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20

2000.02.03

남편의 반란 “나 살림할래”

전업主夫 배춘복 차영회씨의 집안일 24시… “애 낳는 것 빼고 다해요”

  • 입력2006-07-03 14: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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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편의 반란 “나 살림할래”
    “당신 김치 잘 담근다는 사실을 어떻게 온 동네 아줌마들이 다 알고 있어?”

    차영회씨(41·인천시 부평구)는 딸아이를 배웅하러 갔다가 동네 주부들과 30분 넘게 수다를 떨고 돌아온 아내의 물음에 찔끔해진다. “당신 나 없는 사이에 매일 동네 아줌마들 모아놓고 노는 거 아냐?” “무슨 소리야? 내게 죄가 있다면 김치 담근 죄밖에 없어.”

    지난 김장철의 이야기다.

    집안일이 지겨울 땐 설거지 그릇을 가득 쌓아놓고 농땡이도 친다는 4년차 전업주부(專業主夫) 차영회씨. 장기적인 안목으로 다른 일을 해보겠다는 생각에 출판사를 그만두면서 가정경제는 아내가 책임지는 역할 바꾸기에 들어갔다. 직장에 다닐 땐 퇴근하면 피곤하다며 손 하나 까딱하지 않던 그였지만 이제 아이들 교육문제는 물론이고 요리솜씨도 수준급이다. 김치도 배추김치 물김치 등 종류별로 못만드는 것이 없다. 아직 안해본 것은 고추장-된장 담그기 정도. 돈 버는 아내를 대신해 남편이 살림하는 경우가 특별할 것도 없지만 아직까지는 사회 분위기상 당당하게 ‘나는 전업주부’라고 내놓고 말하긴 힘든 게 사실. 그래서 이 집엔 웃지 못할 에피소드도 많다.

    김장 일만 해도 그렇다. 차씨가 김장을 하던 날 마침 주민세 통지서를 들고온 반장 아주머니에게 주방에서 두 손에 양념을 잔뜩 묻히고 배추와 양념을 버무리던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만 것. “어머, 아저씨가 김치 담그세요? 아이 엄마는 어디 가셨어요?” 짓궂게도 차씨가 담그던 김치쌈까지 얻어먹고 간 반장 아주머니의 말이 돌고돌아 아내를 통해 그의 귀에까지 들어온 것이다.



    그날 아침 출근을 서두르던 아내는 차씨가 속상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문을 나서며 한마디했다. “걱정 마! 우리 아파트에도 김치 담그는 아저씨가 몇 명 되나봐. 중요한 건 그 중 당신이 담근 김치가 제일 맛있다는 거야!”

    주부들의 취업률이 50%에 가까운 요즘 맞벌이 부부의 육아나 가사노동 분담은 자연스러운 현상이 되어가고 있다. 94년부터 여성신문사가 주최한 평등부부상은 지난해까지 35쌍, 부산시가 주최하는 평등부부상은 97년부터 15쌍을 배출해 동반자적 부부관계의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 기준으로 삼는 평등부부란 의사결정과 재산권이 평등하게 이뤄지며 가사노동을 함께하는 부부, 육아에 동등하게 참여하고 취미생활이나 기타 활동을 공동으로 하는 부부, 서로 발전할 수 있도록 모자라는 점을 보완해주고 서로 다른 점을 인정하고 존중해주는 부부, 양가 부모와 친인척에 대해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 부부 등이다.

    ‘남자가 부엌에 드나들면 고추가 떨어진다’는 옛말이 무색하게 요즘 주방은 남성 전성시대다. 지난해 9월 일반인을 상대로 열린 ‘고기요리 콘테스트’ 대상 수상자도 미국계 설계회사에서 18년간 관리업무만 해온 평범한 남성 샐러리맨. 이런 현실을 입증이라도 하듯 강남구 압구정동에 개원한 한 피부과 전문의는 “피부질환으로 내원하는 월 40여명의 남성 중 15% 정도가 손바닥이 딱딱하게 굳고 피부가 빨갛게 변하는 전형적인 주부습진 증상을 보이고 있다”고 전한다.

    이런 변화의 바람이 한층 발전해 남성들의 당당한 전업주부(主夫·Househusband) 선택도 늘고 있는 분위기. 특히 지난 97년 IMF사태를 기점으로 재충전을 위해 직장을 그만두거나 실직한 남편을 대신해 아내가 생업을 맡는 부부간 역할 바꾸기가 부쩍 증가했다.

    “적성이요? 먹고 사는 일도 적성으로 합니까. 친구들이 남자 망신 다 시킨다고 하면 전 ‘그래, 너도 한번 해봐라. 직장생활보다 힘든 게 살림이다’고 말합니다. 내가 처한 상황에서 가족에게 중요한 일을 할 따름입니다.”

    부부가 함께 운영하던 총포무역업이 IMF 사태로 어려움에 처하자 동대문시장에서 의류업을 시작한 아내 대신 3년째 살림을 도맡아온 배춘복씨(44·경기도 고양시 화정동). 지난해 여성신문사가 주최한 평등부부상을 받은 그는 보무도 당당한 전업 프로주부다.

    “살림도 회사 경영처럼 계획을 세우고 하면 잔손이나 생활비를 줄일 수 있는 노하우가 많다”고 말하는 그는 귀가 길에 집 주변 대형할인점에 들러 장보는 것을 잊지 않는다. 48평의 아파트는 청소를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거실의 가구는 모두 방안으로 옮겼고, 가스레인지 옆에 차곡차곡 정리된 냄비와 솥에선 광이 난다. 배씨가 살림을 시작한 뒤로 부인이 살림할 때보다 생활비가 약 40% 정도 덜 든다.

    “처음 한두 달은 힘들더군요. 어떤 것을 먼저 해야 하는지, 청소는 어떻게 하고, 아이들 교육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3개월 정도 지나면서부터는 차츰 체계가 잡히기 시작하고 재미도 느껴지더군요.”

    배씨가 새 일 대신 가사를 택한 이유는 작은아들(8)이 빈 집에 열쇠를 따고 들어오기에는 너무 어리다는 것. 당시 배씨는 아내에게 “내가 살림을 맡겠다. 장사에만 전념해라. 아이들 교육도 내 식대로 시키겠다”고 선언했다. 학원을 전전하던 아이들이 지금은 아빠와 함께 아마추어 무선을 즐긴다. “올해 초등학교 2학년이 된 둘째아이가 4학년이 될 때까지는 살림을 할 생각입니다. 내 작은 노력으로 아이들이 건강하게 크는 모습을 보는 것은 더없는 기쁨이거든요.”

    남편과 아내의 역할을 바꾼 ‘체인지족’은 결혼과 부부생활에 대한 의식변화에 따라 앞으로 더욱 늘어날 전망. 한 결혼정보회사가 최근 20, 30대 미혼남녀 500여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의하면 ‘남자가 가정살림을 하고 여자가 사회생활을 하는 것’에 대해 72.9%의 남성이 ‘상황에 따라 가능하다’고 답했다. 연령별로는 30대 남성 중 67.9%가 ‘하우스 허즈번드’를 찬성한데 비해 20대는 75.6%가 같은 응답을 했다. 이는 30대 여성의 58.3%, 20대 여성의 57.4%를 크게 앞지른 것.

    미국에서는 1971년 오노 요코 여사와의 사이에 아들이 태어나자 최초로 ‘전업주부’를 선언했던 존 레논 이후 현재 전업주부를 선택한 남성수만 해도 200만~300만명 정도로 알려져 있다. 최근엔 대기업 최고경영자(CEO)로 주목받고 있는 여성들의 남편이 모두 전업주부여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대표적인 경우는 최근 미국의 컴퓨터 및 프린터 제조회사인 휼렛패커드 최고경영자(CEO) 칼리 피오리나. 84년 미국의 통신회사 AT&T에서 함께 일하던 칼리와 사내 결혼한 프랭크는 아내의 능력을 인정하고 몇 년 전부터 “언젠가 내 아내는 대기업의 CEO가 될 것”이라고 얘기하고 다녔다는 것. 실제로 그는 아내의 CEO 가능성이 엿보이던 98년 7월부터 과감히 직장을 때려치우고 전업주부로 변신, 바쁜 부인 대신 가사를 도맡으며 헌신적인 외조를 아끼지 않았다.

    21세기는 3F, 즉 여성성(Femin-ine), 감성(Feeling), 상상력(Fiction) 등 여성적 특성들의 가치가 부각돼, 여성이 능력을 발휘하는 시대가 될 것이라는 전망. 지난 세기 남성들이 치열한 생존경쟁의 무대에서 성공시대를 열어간 비결 가운데 하나는 ‘아내의 내조’였다. 그렇다면 이제는 능력있는 아내에 대한 외조도 남성들의 또다른 ‘능력’으로 요구되는 시대가 도래한 셈이다.

    “性 역할도 퓨전시대”

    남녀 역할분업은 구습… 남편 집안일 크게 늘 것


    “‘남자는 바깥일, 여자는 집안일’ 식 성역할 분업은 변화하는 사회에서 결코 모범답안이 될 수 없습니다. 또 여성이 경제활동을 하고 남성이 집안일을 한다고 해서 특별한 시선으로 볼 필요도 없습니다. 개인의 다양성과 선택을 존중해주는 분위기가 아쉬울 따름입니다.”

    남성학 박사인 정채기교수(사진)는 모든 변화가 “진행중”이라고 말한다. 짧은 산업혁명기를 거치고 바로 정보화 사회로 접어든 한국에서 가치관이나 사회시스템은 모두 혼란기에 있는데, 기혼여성의 재산권이 인정되고 경제활동이 가능한 시대에 부부관계만 전통적인 성역할 분업론을 주장하는 것은 산업화 과정의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의 유습이라는 해석이다.

    정교수는 요즘 남성들이 컬러플한 아내, 즉 경제적 능력과 성적-문화적 감각을 갖춘 아내를 원하는 것처럼 여성들 또한 가사나 육아, 자기 성장을 함께 꿈꿀 수 있는 남성을 원한다고 말한다.

    “젊은 세대나 여성들의 의식은 급속도로 바뀌고 있는데 이런 변화에 대해 아직 자각하지 못하는 남성들이 상당수입니다. 여기에는 기득권을 쉽게 포기하고 싶지 않은 심리도 작용하고 있지요. 새로운 상황에 걸맞은 눈높이와 걸음걸이를 찾는 것, 이게 남성다움입니다.”

    아이들 교육을 아내 몫으로만 돌리고, 아내가 없으면 식사 한 끼 해결하지 못하거나, 와이셔츠 넥타이 손수건 양말 등을 아내가 갖춰 주기만 기다리는 남편이라면 이것은 성역할 분담 차원이 아니라 개인의 품성으로 볼 문제라는 게 정교수의 주장이다.

    정교수는 일본의 경우 젊은 부부들 중 수입이 많은 쪽이 직장에 나가거나 가정주부의 역할을 남자가 맡는 인구가 늘고 있다고 소개한다. 남성 전업주부들을 상대로 하는 요리강습회나 보육강좌가 개설돼 있고 여성NGO에서 남성들의 살림법이나 요리강좌 등을 많이 지원하고 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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