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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 두꺼운 ‘콜’에 들끓는 독일

비자금 청문회서 진술 거부…‘음모론’ 들먹이며 정치적 재기 노린 뻔뻔한 발언에 분노

낯 두꺼운 ‘콜’에 들끓는 독일

낯 두꺼운 ‘콜’에 들끓는 독일
헬무트 콜은 25년 동안 독일 기민당 당수였으며 독일 연방총리로 16년간 재직했었다. 그는 독일 통일에 지대한 공을 세운 기념비적 존재였다. 그 기념비가 이제 붕괴 위기에 처해 있다.

작년 11월 검찰의 조사를 받던 기민당 전 회계국장 킵이 검은 돈의 거래를 시인했다. 전 사무총장 가이슬러는 비밀계좌의 존재를 인정했다. 콜은 더 이상 기민당 내의 비자금 거래를 부정할 수 없게 된 것이다 12월16일 콜은 1993년부터 1998년까지 200만 마르크의 불법 정당후원금을 받았음을 시인하며, 그것은 “오류”였다고 인정했다. 그러나 그는 기부자들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것은 자신의 명예를 건 약속이라고 말했다.

이 문제와 관련, 작년 12월 초부터 지금까지 기민당과 콜-정부의 비리혐의를 조사해온 연방의회 조사위원회는 최근 두 번에 걸쳐 콜을 증인으로 소환, 비자금 문제에 대한 청문회를 실시했다. 청문회에서 콜은 고집스럽게 기민당의 여러 비자금 스캔들의 진상을 밝혀낼 수 있는 어떤 진술도 거부했다. 오히려 그는 그동안 기민당 명예 당수직을 사임해야 했고, 의원직의 사퇴압력까지 받던 “굴욕적” 처지를 반전시켜 청문회를 자신의 정치적 실추에 대한 컴백 기회로 이용하기 위해 기다려온 것 같았다. 콜은 청문회에서 자신을 현 사민-녹색 정부의 정치적 음모의 희생자로 연출했다. 그는 사민-녹색 정권이 주도하는 청문회는 연방총리로서의 빛나는 16년 업적을 조직적으로 파괴하려는 의도이며, 근거 없는 비판과 왜곡보도를 해온 언론과 함께 자신을 매장하려는 것이 목적이라고 질문과 관계없는 발언으로 일관했다.

그러나 콜의 이런 항변은 많은 독일 시민에게 ‘콜을 붕괴시키는 자가 도대체 누구인가’라는 역설적 질문을 하게 만든다. 이것은 청문회 직전 충격적 사실로 드러난 콜-총리국의 문서 폐기 규모와 진상 때문이다. 1998년 콜이 총선에서 패배한 직후, 콜의 총리국 및 총리를 보조하는 2명의 국가장관 사무실의 서류와 컴퓨터 입력자료가 모조리 사라졌다. 도대체 16년 동안 무슨 일을 어떻게 해왔는지 증명할 행정 문서가 없어진 상황이 밝혀진 것이다. 이에 대해 콜은 “자신은 폐기명령을 내린 적이 없으며 알지도 못했다”고 주장했다.

작년 12월 스위스 제네바 법정이 통독 후 구동독의 로이나 정유공장을 프랑스의 엘프사가 인수할 때 뇌물 거래가 있었는지를 조사하면서 독일측에 자료를 요청하자 현정부는 콜정부의 총리국이 로이나 관련문서를 전혀 남겨놓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정권 이양 후 사라진 문서들에 대한 의문은 이전에도 있었다. 그러나 연방의회의 조사위원회나 콜정부의 매수비리 혐의를 수사해오고 있는 검찰이 총리국에서 필요한 자료들을 전혀 찾아낼 수 없다는 문제가 의외로 커지자 현 총리국의 국가비서 슈타인마이어는 문서인멸에 대한 조사를 결정한 것이다.

조사의 공정성 시비를 막기 위해 특별조사관으로 임명된 사람은 정권의 연정 파트너였던 자민당 의원이자 연방의회 전 부의장이던 부르크하르트 히르시였다. 4개월 뒤 히르시 팀은 전체 문서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약 3GB(문서로 약 120만장) 정도가 삭제되고 부분적 왜곡 사례도 있었다는 조사결과를 내놓았다. 이는 통독과정에서 구동독의 슈타지(국가안전부)가 자행한 문서파괴 외에는 전례를 찾기 어려운 대대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이 정도나마 추적이 가능했던 것은 컴퓨터 자료 삭제 당시의 작은 실수 덕이었다. 삭제자들이 정리되지 않은 채 흩어져 남아 있던 99개의 안전복사본을 잃어버린 것. 히르시 팀은 이 복사본들을 가지고 부분적으로 사라진 자료 목록을 구성하고 흔적을 읽어낼 수 있었다. 이에 따르면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사우디아라비아로의 탱크 판매, 철도원주택 민영화 과정의 비리, 로이나 정유공장 판매 등에 대한 관련서류가 존재했으나 삭제되었고, 사실 관계를 밝혀낼 정도의 내용 복원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런 문서폐기는 독일 연방의 문서보관법에 대한 명백한 위반으로 형사처벌대상이다. 문제는 법적으로 전례가 없다는 것과 히르시 팀의 조사에도 불구하고 문서폐기 명령을 내린 사람이 누구인지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콜에 이어 슈뢰더 총리국에서 계속 근무하고 있는 공무원들은 “콜 총리국 중앙부처엔 모든 컴퓨터 자료를 통제하는 시스템이 존재하고 있었고 선거 직후 갑자기 직원들의 컴퓨터에서 문서와 자료들이 사라져 비난의 목소리가 높았다”는 정도의 진술만 할 뿐이다. 지금까지 자료삭제를 조금이라도 수긍한 사람은 전 총리국장 볼이 유일하다. 그는 1998년 선거 후 총리국의 메모나 정책 복안 정도가 삭제되었다고 말했다. 그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태도를 보였지만 그같은 행위는 단순한 메모조차도 지워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위반한 것이다.

정책 복안이라는 것이 기민당과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폐기해야 할 것이었다면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언제부터 공무원들이 한 당의 정책복안을 다뤄왔고, 3GB나 되는 양을 처리해야 했던가라는 의문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볼이 직접 명령을 내렸다 하더라도 총리국의 총수인 총리의 허락 없이 그 많은 자료를 삭제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 대목이다.

슈뢰더 정부는 자료인멸과 왜곡 혐의로 조사작업을 검찰에 맡길 계획이다. 검찰이 나서게 되면 전혀 다른 차원의 수사가 시작되기 때문에 지금까지처럼 공무원들이 비협조적인 태도를 고수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형사처벌의 위협이 다가오면 관련 공무원들의 입이 열릴지 모른다. 아무튼 총리국의 자료인멸은 공무원들의 꼼꼼한 문서기록과 정리 및 보관의 철저함으로 유명한 독일의 전통에 지울 수 없는 오점을 남긴 사건임이 분명하다.

콜이 청문회를 통해 비리 행위에 대해 전혀 반성하지 않고 자신을 현정권의 희생자로 연출하면서 기민당의 집단적 후원을 강요하는 행위, 그것을 통한 정치적 영향력 회복 시도는 이제 겨우 정당비자금 스캔들을 가라앉히고 당체제를 새롭게 정비하려는 기민당 내부에 갈등요인으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콜 시대의 청산을 용감하게 주장하고 콜의 기부자 공개 거부에 비판적 입장을 취함으로써 기민당 당수 자리를 거머쥔 앙겔라 메르켈은 진퇴양난의 곤경에 처하게 됐다. 그녀가 계속 콜을 비판하고 그와 거리를 둘 경우 콜의 전제군주적 지도 스타일에 젖어 있는 원내의 많은 기민당 의원들로부터 소외될 염려가 있다. 반대로 콜을 두둔하면 그녀의 권력기반인 정직성과 신뢰성에 금이 갈 수도 있다.

정치권력욕 때문에 현실감각을 상실하고 있는 듯한 콜이 부드러운 새싹에 불과한 새 당수를 위해 자제하거나 정치 일선에서 물러날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콜의 컴백 욕구로 인해 기민당의 혁신은 한걸음 후퇴하고 있는 듯하며 부패당의 이미지를 청산하기 어렵게 됐다.

사민-녹색 연정 역시 콜의 문제를 합법적으로 처리하기 위해선 세심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 너무 많은 문서와 자료들이 폐기돼 콜의 비리를 증명하는 일이 실패로 돌아갈 가능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모든 권력은 부패하기 쉽다. 민주적 절차를 거친 권력이라고 해서 부패에 대한 면역성이 저절로 생기는 것은 아니다. 한 정당이나 일인자에 의한 오랜 권력행사는 당과 자신, 국가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착각을 갖게 한다. 콜이란 정치인이 보여주는 비민주적 통치행태와 현실감각의 상실은 합법적 장기집권의 위험을 시사하고 있다.



주간동아 2000.07.27 244호 (p5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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