렴 등 본래 기능을 크게 퇴색시킨다. 또한 하위직 공무원들까지 위원회 운영에 동원시킴으로써 행정의 효율성을 침해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연세대 유평준 교수(행정학)는 “(각종 사업 등을 평가 분석하는) 평가위원회 등 목표가 뚜렷한 위원회는 별문제가 없지만, 자치단체장들이 지자체 비전(Vision)과 관련한 특별위원회 등을 임기중 급조해 선거 기반으로 활용하는 등 정치적 목적으로 악용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고 강조한다.

    위원 구성에도 문제는 있다. 지자체에 따라선 ‘겹치기 위원’들이 적지 않다. 아직 제대로 조사가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위원회 참석 경험이 많은 인사들에 따르면 한 사람이 여러 개 위원회의 위원으로 중복 위촉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 이런 사정은 지자체 관할 위원회일수록 훨씬 심하다. 아직 국내에 이렇다 할 전문인력 풀(pool)이 없다시피 한 현실과도 무관하지 않은 셈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회의에 참석하면서도 미리 관련 내용을 전달받지 못하고 자신이 어느 위원회 회의에 참석하는 것인지조차 헷갈리는 위원들까지 있다는 게 행자부측의 귀띔이다. 자연히 위원회 회의에선 ‘겉핥기’식 조언이 난무할 수밖에 없다.

    밥 먹고 끝내는 ‘위원회’ 뭐 하러 여나
    또 다른 문제는 위원회의 격(格)이 지나치게 높은 사례가 많다는 점. 관련 업무의 성격이 여러 국(局)에 걸치지 않을 경우 실무자인 국장을 위원장으로 하면 행정의 효율성을 한층 높일 수 있는데도 굳이 대외적으로 ‘모양새’를 갖추려 업무 특성을 속속들이 알지 못하는 장ㆍ차관을 위원장으로 삼는 경우가 빈번하다. 행자부 조직정책과 관계자는 “이런 식의 위원회 운영은 정책 결정에 대한 기관장의 책임을 분산시키고, ‘여론수렴 절차를 거쳤다’는 명분을 쌓기 위한 ‘책임 회피용’이란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며 “행자부 내에서도 이 문제에 관한 개선 방안 마련을 심도 있게 논의하는 중”이라고 답했다.

    위원회 부실을 사전에 막으려면 개별 법령에 위원회 설립 근거 규정을 마련할 때부터 위원회 난립 방지를 염두에 둬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법제처 법제관 출신의 한 법제전문가는 “개별 법령 입법 과정에서 관련 위원회의 성격을 명확히 규정해 운영의 내실을 도모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끊임없이 명멸하는 ‘위원회의 나라’ 한국. 어쩌면 ‘위원회 구조조정을 위한 특별위원회’가 설립될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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