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97

2001.08.16

“市場 바로 세우기가 먼저다”

재계 이론가들 “재벌개혁 정책에 과도한 정부 주도… 대통령 주변의 ‘평등주의자’들이 문제”

  • < 성기영 기자 > sky3203@donga.com

    입력2005-01-17 15: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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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市場 바로 세우기가 먼저다”
    ”주식을 전혀 갖고 있지 않은 사외이사를 50%까지 임명해야 한다는 것은 결국 사유재산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 아니냐. 이게 사회주의적 발상이 아니고 뭐냐?”

    전경련 김석중 경제조사본부장(상무)은 최근 한나라당 김만제 정책위의장의 ‘사회주의’ 발언과 이에 따른 정치권 논란에 대한 재계의 시각을 묻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그동안 전경련 대변인 역할을 한 공병호 자유기업원장, 유한수 전무 등이 모두 전경련을 떠난 후 김상무는 실질적인 ‘재계의 입’으로 통한다.

    전경련을 비롯한 재계에서는 김대중 정부의 재벌 개혁 정책이 과도하게 정부 주도로 이뤄지면서 기업 경쟁력을 떨어뜨리고 시장기능을 저해한다고 비판해 왔다. 그러나 김만제 의장 발언에서 촉발된 사회주의 논쟁이 1주일 넘게 이어지도록 재계에서는 성명서 한장 나온 적이 없다. 그렇다고 재계가 민주당 입장에 동의하는 것도 아니다. 단, 한나라당의 주장에 동조하고 나설 경우 정치적 오해를 받을 우려 때문에 스스로 나서서 김의장의 주장에 동조하지 않을 뿐이다. 그러나 내심으로는 재계가 못한 말을 한나라당이 대신하였다는 데 공감하는 분위기다.

    김석중 상무는 △부채비율 200% 강요 △사외이사 의무비율 임명 △오너 경영에 대한 시민단체들의 공격 등을 사회주의적 발상의 사례로 들었다. 김상무는 “미국의 뉴욕증권거래소(NYSE) 상장 규정만 보더라도 2인 이상의 사외이사만 있으면 되는데 우리는 자산 2조 원 이상의 법인에는 무조건 사외이사 비율을 50%로 하라는 것은 사적 재산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발상이다”고 몰아붙였다.

    재계에서는 이밖에도 경제 분야에서 30대 그룹 지정제도나 출자총액 제한 등도 정부의 불필요한 규제라고 지적해 왔다. 이러한 비난 때문인지는 몰라도 최근 진념 경제부총리는 집단소송제 도입을 전제로 30대 그룹 지정제도를 완화할 뜻이 있음을 몇 차례 밝힌 바 있다.



    사실상 재계에서는 사회주의 논쟁 같은 불필요한 정치 논쟁보다는 정부규제 완화 등을 꾸준히 요구해 왔다. 재계가 정부 정책에 대해 ‘사회주의’라는 용어를 쓰면서 본격적으로 비난한 적은 거의 없었다. 얼마 전 민병균 자유기업원장이 사립학교법 개정 등을 열거하면서 정부 정책이 자본주의 근간을 부정한 채 좌익 성향을 띤다고 주장하였고, 한걸음 더 나아가 ‘우익이 잠을 깨야 한다’는 선동적 주장을 덧붙였지만 이런 주장이 일종의 ‘색깔론’으로 인식되면서 재계 내에서도 큰 공감을 얻지 못했다. 재계 역시 규제완화 문제와 관련해 색깔론을 불지핀다는 오해를 받기는 싫어하는 입장이다. 그러나 규제완화와 관련해서는 경기 침체가 장기화하면서 앞으로도 더욱 큰 목소리를 낼 것으로 보인다.

    “市場 바로 세우기가 먼저다”
    최근 미국의 경제 격주간지 ‘포브스’가 발표한 ‘기업하기 좋은 나라’ 순위에서 우리 나라는 조사국 중 18위를 기록했다. 충격적인 사실은 중국이 우리 나라보다 한걸음 앞선 17위라는 사실이다. 재계 관계자들은 이를 두고 외국 기업인들이 구사회주의 국가에 투자를 위해 들어갔다가도 ‘규제’ 때문에 도망쳐 나가 버린 경험을 거론하며 우리의 각종 기업규제 현실을 통렬히 지적한 사례라고 입을 모았다. 우리 나라가 다른 거시경제 여건이나 시장 환경이 선진국들보다 크게 뒤질 것이 없으면서도 유독 정부의 각종 규제정책 때문에 세계 시장에서 기피국가 중 하나로 분류되고 있다는 것이다. 재계의 시각은 결국 ‘과도한 기업 활동 규제=정부가 시장을 주도하겠다’는 발상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동안 재계의 주장과 입장을 함께해 온 이론가들, 좀더 정확하게 자유주의 시장경제론자들은 잘못 설계된 국민연금제도, 종업원지주제도 등 근로자들의 경영 참여, 더 나아가 의무교육 확대 방침까지도 사회주의적 요소가 들어 있는 정책들이라고 지적해 왔다. 전남대 김영용 교수(경제학)는 “적게 내고 많이 가져가도록 설계된 국민연금제도는 연금 재정을 바닥나게 할 뿐만 아니라 수혜자들에게도 열심히 일해야 한다는 인센티브 자체를 없애버리는 사회주의 방식의 대표적 사례다”고 비판했다.

    이들은 연금제도나 의료보험 등을 국가가 독점해야 한다는 사실에도 의문을 제기한다. ‘작은 정부’와 자유주의 입장에서는 효율성을 높이고 국민에게 더 큰 만족과 후생수준을 가져다 줄 수 있다면 연금이나 의료보험 등도 과감한 민영화를 추진해야 한다는 것. 실제로 칠레 등 일부 남미 국가에서는 만성 적자에 시달리는 국민연금을 민영화해 눈에 띄는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유럽식 사회민주주의 제도에 대해서도 자유주의 이론가들은 탐탁지 않은 눈길을 보낸다. 앤서니 기든스가 주장하는 ‘제3의 길’ 역시 가능성이 없다고 본다. 김영용 교수는 “스웨덴 같은 북유럽 국가들이 사회민주주의적 정책을 쓰지 않았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잘 살 수 있었을 것이다”고 주장한다.

    재계 이론가들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 발전’을 내세운 ‘DJ노믹스’가 두 이념의 조화라기보다 사실상 정부 주도의 ‘관치경제’로 진행해 왔다고 비난한다. 익명을 요구한 한 경제학 교수는 “DJ노믹스가 상호 타협 불가능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동시에 달성하겠다고 나선 것 자체가 비판을 자초할 수 있는 불씨를 안고 출발한 것이다”고 말했다. 이교수는 “안 그래도 국가재정이 취약한 상태에서 국민기초생활보장법 등 복지예산 지출을 대폭 늘리겠다고 나서면서 문제가 더욱 꼬인 것이다”고 지적했다.

    그렇다면 재계 관계자들이나 자유주의 이론가들이 왜 ‘DJ노믹스’를 ‘사회주의’ 또는 ‘사회주의적’이라고 규정하는 것일까. 전경련 김석중 상무는 “대통령도 처음에는 경제를 살려야 한다고 강조하고 돈 많이 버는 사람이 애국자라면서 기업들의 기를 살려줬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과거 정권에서 탄압 받은 그룹들이 대통령 주변에 포진하면서 이 사람들이 유독 평등주의를 내세우며 정책 결정에 영향력을 행사한 것 같다”고 지적했다. 김영용 교수 또한 “애초 한국개발연구원(KDI)에서 DJ노믹스 실천 방안 등을 내놓았을 때만 해도 사회주의 색채가 약했으나 그 후 경제정책에 관여한 사람이 내놓은 의견들을 보면 처음보다 톤이 강해진 것이 확실하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김대중 정부나 재계 이론가 모두 ‘시장’을 강조한다는 점이다. 시장에는 경쟁자가 있지만 정부에는 경쟁자가 없게 마련이다. 시장에서는 독점력을 행사할 수 없지만 정부는 독점력을 행사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DJ노믹스가 사회주의적인지 아닌지’에 대한 평가는 김대중 정부가 시장을 바로 세우는 데 얼마나 기여했는지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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