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47

2000.08.17

사오정 커플

  • 입력2005-09-21 10:5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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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오정 커플
    “당직 서느라 피곤하고 출출할 텐데 딱 한잔만 하자.” “그래, 그럼 정말 한잔만이다.”

    번번이 회사 동기의 술친구 제안을 무시할 수가 없어 할 수 없이 실내 포장마차에 마주 앉았다.

    사오정 시리즈 하나 못 외우면 미개인 취급받던 시절. ‘사오정’ 별명을 가진 늙수그레한 대머리 총각과 ‘사오순’이란 처녀가 마주 앉았으니 한창 잘나가는 두 스타의 만남 아닌가.

    하지만 잔을 받아놓고 다짜고짜 따져물었다. “내가 왜 사오순이야? 빠릿빠릿하단 얘긴 들었어도 잘 못 알아듣고 답답하다는 소린 처음이야. 앞으로 나한테 사오순이라 부르지 마. 알았어?” 내가 사오순으로 불리게 된 진원지가 바로 사오정이었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부서를 옮겨 일이 서툰 데다 펑펑 대형사고만 쳐댔으니 남들이 봤을 땐 진짜 사오순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잘되면 내 탓, 안 되면 남의 탓 아니던가. 내가 부서에서 ‘사고뭉치’가 된 건 나에게 사오순 별명을 붙인 바로 당신, 사오정 때문이라고 화살을 돌렸다.



    그는 “허허…” 너털웃음을 짓고는 나에게선 순수함이 많이 느껴져 좋은 의미로 그렇게 부르는 것이라고 얘기했다. 구체적 내용을 밝히긴 어렵지만 다른 칭찬도 곁들였다.

    다섯 살이란 나이 차이, 애써 넘긴 머리카락 사이로 간간이 비치는 훤한 머리, 나의 관심 밖 이야기들을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떠들어대는 고리타분함, 나이답지 않은 깊은 생각.

    이런 이유들로 입사동기지만 난 선배보다 더 어려워했다. 어려운 사람과의 둘만의 자리를 피하는 건 당연한 이치 아니겠는가.

    그는 같은 오정-오순 독대(獨對) 기회를 갖기 위해 끊임없이 데이트를 제안해 왔지만 난 번번이 묵살해버렸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갔다. 여름휴가를 하루 앞두고 들뜬 마음에 출근했더니 이게 웬 날벼락인가. 사오정이 다른 직장으로 옮기게 됐으니 휴가를 연기하라는 것이었다.

    ‘밉기만 하더니 결국 미운 털까지 콕 박고 떠나는구먼.’ 축하주 겸 이별주로 거나하게 취한 새벽녘, 오정은 어렵사리 고백을 했다. “너 그거 아냐. 내가 너 좋아했었던 거. 나 만나줄 거지?” 만화로 표현하자면 순간 분홍 빨강의 하트가 내 눈에서 튀어나오는 게 아닌가. 어른들 말로는 이게 바로 콩깍지라고 하던가. 에고고… 난 술취한 김에 ‘예스’를 했고 그날부터 사오정의 포로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1년의 세월이 흘렀다. 주변 사람들의 말에 마음이 흔들려 지난 1년간 순진한 사오정을 참 많이 힘들게 했다. 한동안 내가 사오순이란 사실을 잊고 지냈나 보다. 이제 다시 사오순으로 돌아가야겠다. 세치 혀의 간교한 말놀음에 좌지우지되지 않는, 나쁜 말에 선택적 귀막음을 할 수 있는 지혜로운 사오순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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