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07

2001.11.01

뉴욕 방송사들 백색테러 공포에 ‘벌벌’

앵커 노린 탄저균 편지 공격 잇따라 … 의사당처럼 문닫을 수도 없고 전전긍긍

  • < 김재명/ 분쟁지역 전문기자 > kimsphoto@yahoo.com

    입력2004-11-16 15: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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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욕 방송사들 백색테러 공포에 ‘벌벌’
    뉴욕시가 탄저균 생화학 테러 공포에 떨고 있다. 뉴욕 중심가인 맨해튼에 자리잡은 대형 방송사 앵커(뉴스 진행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탄저균이 발견되었고, 조지 파타키 뉴욕 주지사 사무실이 탄저균에 오염됐다는 조사결과가 나왔다. 우편물을 통한 탄저균 공격이 뉴욕의 언론사에 집중된 것은 이번 사건의 한 특징이다. NBC, ABC, CBS 등은 뉴욕뿐 아니라 전 미국에 영향력 있는 방송매체다. 그런 방송사의 뉴스 진행자를 과녁으로 삼은 것은 테러 파급 효과를 극대화하려는 노림수가 들어 있다.

    9·11 테러참사를 지켜본 뉴욕 시민들이 느끼는 테러 공포에 대한 체감지수는 매우 높다. 여러 조사결과를 보면 시민의 70% 이상이 제2의 테러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로버트 뮐러 미 연방수사국(FBI) 국장은 기자회견을 통해 “지금껏 수만 명이 검사를 받았지만, 단지 6명만 양성반응자로 판명됐다”며 시민들을 안심시키려 애쓰는 모습이다. 그러나 생화학 테러 공포는 이미 뉴욕 시민 사이에 상당히 퍼진 모습이다.

    뉴욕 방송사들 백색테러 공포에 ‘벌벌’
    듀란리드는 맨해튼에 있는 대형약국 소매 연쇄점이다. 몇 군데를 들러보니 탄저병 치료약으로 유일하다시피 한 시프로(Cipro) 정제가 불티나게 팔려 지금은 거의 재고가 바닥난 상태다. 독일산 수입품인 시프로는 의사 처방이 있어야 구할 수 있는 약이다. 뉴욕시 보건당국은 시민들이 불안심리 속에 너도나도 시프로를 사들이자, “마땅한 이유가 없는 한 함부로 처방전을 내주지 말라”고 의사들에게 공문을 보냈다. 난데없는 생화학 테러 공포에서 비롯된 특수경기를 맞이한 독일 바이엘사는 최근 시프로 생산량을 3배 늘리겠다고 발표했다.

    뉴욕 방송사들 백색테러 공포에 ‘벌벌’
    맨해튼 남쪽 차이나타운 가까이에 있는 한 군용품 전문점은 방독 마스크 특수를 누리고 있다. 이 가게는 군복 패션이나 등산장비 등을 주로 팔아왔다. 그러나 최근 탄저균 테러사건을 겪으면서 부쩍 바빠졌다. “9·11 테러참사 뒤 1000개가 넘는 방독 마스크를 팔았다”는 가게 주인 케리 휴고는 싫지 않은 표정이다. 이 가게에서 가장 인기 있는 제품은 130달러짜리 이스라엘 제품이다.

    요즘 뉴욕시 당국은 잇단 탄저병균 테러로 바짝 긴장한 상태다. FBI, 질병통제예방센터(CDC), 뉴욕시 경찰국·소방국 요원들로 구성된 합동검색반은 10월15일과 16일 이틀간 시내 주요 언론사에서 탄저균 침투 여부에 대한 일제 조사를 실시했다. 뉴욕 시민의 식수를 공급하는 업스테이트 저수지, 댐, 수로 등이 테러에 무방비로 노출돼 있다는 지적에 따라 뉴욕시가 수질 검사를 대폭 강화하는 등 대책 마련에도 나섰다.



    탄저균 공포는 뉴욕뿐만 아니다. 미국 민주주의의 상징적 건물인 워싱턴 미 국회의사당 건물도 탄저균 검사를 위해 일시적으로 문을 닫았다. 탄저병균으로 인한 피해는 크게 두 가지다. 감염(infection)과 노출(exposure)이다. 플로리다 타블로이드판 신문인 아메리칸 미디어(American Media)사에서의 두 가지 사례(사망 1명, 입원치료 1명)는 호흡감염이 원인이고, 뉴욕에서의 NBC, ABC, CBS 관계자와 뉴저지 우체국 종사자는 모두 피부감염이다. 감염보다 정도가 약한 노출 피해는 아메리칸 미디어 6명, 뉴욕의 실험실 기술자 2명과 경찰관 1명, 그리고 워싱턴 의사당 관계자 31명 등이다. 문제는 탄저균 테러 피해자가 갈수록 늘어날 조짐을 보인다는 점이다. 탄저병 공포가 세계로 확산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 아프리카 케냐에서 일가족 4명이 미국에서 보낸 편지에 든 탄저균에 노출된 것이 한 예다.

    뉴욕의 3대 방송매체를 꼽으라면 ABC, NBC, CBS다. 이들 3개사는 이번에 공교롭게도 모두 탄저균 소동에 휘말렸다. 왜 굳이 방송사인가. 뉴욕에는 영향력 있는 일간지 뉴욕타임스와 주간지 뉴스위크 본사가 자리잡은 곳이다. 그럼에도 테러리스트(또는 그 조직)들이 방송매체를 점찍은 것은 TV 화면을 통한 시각적 효과와 그것이 불러일으킬 공포를 극대화하자는 뜻으로 풀이된다. 미 컬럼비아대학 언론학 교수인 리처드 올드도 영국 BBC와의 인터뷰에서 “공포의 확산을 위한 효과적인 전략”이라고 진단했다.

    한 프로듀서의 7개월 된 아들이 방송국에 왔다가 탄저균에 감염된 것으로 드러난 ABC 방송사는 맨해튼 중심부, 링컨센터 가까이에 자리잡고 있다. 그곳 건물 바깥에 나와 담배를 피우는 한 무리의 방송사 직원들을 만났다. 뉴욕은 건물 안에서 담배를 피우지 못한다. 그래서 골초들은 이따금씩 이처럼 건물 밖으로 나와 이른바 ‘담배 브레이크(break)’ 시간을 갖는다. 음향효과실에서 일한다는 한 직원은 “요즘 같은 분위기에선 담배를 더 자주 피우게 된다”고 자신의 심리적 불안을 털어놓는다. 사무실 어딘가에 탄저균이 돌아다니고 있을 것만 같은 찜찜한 생각이 자꾸만 담배를 찾도록 만든다는 얘기다. ABC는 1000여 명 직원을 대상으로 탄저균 양성반응 검사를 하고 있으나, 현재까지 감염된 사람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ABC의 간판 앵커는 피터 제닝스다. 탄저균이 든 편지로 말미암아 비서들이 감염된 CBS의 댄 래더, NBC의 톰 브로커와 더불어 제닝스는 뉴욕의 저녁시간대 뉴스를 진행하는 경쟁자적 위치다. CBS, NBC가 문제가 되자 제닝스의 비서는 한동안 그에게 오는 우편물을 뜯어보지 않았다는 소식이다. ABC 대변인격인 토드 폴케스는 “ABC 스튜디오에 온 7개월 된 남자아기가 탄저균에 감염된 사실을 알았을 때보다는 직원들의 동요가 많이 가라앉은 상태”라 밝힌다. 탄저균이 치료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도 분위기를 가라앉히는 데 도움이 됐다.

    그러나 뉴욕의 방송사 종사자들과 워싱턴의 정치인들과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정치인들은 그들의 사무실(의사당) 건물을 비울 수 있지만, 방송사는 그렇지 못하다는 점이다. 그래서일까. 뉴욕타임스의 한 칼럼니스트는 “정치 지도자들이 국민에게 불안에 떨지 말고 일상생활에 복귀하라고 말하면서 자신들은 의사당을 떠났다”며 이를 위선(hypocracy)이라고 꼬집었다. 타블로이드판 일간지 뉴욕포스트는 더 강경하다. 겉표지에 의회 지도자들 사진을 싣고는 “겁쟁이들”(wimps)이라 질타했다.

    뉴욕 세계무역센터에 대한 테러 공격이 대형참사를 겨냥한 것이라면, 이번의 탄저균 공격은 개인 또는 소집단을 겨냥한 테러 공격이다. 그러나 불안의 파급 효과는 훨씬 더 큰 것으로 보인다. 로버트 뮐러 FBI 국장은 탄저균 테러 범인 체포에 100만 달러의 현상금을 내걸었다. 누가, 어떤 집단이 탄저균 테러로 뉴욕을 공포로 몰아넣고 있는가. 이 대목에선 아직 결론나지 않은 상태다. 존 애시크로프트 법무장관은 “탄저균 감염사례와 테러리스트 오사마 빈 라덴의 연계성을 배제하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빈 라덴의 조직인 알 카이다가 탄저균 유포의 배후에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 미 수사당국의 시각이다.

    그러나 일부 미 테러 전문가들은 고개를 갸우뚱한다. 빈 라덴을 비롯한 해외 테러리스트 조직보다는 미국 내 우익단체의 소행일 가능성도 없지 않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FBI는 이들이 언론과 정치인들에 불만을 품고 탄저균 테러 소동을 벌였을 가능성에 대해서도 수사를 벌이고 있다. 지금껏 사용된 탄저균이 이라크나 러시아에서 밀반입되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는 것으로 알려진다. 아직까지 빈 라덴이 이번 사건에 연루됐다는 증거도 나타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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