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대중서 작가로 각광받는 정통 미술사학자 노성두 씨는 최근 한 인터뷰에서 인세를 제대로 주지 않는 출판사들에 대한 이야기로 충격을 안겨줬다. 노씨는 한국학술진흥재단(현 한국연구재단)의 프로젝트에 참가해 ‘바보새’를 번역했다. ‘바보새’는 독일문학사에서 괴테의 ‘파우스트’보다 비중 있게 다루는 작품. 처음에는 5명이 번역에 참여했지만 라틴 성서와 서양 신화에 대한 몰이해로 다른 사람들이 모두 그만둔 탓에 혼자 번역을 할 수밖에 없었다. 1년 넘게 이 책을 번역하면서 독일 마인츠에도 두 번 다녀오고 자료도 잔뜩 샀지만, 그가 받은 인세는 100만 원. 그러나 일주일 만에 표지작업을 끝낸 유명 북디자이너에게는 500만 원을 지급했다.
필자도 비슷한 경험을 한 적 있다. 1990년대 중반 근무하던 출판사에서 한 예술서를 출간하면서 벌어졌던 일이다. 필자보다 연륜이 한참 적은 북디자이너에게 당시 필자 월급보다 3배나 많은 작업비를 준 것. 북디자이너는 그 두꺼운 책의 편집디자인을 보름 만에 끝냈다. 문제는 작업비가 아닌, 편집디자인의 완성도였다. 그 일을 계기로 필자는 한 문화센터에 북디자인 강좌 신설을 부탁했다. 강사로는 한국 북디자인 개척자인 정병규 선생을 추천했다. 자기 분노를 해결하기 위한 방편이기도 했다.
그 강좌를 계기로 정 선생을 쫓아다니며 알게 된 이가 일본과 중국을 대표하는 북디자이너 스기우라 고헤이와 뤼징런 선생이다. 각 나라를 대표하는 북디자이너는 문화와 사상에 대한 식견이 워낙 뛰어나 늘 많은 가르침을 안겨준다. 그들이 나누는 대화를 듣기만 해도 많은 공부가 됨은 물론이다. 2004년 도쿄국제도서전에서 스기우라 선생의 ‘책의 시공(時空)을 보다’라는 강연을 들었다. 그는 책의 원형인 종이 전지 한 장을 30번 접은 것을 잘라 이으면 그 거리가 38만5000km가 돼 달까지의 거리와 같으며, 53번 접으면 1억5000만km로 태양까지 이를 수 있다는 통계를 보여줬다. 그러면서 종이가 가진 추상적인 기능성의 개념이 아닌, 광대한 공간(거리)이 책 한 권에 담겨 있음을 함축적으로 설명하면서 한 권의 책이 곧 우주라는 결론을 도출해냈다.
강연이 끝난 후 스기우라 선생에게 정 선생이 디자인한 책을 선물했다. 그는 일본 제자들 앞에서 그 책을 넘겨가며 한국 북디자인이 가진 여백의 미를 제대로 보라는 설명을 꽤나 오랫동안 했다. 이때 필자는 책은 글뿐 아니라 행간과 여백까지 읽어야 할 대상이라는 사실을 깊이 각인했다.
2007년 ‘중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으로 뽑힌 그림책 ‘나는 한 마리 개미’(저우쭝웨이 글, 주잉춘 그림, 펜타그램)는 책에서 여백이 얼마나 많은 상상을 이끌어낼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 책의 많은 부분은 흰 여백에 작은 개미의 움직임만을 간결하게 보여준다. 정 선생은 이 책의 여백은 개미에게는 한없이 크고 넓기만 한 인간 세상이라고 해석했다. 총천연색의 세속적인 인간 세상이 표백돼 여백으로 책에 등장했다는 것이다.
종이책은 단지 정보를 전달하는 기능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정보의 추상성을 넘어, 정보의 물성적 차원과 종이책이 가진 입체적 아름다움을 가시화함으로써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가야 한다. 그만큼 실력을 갖춘 북디자이너가 필요할 수밖에 없다. 노씨는 “텍스트를 꼼꼼히 읽고 책을 만드는 북디자이너는 없다”고 말하면서 자신의 무능을 덮으려고만 하던, 어느 유명 출판사 사장의 딸인 북디자이너와 작업한 씁쓸한 경험도 털어놓았다. 노씨의 발언을 계기로 우리 출판계는 저자, 역자, 편집자, 북디자이너, 출판업자, 유통업자, 독자 등 ‘구텐베르크 논리’를 구성하는 사람 모두가 서로를 배려하고 이해하는 가장 기본적인 자세부터 다시 갖춰야 하지 않을까 싶다.
1958년 출생.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 ‘학교도서관저널’ ‘기획회의’ 등 발행. 저서 ‘출판마케팅 입문’ ‘열정시대’ ‘20대, 컨셉력에 목숨 걸어라’ ‘베스트셀러 30년’ 등 다수.
필자도 비슷한 경험을 한 적 있다. 1990년대 중반 근무하던 출판사에서 한 예술서를 출간하면서 벌어졌던 일이다. 필자보다 연륜이 한참 적은 북디자이너에게 당시 필자 월급보다 3배나 많은 작업비를 준 것. 북디자이너는 그 두꺼운 책의 편집디자인을 보름 만에 끝냈다. 문제는 작업비가 아닌, 편집디자인의 완성도였다. 그 일을 계기로 필자는 한 문화센터에 북디자인 강좌 신설을 부탁했다. 강사로는 한국 북디자인 개척자인 정병규 선생을 추천했다. 자기 분노를 해결하기 위한 방편이기도 했다.
그 강좌를 계기로 정 선생을 쫓아다니며 알게 된 이가 일본과 중국을 대표하는 북디자이너 스기우라 고헤이와 뤼징런 선생이다. 각 나라를 대표하는 북디자이너는 문화와 사상에 대한 식견이 워낙 뛰어나 늘 많은 가르침을 안겨준다. 그들이 나누는 대화를 듣기만 해도 많은 공부가 됨은 물론이다. 2004년 도쿄국제도서전에서 스기우라 선생의 ‘책의 시공(時空)을 보다’라는 강연을 들었다. 그는 책의 원형인 종이 전지 한 장을 30번 접은 것을 잘라 이으면 그 거리가 38만5000km가 돼 달까지의 거리와 같으며, 53번 접으면 1억5000만km로 태양까지 이를 수 있다는 통계를 보여줬다. 그러면서 종이가 가진 추상적인 기능성의 개념이 아닌, 광대한 공간(거리)이 책 한 권에 담겨 있음을 함축적으로 설명하면서 한 권의 책이 곧 우주라는 결론을 도출해냈다.
강연이 끝난 후 스기우라 선생에게 정 선생이 디자인한 책을 선물했다. 그는 일본 제자들 앞에서 그 책을 넘겨가며 한국 북디자인이 가진 여백의 미를 제대로 보라는 설명을 꽤나 오랫동안 했다. 이때 필자는 책은 글뿐 아니라 행간과 여백까지 읽어야 할 대상이라는 사실을 깊이 각인했다.
2007년 ‘중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으로 뽑힌 그림책 ‘나는 한 마리 개미’(저우쭝웨이 글, 주잉춘 그림, 펜타그램)는 책에서 여백이 얼마나 많은 상상을 이끌어낼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 책의 많은 부분은 흰 여백에 작은 개미의 움직임만을 간결하게 보여준다. 정 선생은 이 책의 여백은 개미에게는 한없이 크고 넓기만 한 인간 세상이라고 해석했다. 총천연색의 세속적인 인간 세상이 표백돼 여백으로 책에 등장했다는 것이다.
종이책은 단지 정보를 전달하는 기능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정보의 추상성을 넘어, 정보의 물성적 차원과 종이책이 가진 입체적 아름다움을 가시화함으로써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가야 한다. 그만큼 실력을 갖춘 북디자이너가 필요할 수밖에 없다. 노씨는 “텍스트를 꼼꼼히 읽고 책을 만드는 북디자이너는 없다”고 말하면서 자신의 무능을 덮으려고만 하던, 어느 유명 출판사 사장의 딸인 북디자이너와 작업한 씁쓸한 경험도 털어놓았다. 노씨의 발언을 계기로 우리 출판계는 저자, 역자, 편집자, 북디자이너, 출판업자, 유통업자, 독자 등 ‘구텐베르크 논리’를 구성하는 사람 모두가 서로를 배려하고 이해하는 가장 기본적인 자세부터 다시 갖춰야 하지 않을까 싶다.
1958년 출생.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 ‘학교도서관저널’ ‘기획회의’ 등 발행. 저서 ‘출판마케팅 입문’ ‘열정시대’ ‘20대, 컨셉력에 목숨 걸어라’ ‘베스트셀러 30년’ 등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