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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 로펌의 새 지평 열다

공익활동 의무화·파트너십 운영 등 ‘즐거운 실험’… “오래 못 버틸 낭만적 시도” 시각도

  • < 김진수 기자 > jockey@donga.com

‘지평’ 로펌의 새 지평 열다

‘지평’ 로펌의 새 지평 열다
법무법인 지평 (www.horizonlaw .com) 이 ‘연구대상’으로 떠오른 건 지난해 4월 설립 때부터다. 이른바 사회변혁 의식이 강한 386세대가 주축인 벤처 전문 로펌이란 점, 로펌(대형 법률사무소) 스스로 공익활동을 강제했다는 점에서 법조계의 적잖은 주목을 받았다. 그로부터 만 1년6개월이 지난 지금, 지평은 그 ‘약속’을 지켰을까. 그렇다면 지평이 자평하는 공익활동 성적은 어느 정도일까.



1년 반 만에 국내 10위로 급성장

“글쎄, 한 40점쯤?” 지평의 업무총괄 변호사인 임성택 변호사(39)는 “아직 미진한 편이다”고 답한다. 설립 초기라는 특수성 탓에 장기계획 아래 성과가 지속적으로 축적되는 과정을 미처 형성하지 못해 현재로선 점수를 인색하게 매길 수밖에 없다는 것.

신생 로펌 지평이 설립부터 관심을 모은 이유 중 하나는 ‘국내 최초의 벤처 전문 로펌’이란 닉네임 때문. 법률에 문외한인 벤처기업들을 위해 계약, 인수합병, 지적재산권 분쟁 등 벤처 관련 법률시장을 맨 먼저 개척한 덕분이다. 지평은 처음 14명의 멤버로 출범했다. 서울대 법대 동기(82학번)로 법무법인 세종에서 활동한 임변호사와 양영태 변호사(39)가 의기투합, 함께 일한 다른 변호사 10여 명을 이끌었고 여기에 13년간 판사생활을 한 강금실 변호사(44ㆍ여)가 대표변호사로 가세해 문을 열었다.



‘지평’ 로펌의 새 지평 열다
현재 지평의 한국 변호사는 18명. 3명의 외국 변호사가 더 있다. 지평은 1년 반 만에 외형상 국내 10위의 로펌으로 급부상했다. ‘테헤란밸리’의 빌딩 1개 층을 쓴 사무실도 2개 층으로 늘렸다. 사건 수임도 2배 늘었다. 현재 지평의 법률자문을 받는 기업은 상장회사와 코스닥 등록기업 20여 개를 포함해 120여 개. 안철수연구소, 인터파크, NC소프트, 라이코스코리아, 다산인터네트, 나모인터렉티브, HSBC, 한미은행, 현대산업개발, 대우건설 등 이름만 대도 알 만한 기업들이 지평의 고정 고객이다.

사회적 관심사가 된 사건을 수임한 사례도 적지 않다. 인기 연예인 이영자씨 사건을 맡아 상대방 의사를 환자 비밀 누설과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하고 이씨에 대한 의사측 고소건은 무혐의 처분을 받아낸 것이나, 지난 99년 촉발된 대한불교 조계종 총무원장직을 둘러싼 종단분규 처리업무를 맡아 종단법규 제ㆍ개정과 총무원장 선거 등을 자문하고 10여 건의 가처분 및 소송에서 전부 승소한 것 등이 지평의 ‘작품’이다.

이런 급성장의 원동력은 소속 변호사들의 면면에서 잘 드러난다. 서울법대 학생회장 출신인 임변호사는 지난 99년 옷 로비 사건 특별수사관을 맡았고, 김성수 변호사(39)는 국내 최초의 의사 출신 변호사. 38회 사법시험 수석합격자 황승화 변호사(34), 서울대 분자생물학과 출신 김효권 변호사(36), 조선족 3세로 중국 변호사로선 유일하게 국내 로펌에 소속된 진샌화(金鮮花ㆍ36) 변호사 등도 이색 경력의 소유자다. 올 들어서도 한국인권재단 사무총장인 조용환, 금융감독원 출신 윤영규, 판사 출신 박영주, 군법무관 법관 임용 서열 1위 김지홍 변호사 등 6명이 지평에 합류했다.

‘벤처 거품’이 빠진 요즘 지평은 벤처 전문 로펌이란 꼬리표가 부담스럽다. 지평의 지향점은 종합로펌. 업무영역도 벤처 법률컨설팅과 일반 소송업무 외에 회사ㆍ국제, 증권ㆍ금융, IP(지적재산권)ㆍ특허, IT(정보기술)ㆍ바이오, 중국ㆍ북한 관련 분야로 다양화했다. 앞으로 10년 내에 어떤 법률서비스도 소화할 수 있는 전문성을 확보해 국내 최고의 명문 로펌이 되는 게 지평의 ‘꿈’이다.

그러나 이런 사항들은 외피(外皮)에 불과하다. 지평의 진면목은 공익활동에서 드러난다. 국내 로펌들은 공익활동에 매우 소극적이지만, 지평은 설립과 동시에 210개(지난 10월12일 현재 대한변호사협회 집계)의 국내 법무법인 중 유일하게 소속 변호사의 공익활동을 의무화했다. 내부규약인 ‘공익활동에 관한 규정’은 지평 변호사들이 각자 연간 50시간 이상(누계) 공익활동에 종사하도록 했다.

지평의 이런 ‘결정’은 지난해 7월 대한변협이 변호사법 개정에 따라 세계 최초로 변호사 공익활동을 의무화한 ‘변호사 공익활동 등에 관한 규정’보다도 3개월 앞선 것. 활동시간 역시 변협의 연 20∼30시간보다 훨씬 더 많다. 실제 지난해 100시간을 넘긴 지평 변호사도 5∼6명쯤 된다.

지평의 공익활동은 다양하다. 지난해엔 호주제 위헌제청 소송 참여, 민혁당 사건 상고심 수행, 이근안 고문피해자 함주명씨의 재심청구 사건 수행 등 공익소송 활동과 참여연대 등 시민사회단체의 각종 위원회 참여, 공익 관련 집필ㆍ강연활동을 수행했다. 여기에다 올 상반기엔 국가인권위원회법(및 시행령) 초안작성 등 입법활동과 국제회의 참가활동까지 추가했다.

김지홍 변호사(29)는 “개업 변호사가 개인적 결단에 의해 공익활동을 할 경우 일반업무와 중첩돼 활동이 소홀해지거나 업무량 증가로 한 사건을 처음부터 끝까지 ‘풀 서비스’ 하지 못하기 쉽다”며 “지평의 설립목적 중 하나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다”고 밝힌다.

의무시간을 못 채울 경우는 어떨까. 과중한 업무로 거의 매일 야근하는 로펌 변호사들은 사실 공익활동 마인드가 있어도 시간 내기가 쉽지 않다. 때문에 실제 활동이 의무시간에 모자랄 경우 지평 변호사들은 그에 상응하는 공익기금을 낸다. 설립 직후부터 지난해 12월까지 이렇게 모인 공익기금은 600만 원. 지평은 이와 별도로 연간 매출액 중 일부를 공익기금으로 적립한다. 아직 집행된 적은 없지만, 이 공익기금은 새 공익활동 프로그램 개발과 공익단체 재정지원에 쓰일 예정이다.

‘지평’ 로펌의 새 지평 열다
지평의 또 다른 ‘파격’은 운영의 민주성. 상당수 로펌이 고용ㆍ근로 변호사로 나뉜 현실과 대조적으로 지평 변호사들은 모두 동등한 ‘파트너’다. 주요사항은 자체 의사결정기구인 변호사총회(주 1회 개최)에서 결정한다. “민주성은 지평의 윤리성을 확보하기 위한 조직원리이자 지평의 역량을 강화하는 원천이기도 하다.” 강금실 변호사는 “창조성과 자발성이 무엇보다 요구되는 전문가 집단엔 민주적 운영형태가 필수다. 다만 지평 조직이 점차 커지면서 민주성과 효율성의 조화가 새 과제가 됐다”고 말한다.

지평이 이처럼 차별화한 로펌 모델을 제시할 수 있던 데는 구성원들의 비슷한 성향도 한몫 했다. 비판적 현실인식과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가 적절히 맞물린 접점에 ‘공통의 의식을 가진 다수’가 모인 것이다. 일례로 미국의 아프간 공격에 대해서도 보복전쟁은 부적절한 조치라는 데 지평 변호사들의 의견이 일치한다.

지평은 가끔 ‘탈출’을 감행한다. 최근에도 경기도 남양주로 전 직원 55명이 MT를 가 두 팀으로 나눠 모의재판을 열었다. 지평의 유별난 단합은 고객들에게까지 소문나 있을 정도다. 변호사업계도 지평의 ‘신선한 일탈’을 수긍하는 분위기. 물론 초기엔 반응이 엇갈렸다. 대체로 젊은 변호사들은 지지의 뜻을 전한 반면 “지평의 ‘낭만적 시도’는 6개월도 버티기 힘들 것이다”는 부정적 전망을 내놓은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대한변협 관계자는 “지평의 ‘파격’은 최근 업계 내부에서 긍정적 평가를 받고 있다”고 전한다.

“이름 참 잘 지었다.” 지평이 요즘 자주 듣는 소리다. ‘이름값’을 못하면 듣기 힘든 찬사다. 지평이란 명칭은 ‘가치지향적 전문가 공동체’로서 변호사업계의 새 지평을 열겠다는 의미. 그러나 지평이 넓혀가는 ‘지평’은 지평 멤버와 고객들에게 국한하지 않는다. 이 사회의 누구라도 지평의 ‘지평선’ 너머에 놓여선 안 된다는 것이 지평의 소신이다.

‘대안 로펌’ 지평은 과연 어떤 로펌을 모델로 했을까. “미국 로펌은 자본화된 기업형이고, 국내 로펌도 그런 추세여서 모델로 삼은 로펌은 없다. 오히려 지평 나름의 역할이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지평이 ‘즐거운 실험’을 계속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양영태 변호사) 그래서일까. ‘나눔의 정신’을 지향한 지평의 사가(社歌)는 가수 안치환의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다.



주간동아 307호 (p40~41)

< 김진수 기자 > jocke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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