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87

2001.06.07

‘스타 제조공장’ 호주 드라마학교 떴다

러셀 크로우, 니콜 키드만 등 명배우들 배출 … ‘지옥훈련’ 통해 전천후 영화 전사 양성

  • < 윤필립/ 시드니 통신원phillip@yesnet.com.au >

    입력2005-02-01 14:08: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스타 제조공장’ 호주 드라마학교 떴다
    지난 3월27일, LA에서열린 2001년 아카데미 영화상 시상식에서 호주 사람들을 바짝 긴장시킨 장면이 있었다. 남우주연상 수상을 놓고 두 명의 호주 출신 배우들이 경쟁을 벌였기 때문이다. 로마시대의 전사들을 그린 영화 ‘글래디에이터’에서 열연한 러셀 크로우와 시대와의 불화로 광란의 일생을 살아야 했던 프랑스 출신 시인 사드의 말년을 재연한 영화 ‘퀼스’에서 신들린 듯한 연기를 펼친 성격파 배우 제프리 러시가 그들이었다.

    미국 출신이 아닌 다른 나라 출신 배우들이 같은 부분의 아카데미상을 놓고 경합을 벌인 경우는 매우 드문 일인데 두 사람은 같은 호주 출신일 뿐만 아니라 같은 학교 선후배 사이라 더욱 화제가 되었다. 영화산업계에서 ‘스타 제조공장’이라는 시드니 소재 호주국립드라마학교(이하 드라마학교)가 바로 그 학교다. 결국 각축 끝에 마지막 영광은 ‘글래디에이터’의 러셀 크로우에게 돌아갔다. 그러나 제프리 러시도 호주 출신 정신장애인 피아니스트의 스토리를 그린 영화 ‘샤인’으로 얼마 전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바 있어 러셀 크로우의 이번 수상으로 동문수학한 선후배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수상의 영광을 안은 것이다.

    개교 42주년을 맞은 드라마학교 출신의 활약상을 보면 러셀 크로우나 제프리 러시의 영광이 결코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지난 96년 스코틀랜드 독립운동 과정을 서사적으로 그린 영화 ‘브레이브 하트’를 감독, 제작하고 주연까지도 맡은 멜 깁슨도 이 학교 출신이다. 그는 비록 남우주연상을 받진 못했지만 감독상과 작품상을 수상해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한 바 있다.

    ‘스타 제조공장’ 호주 드라마학교 떴다
    한편 이 학교 출신 여자 배우들로는 지난 92년과 95년에 에미상과 골든 글로브상을 동시에 수상한 주디 데이비스와 99년 ‘엘리자베스 1세’에 출연해 여왕역으로 골든 글로브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케이트 브란체 등이 있다.

    그 외에도 최근에 톰 크루즈와 갈라선 ‘무랑 루즈’의 니콜 키드먼과 TV 시리즈 ‘가시나무새’에서 메기 역을 맡은 레이첼 워드 등 세계적 명성을 얻고 있는 호주 출신 배우들 대부분이 이 학교 출신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이 학교의 명성은 세계 영화시장에 널리 알려졌고, 호주뿐만 아니라 뉴질랜드 출신 배우 지망생들에게도 선망의 대상이 되고 있다. 25명을 최종 선발하는 올 신입생 모집 전형에 무려 2000명이 넘는 응시자들이 모여들 만큼 드라마학교의 인기는 높다.



    아린 랜더스(18)는 식당 웨이터로 일하며 3년째 드라마학교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 올해엔 최종 후보자 50명 안에 들어 마침내 서광이 비치는 듯했으나 최종심사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유태계 출신인 아린은 제프리 러시 같은 성격파 배우가 되겠다는 희망으로 주경야독을 하고 있다.

    내년에 다시 한번 도전하겠다고 밝힌 아린은 “언젠가는 문이 열릴 것이다. 쉽게 열리는 문 같았으면 처음부터 도전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일단 미치지 않으면 드라마학교의 바늘구멍을 통과할 수 없다. 내가 아직도 입학 허가를 받지 못한 것은 최종 합격자들보다 덜 미쳤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세 번의 도전 끝에 입학 관문을 통과한 서부호주 출신의 페네롭 키난(20)은 “합격의 영광은 잠시뿐이었다. 남녀를 구분하지 않는 지옥훈련은 마치 신병훈련소를 방불케 했다. 그 누구에게도 미리 정해진 배역은 없다는 게 교수진들의 이야기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이해하고 연기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면서 “지금 하는 인터뷰도 수업의 연장이라 생각한다”며 활짝 웃었다.

    미국 출신의 다니엘 빌렛(22) 역시 “이럴 줄 알았으면 아무리 스타가 되는 지름길이라도 호주에 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선택의 여지가 없다. 공연이 끝나면 다시 다음 공연을 준비해야 하니 후회할 틈도 없다”며 리허설에 여념이 없었다.

    드라마학교에서 만난 학생들은 하나같이 고된 훈련에 대해 푸념을 늘어놓았다. 이 학교의 마케팅 담당 앤드리아 뮐러 씨는 “혹독한 훈련 때문에 한 해에 2∼3명 정도의 학생들이 중도에 포기한다. 자유분방한 나이의 학생들이 연중무휴로 짜인 훈련 스케줄을 견디지 못하는 것 같다. 그러나 그건 스타가 되는 과정에서 쓴약과 같은 것이다”고 말했다.

    3년짜리 학부과정(디플로마)인 드라마학교의 학사일정을 보면 공부하는 학생의 일과표인지 연기자의 스케줄 노트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공연준비와 공연일정으로 꽉 차 있다. 더욱 이상한 것은 연기전공 학생들에게 의상-소품-조명 등 연기 외적인 역할까지 맡겼다는 점이다. 심지어 프로그램을 만들고 거리에 포스터를 붙이는 일까지 학생들이 도맡아 한다. 영화산업의 전천후 전사를 만드는 셈이다.

    1959년, 뉴사우스웨일스(NSW) 대학교의 허름한 창고에서 로버트 퀴엔틴 감독과 몇 명의 연극반 학생들이 모인 것이 드라마학교의 효시였다. 본격적인 극단을 만들기 위해 모인 학생들은 내친김에 연기자학교까지 동시에 만들자는 퀴엔틴 감독의 제의를 흔쾌히 받아들여 드라마학교가 태어나게 되었다.

    이 학교는 비록 국립학교의 간판을 달았지만 워낙 방대한 규모의 예산이 필요한 특수학교라 학교재정을 전적으로 국가에 의존할 수는 없다. 학교발전기금의 약 30%를 학교에서 만든 연극 흥행수입과 영화나 TV 드라마의 조역으로 출연하는 재학생들의 개런티를 모아 충당한다.

    드라마학교 출신 연기자들의 기부금 또한 무시할 수 없는 규모다. 지난 1999년 2월 개교 50주년 행사에 참석한 쟁쟁한 선배 스타들이 학교 안에 최신식 극장을 신축할 수 있도록 거액의 기부금을 모았다. 멜 깁슨의 경우 호주달러로 200만달러(약13억원)의 거금을 선뜻 내놓아 후배들을 기쁘게 했다.

    세계적인 영화사들이 호주에 영화제작소를 만들어 운영하는 점도 드라마학교가 지속적인 발전을 해오는 데 일조를 하고 있다. 시드니의 폭스 스튜디오와 골드코스트의 워너브라더스 무비월드 등에서 ‘스타워즈’ 시리즈와 ‘라이언 일병 구하기’ ‘베이브’ ‘미션 임파서블’ ‘배트맨’ 등 쟁쟁한 영화들이 탄생했다. 이러한 배경에는 천정부지로 뛰는 할리우드의 영화제작비를 견디지 못한 영화사들이 절반 정도의 경비로 똑같은 품질의 영화를 만들 수 있는 호주로 몰려들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호주 현지에서 조연급 연기자들을 얼마든지 조달할 수 있다는 장점이 크게 작용하였다. 드라마학교 출신 연기자들이 바로 그들이다.

    전 세계적으로 제2의 전성기를 맞은 영화산업계에 잘 훈련된 배우를 공급하는 호주국립드라마학교의 장래는 매우 밝다. 그러나 그 밝은 빛이 땀 냄새 나는 연습복에서 비롯한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