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20

2002.01.31

‘영화의 전설’이 되련다, 레디~ 액션!

올 한국영화 절반 신인감독 데뷔작 … 신선한 감각 수혈 가능성만큼 위험도 커

  • < 신을진 기자 > happyend@donga.com

    입력2004-11-10 13: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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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7년 ‘그는 나에게 지타를 아느냐고 물었다’는 영화로 감독 데뷔를 한 구성주씨는 어느 인터뷰에서 “영화감독이 되는 길은 부처가 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끝없이 참고, 자비심을 가지고 자신과 현장을 이끌어가야 한다”고 말했다.

    최저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연봉을 감수하며 연출부나 조감독으로 ‘박박’ 기는 몇 년간의 생활에서부터, 시나리오를 들고 제작자를 찾아다니며 번번이 거절당하고, 영화적 감성이나 안목도 없고 사업적인 원칙도 없는 제작자와 투자자에 맞서 싸우고(아니, 일방적으로 당하고), 부모님께 손 벌리고 친구들한테 빌려 모자란 제작비를 충당해야 했던 일은 영화감독이 되고자 하는 이들이라면 으레 거쳐야 하는 ‘통과의례’ 같은 것이었다.

    그로부터 불과 몇 년이 흐른 지금, 상황은 많이 달라졌다. 그전까지 영화감독이 되는 길은 충무로에서 장인 형태의 훈련을 쌓는 것이 유일한 방식이었지만, 영화산업으로 흘러 들어온 막대한 자본은 신인감독에게 앞다퉈 메가폰을 쥐어주었고 젊은 제작자들은 충무로의 도제시스템 밖에서 성장한 감독들을 선호하게 됐다.

    지금은 한 해에 제작되는 한국 영화의 절반 정도가 신인감독의 ‘입봉작’(데뷔작)일 정도로 신인감독을 향한 충무로의 구애 작전이 거세다. 제작자들이 이들에게서 발견하는 것은 ‘새로움’이다. 신인감독과의 작업에 적극적인 영화사 명필름의 심재명 대표는 “신인감독들의 젊은 생각과 아이디어를 높이 산다. 신인감독의 경우 리스크가 큰 만큼 가능성도 크다. 처음 영화를 만드는 데서 발생하는 에너지, 열정, 재능은 기존 영화와 다른 새로운 영화의 탄생을 예고한다. 어설프고 매끄럽지 못한 부분이 있더라도 제작사가 잘 끌어주면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올해 첫 장편영화를 세상에 선보이는 수많은 신인감독의 면면을 보면 조감독 출신에서부터 영상원·영화아카데미 출신, 독립영화 출신, CF감독 출신, 영화프로듀서 출신 등 영화감독이 되는 길이 무척 다양해졌음을 알 수 있다. 공통점이 있다면 대부분 자신이 직접 쓴 시나리오로 영화를 찍고 있다는 점. 제작자들의 눈을 번쩍 뜨이게 할 ‘기막힌’ 시나리오는 감독이 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영화사 사무실로 매일 수편의 시나리오가 답지한다. 신인감독의 경우 검증된 것이 없기 때문에 시나리오의 완성도로 자질을 평가한다. 지금은 영화제작 시스템이 과학화·체계화돼 있어 현장 경험이 전혀 없어도 좋은 시나리오만 있으면 감독이 될 수 있다.” 영화사 봄 기획실 변준희 팀장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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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물다섯 살, 이제 막 대학을 졸업했을 나이에 영화감독이 된 조의석씨도 수년 동안 단편영화를 만들다 올해 송승헌 주연의 영화 ‘일단 뛰어!’로 장편 데뷔를 하게 됐다. 영상원 최연소 합격생으로 신문에도 났던 그는 영상원 졸업작품인 범죄영화 ‘판타 트로피칼’로 일찌감치 ‘될성부른’ 나무로 ‘찍혔다’.

    ‘저수지의 개들’의 쿠엔틴 타란티노처럼 자유롭게 장르를 변주하고 독특한 화면기법으로 스타일리시한 영화를 만들고자 하는 그가 선택한 첫 장편영화 ‘일단 뛰어!’는 10억원이 든 가방을 주운 세 고교생과 그들을 쫓는 형사가 벌이는 해프닝을 그린 코믹액션영화.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질주하는 주인공들의 모습에서 20대 감독다운 에너지가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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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대 감독은 또 있다. ‘해적, 디스코왕 되다’의 김동원 감독(28). 이 영화 역시 코미디지만 김감독은 80년대 달동네를 배경으로 한 복고적 코미디로 출사표를 던졌다. 98년 학교를 졸업하고 재작년 봉준호 감독의 영화 ‘플란다스의 개’에서 연출부 생활을 한 것이 현장 경험의 전부. ‘해적…’은 졸업작품이었던 26분짜리 단편을 스승인 강한섭 교수가 눈여겨보게 되면서 장편 시나리오로 다시 태어났다.

    “아직 젊어서 그런지 부담감은 별로 없다. 그냥 ‘쌈마이’처럼 신나게 가려 한다. 어설픈 거, 지루한 건 못 참는다”고 말하는 김감독은 ‘해적…’을 ‘대사보다 몸짓과 비주얼이 앞서는 퍼포먼스 같은 느낌의 코미디’라고 설명한다. 달동네에 살던 세 소년이 디스코 경연대회에서 우승하기까지의 과정을 그린 ‘엉뚱한’ 영웅담은 색다른 코미디의 탄생을 기대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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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영화에선 별로 시도되지 않던 호러, 스릴러를 선택한 이들도 있다. ‘하얀 방’의 임창재 감독(38)은 오랫동안 실험영화 작업을 해오다 부상한 인물. ‘눈물’ ‘아쿠아 레퀴엠’ ‘정화되는 밤’ 등 독특한 비주얼이 살아 있는 영화로 국내외 영화제에서 좋은 평가를 받아온 그는 정통 호러를 표방한 영화 ‘하얀 방’으로 올 여름 극장가에 데뷔한다.

    “여성들이 떠안을 수밖에 없는 결혼이나 가족과 같은 보편적 제도의 문제를 초자연적 현상들을 통해 되짚어보려고 한다”는 임감독은 현실과 비현실이 뒤섞인 듯한 이미지와 음악을 통해 보이지 않는 공포를 전달할 예정. ‘햐얀 방’은 유령 사이트에 접속했다 죽어가는 여자들의 이야기로 이은주, 정준호가 주연을 맡아 현재 촬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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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들에 비하면 ‘H’의 이종혁 감독(36)은 충무로 경험이 많은 편이다. 영화 아카데미 출신인 그는 박광수, 박종원 감독의 조감독 출신으로 오랫동안 감독 데뷔를 준비해 왔다. ‘인텔리전트 스릴러 무비’를 표방하는 ‘H’는 ‘양들의 침묵’이나 ‘세븐’처럼 스토리, 영상, 캐릭터의 삼박자를 고루 갖춘 완성도 있는 스릴러영화를 지향한다. “시나리오의 흡인력이 대단하고 ‘텔미 썸딩’보다 훨씬 낫다”는 것이 시나리오를 본 사람들의 전언. “원래 스릴러물을 좋아했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관객과 두뇌게임을 벌이면서, 고도의 지능범과 형사가 벌이는 치열한 심리전에 집중할 생각”이라는 이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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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성 감독들의 영화도 눈에 띈다. 명필름에서 제작하는 ‘버스, 정류장’의 이미연 감독과 ‘질투는 나의 힘’의 박찬옥 감독은 이정향 감독(‘미술관 옆 동물원’), 정재은 감독(‘고양이를 부탁해’)의 뒤를 이어 충무로의 기대주로 첫손에 꼽히는 여성 감독들.

    프랑스에서 영화연출을 공부하고 돌아와 ‘조용한 가족’ ‘반칙왕’의 프로듀서로 활동한 이미연 감독(38)은 32세 남자와 17세 여고생의 특별한 사랑이야기를 감독 데뷔작으로 골랐다. 현재 촬영을 끝내고 후반 작업중인 이감독은 “여성이어서 특별히 힘들 건 없지만, 남성 감독보다 어쩔 수 없이 마이너리티(소수)에 가까운 소재와 시선을 내면화하게 된다”고 말한다. “프로듀서 경험은 영화와 돈의 연관성을 고민하게 했다. 나 좋자고 영화 하는 건 죄악이 아닐까 생각한다. 영화에 돈 댄 사람들에게 ‘민폐’ 끼치지 않았으면 하고, 관객들에게도 소중한 시간을 선사할 수 있길 바란다.”

    ‘영화의 전설’이 되련다, 레디~ 액션!
    홍상수 감독의 영화 ‘오!수정’의 조감독이었던 박찬옥 감독(34)은 기형도 시인의 ‘질투는 나의 힘’을 읽고 장편 데뷔작 시나리오를 썼다. 20대 후반, 자신을 인정할 수도, 아직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도 못하는 ‘질풍노도’의 상태에 있는 남자가 영화의 주인공. “멜로라기보다는 인물의 심리가 중심이 되는 드라마”라고. 옛 애인을 빼앗은 유부남에게 새 애인마저 빼앗길 위기에 처한 청년. 그의 질투와 선망의 행로를 따라 인생의 아이러니를 섬세하게 그려간다.

    경력도 장르도 모두 다르지만, 수많은 ‘연습게임’을 거쳐 본 경기의 출발선상에 서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 이들의 모습은 새로운 희망과 설렘으로 가득하다. 스크린에 투사되는 이미지를 통해 관객과 만날 그 짧은 순간을 위해 이들은 자신의 생을 아낌없이 던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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