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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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제 “휴~ 길이 안 보여…”

“승부 초월 끝까지”… 경선 완주 뜻 밝혔지만 ‘중도개혁신당’ 얘기도 솔솔

  • < 정용관/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 >yongari@donga.com

    입력2004-11-01 14: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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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인제 “휴~ 길이 안 보여…”
    민주당 대통령후보 전남 지역 경선이 치러진 4월14일 오후 6시경 전남 순천 팔마체육관.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회원들의 “노무현 대통령” 연호를 뒤로한 채 이인제 후보는 착잡한 표정으로 승용차에 올랐다.

    노무현 후보 1297표, 정동영 후보 340표(16.3%), 이인제 후보 454표(21.7%). 개표 결과를 발표하는 김영배 중앙당 선관위원장의 독특한 억양이 계속해서 귓전을 울렸다. 이로써 노후보와의 종합 득표 격차는 1512표로 벌어졌다.

    전혀 예상치 못한 결과는 아니었다. 이인제 후보의 일부 측근은 ‘슈퍼 3연전’으로 불렸던 대구 인천 경북 경선에서 모두 패한 뒤 “차라리 전남에서 장렬하게 산화하자”고 건의하기도 했다. 이기지 못할 바에야 확실하게 져 호남이 노무현 후보를 밀고 있다는 것을 부각하자는 의도였다.

    이인제 “휴~ 길이 안 보여…”
    그럼에도 이인제 후보는 “한나라당은 틀림없이 노후보가 ‘DJ(김대중 대통령)와 호남이 내세운 꼭두각시다’고 공격할 것이다. 만약 한나라당이 호남 후보를 내세우면 호남에서 표를 주겠느냐. 영남후보론은 성공할 수 없는 전략이다”고 선거인단을 설득했다.

    그러나 역시 이변은 없었다. 서울로 오는 5시간의 긴 여정 동안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크게 두 가지였을 것이다. 경선에 계속 참여할 것인가, 경선에서 패배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날 밤 이후보의 서울 자곡동 자택. 김기재 이희규 의원, 김윤수 공보특보 등이 기다리고 있었다. 밤 11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이 자리에서는 ‘경선 중단’ 얘기가 또 조심스레 나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이후보는 “걱정하지 마라. 나는 큰 정치를 할 것이다”고 경선 완주 의지를 밝혔다고 김특보는 전했다.

    이튿날인 15일 이후보는 아침 일찍 자택을 나서 경기 지역 지구당 11곳을 순회하는 강행군을 펼쳤다. 표정도 밝아 보였다. 이후보는 자신의 정치적 고향인 경기도에서의 ‘정치적 부활’을 내심 기대했을까.

    그러나 이후보 스스로도 “승부를 초월했다”고 말한다. 그는 기자들과 만나 “이제 득표율에 연연하지 않는다. 다만 당의 중도개혁 노선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노선투쟁을 계속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중권 후보가 사퇴한 지난 3월25일 “이미 정해진 게임에 들러리를 설 수 없다”며 경선 포기까지 검토했고, 또 “경선 판을 깼다는 비난이 쏟아질 것”이라는 측근 의원들의 만류에 단기필마를 선언하며 경선에 복귀한 그였기에, 이 같은 경선 완주 의지는 오히려 의아하게 느껴질 정도다.

    한 측근은 이와 관련해 “이후보는 당내 경선 차원을 넘어 국민을 상대로 한 큰 정치를 하고 있다. 국민의 가슴속에 중도개혁 노선의 씨앗을 뿌려놓으면 언젠가 싹틀 기회가 오지 않겠느냐”고 ‘씨앗론’으로 해석했다. 경선 완주를 통해 97년 신한국당 경선 불복의 원죄를 깨끗이 씻고 후일을 지켜보자는 것이다.

    그의 표현대로 대선 때까지는 8개월이 남았다. 그 기간에 정국이 어떻게 요동칠지는 아무도 예측하기 어렵다.

    이인제 후보는 과연 어떤 구상을 하고 있을까. 그는 최근 지구당 간담회에서 ‘노무현 후보가 당의 대선후보로 결정되면 지원할 것이냐’는 물음을 받을 때마다 “탈락한 사람은 자기 노선과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면 된다. 나는 당이 중도개혁을 통해 집권할 수 있도록 기여하면 된다”고 말해왔다. 노후보를 위해 직접 지원 유세하는 일은 없을 것이나 당의 재집권을 위해 기여하겠다는 알쏭달쏭한 얘기다.

    그는 그러면서 ‘노후보가 정계개편을 추진할 경우 함께 행동할 수 있느냐’는 물음에는 “노후보와는 이념 노선이 많이 다르기 때문에 같이할 이유가 없다”고 잘라 말한다. 요컨대 당의 중도개혁 노선을 지켜 나가되 노후보가 정계개편을 추진하면 그것을 기회로 갈라설 수 있음을 분명히 한 것이다. 이후보가 중도개혁 노선을 주장하며 노후보와 이념적 차이를 부각하는 것은 나중의 결별 상황까지 염두에 둔 사전정지 포석인 듯하다.

    이와 관련해 이후보 진영 일각에선 ‘중도개혁정당’ 결성 추진 얘기도 나온다. 노후보가 주장하는 정계개편에 맞서 민주당 일부 세력과 자민련, 박근혜 정몽준 의원까지 합쳐 중도와 보수를 아우르는 정당을 결성한다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중부권 신당’ 결성 추진 가능성도 있다. 경기 충청 강원 등을 아우르는 중도개혁 색채의 신당을 결성, 대권을 준비하든지 캐스팅보트 역할을 한다는 관측이다.

    그러나 거론되는 인사들의 셈법과 목적이 모두 다르기 때문에 두 가지 방안의 실현 여부에 대해서는 회의적 시각이 많다. 특히 자민련 김종필 총재가 어떤 구상을 하고 있는지가 관건이다.

    이인제 “휴~ 길이 안 보여…”
    또 노무현 후보 진영에서는 민주당을 정책 중심 정당으로 확대 개편하되 여기에 ‘지역화합론’을 결부시킨다는 전략이 나오는 등 상황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최악의 경우 이인제 후보만 ‘미아’로 남을 가능성도 있다는 얘기다.

    이인제 후보는 최근 SBS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노후보가 당 대선후보가 되면 이후보는 다른 당 후보로 나온다는 얘기가 있다’는 질문을 받고 일단 “그런 생각은 꿈에도 하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대선에 나오지 않는다고 단정해도 되나’라는 질문에는 “후보가 되지 않는다면 대선후보로 나온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다”고 답했다.

    이런 차원에서 이후보가 지방선거에서 당의 승리를 위해 헌신하는 모습을 보일 때 활로가 생길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일부 측근 의원들이 “경선에서 질 경우 깨끗하게 패배를 인정한 뒤 당의 지방선거 승리를 위해 온몸을 바치는 ‘아름다운 패자’의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말하는 것도 그런 맥락이다.

    반면 한 핵심 참모는 이후보가 패배할 경우 ‘미국행’을 건의할 것이라고 했다. 6·13 지방선거가 끝날 때까지 국내 정치에서 한걸음 떨어져 있다 보면 지방선거 결과에 따라 이인제를 필요로 하는 상황이 조성될 수 있다는 것이다.

    현재로서는 이인제 후보가 어떤 길을 갈지 속단하기 어렵다. 그만큼 정국 상황이 유동적이기 때문이다. 가장 큰 문제는 이후보가 경선에서 패배할 경우 자신이 정국을 주도하기 힘들다는 데 있다. 이후보의 고뇌가 갈수록 깊어지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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