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29

2002.04.11

“재산 보호 위해 아내 때려도 된다고?”

인도 가정폭력 방지법안 여성단체 강력 반발… 가부장제 심화 女權 보호 입법취지 실종

  • < 이지은/ 델리 통신원 > jieunlee333@hotmail.com

    입력2004-10-27 14:4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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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산 보호 위해 아내 때려도 된다고?”
    북어와 여자는 사흘에 한 번씩 패라’는 말이 비단 한국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전통사회에서 여성은 온갖 폭력과 권위적인 억압의 대상이 되어왔다. 근대 이후 인권에 대한 자각이 퍼지면서 여성의 인권을 보장하는 입법이 진행돼 왔지만 여성에 대한 폭력은 여전히 잔존한다.

    가정폭력 문제가 특히 심각한 지역을 꼽으라면 인도가 빠지지 않을 것이다. 인도 정부의 자료에 따르면 지난 한 해 동안 일어난 가정폭력 사건은 5만건이 넘는다. 이는 단순히 보고된 건수만 집계한 것이므로 실제 상황은 더욱 심각할 것으로 추측된다. 한 여성인권단체가 북인도 알라하바드 지방의 여성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66%의 여성이 폭력을 가정생활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인다는 반응을 보였다. 또 폭력을 당한 여성의 65%는 학대의 원인이 결혼지참금 문제에 있다고 답했으며, 딸을 낳았다는 이유로 학대당했다고 답한 여성도 43%나 되었다. 비정부기구인 ‘전인도 여성회의’의 아파르나 바수 의장도 ‘타임스 오브 인디아’지와의 인터뷰에서 “인도의 여성문제 중 가장 심각한 것은 가정폭력”이라고 말했다.

    지금 인도에서는 가정 내 폭력으로부터 여성을 지키기 위한 ‘가정폭력 방지법’이 마련되어 입법 절차를 밟고 있다. 이 법안이 의회에 상정된 것은 의미심장하게도 세계 여성의 날인 지난 3월8일. 지금까지 여성을 대상으로 하여 가정 내 폭력을 근절하기 위해 제정된 법률이 전무했던 것을 생각하면 이 법안은 인도 여성계가 이룬 쾌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실제로 여성위원회가 가정폭력 방지법을 처음 마련한 것은 1994년이었다. 그 후 많은 여성단체가 정치권에 로비 활동을 하며 이 법안의 입법을 학수고대해 왔다. 그러나 정작 법안이 의회에 제출되고 그 내용이 공개되자 ,여성위원회를 비롯한 여성단체들은 실망과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이 가정폭력 방지법은 ‘남성이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아내를 구타하는 것은 가정폭력이 아니라 재산권 보호에 해당하는 행위’라거나 처벌 대상을 ‘습관적’ 폭력에만 국한하는 등 각종 어처구니없는 조항들을 포함시키고 있다. 가정폭력 방지법의 내용은 전통적인 가부장제를 더욱 확고하게 할 뿐, 여성을 가정폭력으로부터 보호하고 가정 내에서 여성의 권리를 보장한다는 본래 취지를 전혀 살리지 못한다는 것이 여성운동가나 법률가들의 공통된 견해다.

    현재 법안에 대한 여성계의 반대는 크게 몇 가지 사항으로 요약할 수 있다. 먼저 법안에 제시된 가정폭력의 정의가 진부하며, 물리적 폭력만 의미할 뿐 정신적·성(性)적 폭력은 포함하고 있지 못하다는 점이다. 폭력이 ‘습관적’인 것이어야 한다는 내용의 명시는 이와 같은 특징을 잘 보여준다. 다음으로는 이 법안이 폭력을 일부분 정당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법안에 따르면 ‘경미하거나 중간 정도의’ 폭력은 처벌 대상이 될 수 없으며, 남성의 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폭력도 재산권 보호 측면에서 인정된다. 법조인 기구인 ‘변호사 공동체’의 인디라 자이싱은 “인간에 대한 보호보다 재산 보호를 우선시하는 조항은 그야말로 충격적인 것”이라고 말했다.



    이 밖에도 폭력행위를 신고한 여성이 안전한 거취를 보장받지 못하는 점, 아직도 근절되지 않은 일부다처제로 상당수에 이르는 ‘불법적 아내’들을 보호할 수 없는 점, 불명확한 어휘의 사용으로 법조항의 자의적 해석이 가능한 점 등이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여성문제 주무부서인 인적자원개발부가 상정한 법률 초안을 보면 이 법률의 취지가 어떻게 흐려졌는지 명백하게 드러난다. 인적자원개발부에 따르면 이 법률은 ‘전통적인 가족생활을 보장하는 한편, 가정폭력의 희생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입안되었다. 현재의 법률안은 ‘전통적인 가정의 조화와 여성의 인권을 동시에 보장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라는 것이 이 부처의 공식 입장이다. 게다가 인적자원개발부는 초안 작성을 하면서 여성계의 의견을 전혀 수렴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의회 내 여성위원회에도 자문 요청을 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빈축을 사고 있다.

    인적자원개발부가 말하는 ‘전통적인 가정의 조화’는 남성단체들의 주장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많은 남성 우월주의 단체들 역시 이 법안에 반대하고 나섰는데, 이들 주장의 핵심은 전통가정의 보호와 여성에 의해 희생되는 남성의 보호로 요약된다. ‘남성권 보호기구’는 이 법안이 남성을 표적으로 삼고 있으며, 가정을 파괴할 것이라고 주장하며 폐지를 요구했다. ‘여성의 남성에 대한 범죄 반대모임’은 1만3000여명을 동원해 반대시위를 주도하기도 했다. 또한 이들은 결혼지참금을 요구하며 여성에게 정신적·신체적 학대를 가한 남편과 시가(媤家) 가족을 징역에 처할 수 있도록 규정한 현행 형법만 가지고도 가정폭력 문제는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지참금 문제가 가정폭력의 가장 큰 원인이 되는 것은 사실이나, 현행 형법만으로 모든 가정폭력 문제를 다 다룰 수 없음은 명백하다.

    의회의 일정상 이 법안에 대한 본격적 심의는 4월 중순 이후 시작될 예정이다. 인도 여성계는 현재 반대 여론을 조성하기 위한 대책 마련에 분주하다. 우선 수도인 뉴델리에 본부를 둔 15개 여성단체가 연대해 가정폭력 방지법안에 대한 반대성명을 발표했다. 샤바나 아즈미, 레누카 초다리를 비롯한 진보적 성향의 여성 의원들도 여성 운동단체에 동조해 법률안 개정을 주장하고 나섰다.

    가정폭력은 인도의 적지 않은 가정에서 여성들을 나락으로 몰아가고 있다. 가정폭력 방지법의 입안은 이 같은 여성들을 구하고 폭력을 근절하는 첫걸음이 돼야겠지만, 현재의 법안이 과연 그 역할을 다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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