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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예술무대는 달리고 싶다

1년 사이 20만 명 관람 문화공간으로 자리매김 … 협찬 끊겨 공연 지속 불투명

  • < 신을진 기자happyend@donga.com >

지하철 예술무대는 달리고 싶다

지하철 예술무대는 달리고 싶다
퇴근 시간 종로 3가 지하철역. 근처 탑골공원에서 자리를 옮긴 할아버지들과 지하철을 타기 위해 바쁘게 발걸음을 옮기는 사람들이 어디선가 들려오는 음악소리에 호기심을 느끼고 하나둘 모여든다. 추계예술대학 재학생들로 이루어진 금관5중주팀이 연주를 준비하는 동안 마이크 앞에 나와 즉석에서 하모니카를 부는 할아버지도 있다. “이 사람 옛날 가극단 출신이야.

” 할아버지가 하모니카로 ‘사랑은 아무나 하나’를 구성지게 연주하는 동안 관객은 더 늘어났다. 다소 산만한 분위기에서 연주를 시작한 학생들. 행진곡풍의 ‘엠파리토루카’와 비틀스의 팝송 ‘오브라디오브라다’가 울려 퍼지자 사람들은 어느새 웃음을 짓고 삭막한 역사는 멋들어진 공연장으로 바뀐다.

파리나 뉴욕을 여행하며 그곳 지하철 역사에서 거리의 악사들이 음악을 연주하고 시민들과 관광객이 흥겹게 어울려 여유를 만끽하는 낭만적인 광경을 목격한 사람이라면 “우리에겐 왜 저런 문화가 없을까” 하는 아쉬움을 느꼈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우리의 지하철도 바뀌고 있다. 요즘 지하철 역사에 가면 뭔가 특별한 일이 기다리고 있다.

지난해 5월19일 서울지하철공사와 공연기획사 이일공이 을지로입구역에서 시작한 ‘지하철 예술무대’는 지난해 말까지 서울 시내 10여 개 역사에서 351차례의 공연을 가졌다. 여기에는 400여 명의 프로 및 아마추어 예술인들이 참가해 클래식, 재즈, 국악, 무용, 연극, 마임, 퍼포먼스 등 다채로운 장르의 공연을 선보였고, 어림잡아 20만 명의 시민들이 공연을 관람했다.

지하철을 단순한 교통수단이 아닌 수준 높은 문화예술을 만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겠다는 취지로 마련한 이 행사는 삭막한 지하공간을 오가는 시민들에게 뜻밖의 즐거움을 선사하며, 일상 속으로 자연스레 예술이 스미는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무대 경험이 없는 아마추어 예술인들에게는 기량을 뽐낼 수 있는 데뷔 무대가 되고, 프로 예술인들에게는 제한된 극장공간에서 벗어나 대중과 호흡하며 새로운 예술을 시도할 수 있는 실험무대가 된다. 고급예술의 향유층이 좁고 공연장도 부족한 현실에서 이 무대는 예술인과 시민 모두에게 더할 수 없이 소중하고 값지다.



우연찮게 공연을 본 사람들은 “신선한 충격이다” “평소에 만나기 힘든 것을 지하철에서 듣고 보니 느낌이 새롭다” “메마른 도시생활에서 따뜻한 기분을 느꼈다”는 반응을 보인다. “이제야 세금 내는 보람을 느낀다”는 한 주부의 말처럼 이 무대에 대한 시민들의 반응은 긍정을 넘어 환호에 가깝다. 공연이 있는 역사를 찾아다니는 고정팬도 생겼고, 역사 사무실과 기획사로는 공연일정에 대한 문의가 쇄도한다.

공연에 참가하는 예술인들의 감회도 남다르다. 현대무용을 공연하는 정경화씨는 “지하철 역사에 몰린 관객들이 일반 공연장보다 더한 집중력과 진지함으로 공연을 지켜보는 데 놀랐다”고 했고, 하모니카 연주자인 대학생 장덕진씨는 “얼큰하게 약주를 드신 어른들이 하모니카 소리에 맞춰 흥겹게 춤을 추는 모습을 보면서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교통사고 재활훈련으로 하모니카를 불기 시작한 것을 계기로 연주자로 성장한 장씨를 비롯해, 할아버지 연주자들로 이루어진 실버트리오(박스기사 참조), 클래식기타 듀엣 이성준-수진 남매, 소금을 바닥에 뿌리고 퍼포먼스를 하듯 특이한 한국무용을 선보인 서영숙씨, 인디밴드 연합 ‘카바레 사운드’ 등은 모두 지하철 예술무대가 배출한 스타들이다. 그런데 이런 소중한 무대가 하마터면 사라질 뻔했다. 지난해 이일공은 인터넷 업체들에게 2억원 규모의 협찬을 받아 공연을 시작했으나 올 들어 경기가 나빠지면서 협찬이 끊어졌고, 서울시의 지원금도 받지 못했다. 기업들은 유명인이 나오는 행사가 아니라는 이유로 손을 내저었고, 지난해 문예진흥원의 지원금 심사에서는 ‘프로 예술인들이 만드는 창작물이 아니라 자원봉사자들이 하는 대중적인 공연’이란 이유로 탈락했다. 그러자 “일반시민들에게 생활공간에서 문화를 즐길 기회를 주는 공공성 공연을 심사기준에 맞지 않는다며 지원하지 않는 것은 부당하다”는 여론의 비판이 들끓었다.

올 들어 문예진흥기금에 ‘독립예술지원’ 분야를 신설하면서 지하철 예술무대는 800만원의 지원금을 받았다. 여기에 ‘1% 나눔운동’을 전개하는 ‘아름다운 재단’의 소액 기부가 이루어지면서 지하철 예술무대는 겨우 막을 올릴 수 있었다. 그러나 대중 속으로 파고든 지하철 예술무대의 앞날은 불투명하다.

“돈이 없어 인쇄물도 못 찍는 형편이에요. ‘하루살이’ 공연인 셈이죠. 지하철 공연이지만 기본적인 무대 세팅과 장비는 필요하기 때문에 어려움이 많습니다. 직원들이 현장 진행요원으로 뛰며 몸으로 때우고 있어요. 무료공연이어서 입장료 수입도 전혀 없는 만큼 추가지원과 기업의 협찬이 절실합니다.”

이일공의 이동민씨는 더도 덜도 말고 공연만 제대로 이어갈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재정적인 어려움 때문에 공연을 접는다면 시민들에게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일 년에 공연 한 번 보기도 힘든 사람들이 가족단위로 와서 주마다 공연을 관람하고 기쁜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면 정말 없어서는 안 될 무대라는 생각이 듭니다.”

처음 생각한 것보다 규모가 커지고 시민들의 반응도 뜨거운 데 고무한 지하철공사측은 공익요원을 동원해 포스터나 현수막을 붙이고, 전기시설 이용 등의 편의를 제공한다. 그러나 지하철 예술무대가 비예산사업이어서 재정적 지원은 힘들다고 지하철공사 홍보실의 임병관 과장은 말한다.

“시민들은 문화예술에 대한 관심과 욕구가 높은 데 비해 이를 향유할 수 있는 기회나 공간은 턱없이 부족하다. 관객과 예술인이 직접 만날 수 있는 지하철 예술무대는 재야 예술인과 아마추어의 미학이 빛나는 신선하고 소중한 공간이다”(음악평론가 임진모씨). 무료하고 피곤한 일상에 지친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따뜻하게 어루만지는 지하철 예술. 역사와 플랫폼에 울려 퍼지는 고즈넉한 색소폰 소리가 어느 날 ‘뚝’ 끊어지지 않기를 시민들은 기대한다.





주간동아 2001.06.07 287호 (p68~69)

< 신을진 기자happyend@donga.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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