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은 사람을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다. ‘메스’라 불리는 수술용 칼은 인간에게 생명을 주지만, ‘검’과 ‘도’라 불리는 칼은 목숨을 빼앗는다. 여기, 그 칼로 세상을 바꾸려는 사내들이 있다. 그러나 불행히도 두 사람이 꿈꾸는 칼의 노래는 합창이 아니라, 그 방향조차 반대로 허공을 가르는 악연의 한판승부다.
이준익 감독의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은 영화 형식을 이야기하지 않고는 그 내용조차 이해하기 어려운 작품이다. 영화는 첫 장면부터 이몽학 역의 차승원을 빅 클로즈업으로 잡아낸다. 얼굴이 화면을 가득 채우는 저 장면. 어디서 봤을까? 바로 ‘석양의 무법자’의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잡는 세르지오 레오네의 연출이다. 반면 황정민이 분한 맹인 검객 황정학과 그의 제자 견자가 싸울 때 카메라는 두 사람을 나란히 한 화면에, 그것도 멀찍이서 지켜보는 롱샷을 견지한다. 이러한 형식적인 대비는 이몽학이 꾸는 꿈과 황정학이 꾸는 꿈이 ‘세상을 바꾼다’는 대의명분에도 불구하고 방법적인 면에서 어떻게 천양지차인지 웅변적으로 설명해준다.
이몽학은 이름에 ‘몽’자가 들어 있는 상징성에서도 알 수 있듯 꿈으로 살아가는 이다. 그를 사랑하는 기생 백지는 복수를 꿈꾸는 견자에게 (몽학은 견자의 아비와 형제를 죽였다) 매몰차게 내뱉는다. “넌 그 사람한테 안 돼. 넌 꿈이 없잖아.” 그러나 몽학이 꾸는 꿈은 대의를 등에 업은 사적인 욕망의 추동력 외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는 게 없다. 즉, 그는 관계성을 갖지 못한 자다. ‘석양의 무법자’에서 ‘돈’이란 실질적 욕망 외에는 별다른 대의가 없었던 나쁜 놈 ‘the bad’에 해당한다. 그러니 그가 단독으로 카메라에 잡힐밖에.
이몽학이 짐승의 그것 같은 송곳니를 드러내며 검을 쥘 때, 포효하는 육식동물의 본성은 유감없이 발휘된다. 그러나 황정학은 끝내 관계성을 포기하지 못한다. 그는 이 영화에서 오히려 가장 잘 보는 자, 슬픔을 아는 자, 스승이 될 만한 자다. 구렁이 담 넘어가듯 눙치지만, 정학은 슬픔을 아는 사내다. 이런 황정학을 잡을 때, 이몽학과 달리 카메라는 뒤로 물러서는 쪽을 택한다.
사실 이몽학과 황정학의 대결은 눈과 귀의 대결, 꿈과 정의의 대결, 욕망과 가치의 대결, 칼 뒤에 숨은 자와 칼 앞에 나선 자의 대결이나 다름없다. 그리하여 이몽학에게 상한 눈 부릅뜨며 “가지 말라”고 붙잡는 황정학의 애끓는 호소는 욕망의 추동으로 질주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읍소하는 가녀린 것들의 애원으로 공명한다. 이렇게 이 감독은 견자와 이몽학, 황정학 세 주연의 만나고 흩어지는 이합집산적 여정을 통해 ‘황산벌’ ‘왕의 남자’에서 현실을 비틀고 비판했던 것처럼, 체제에 갇혀 몸부림치는 자들의 해학과 비애를 반반씩 섞어낸다.
장난꾸러기에 퇴행적인 ‘왕의 남자’의 연산처럼, 이 영화가 그린 왕 역시 다혈질에 개인적인 살길만 찾는 능수능란한 정치꾼이다.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에서 재현되는 조선 땅은 늘 선혈이 낭자한 폐허다. 권력 뒤에 숨은 양반도 죽고, 가면 뒤에 숨은 광대도 죽고, 칼 뒤에 숨은 검객도 죽고, 결국 내부의 괴멸로 꿈들조차 꿈속에서만 살아갈 수 있는 땅이다.
그러나 정서적으로 내밀하고 섬세해 보였던 ‘왕의 남자’에 비해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은 다소 거칠고, 캐릭터와 스토리의 밀도가 떨어지는 아쉬움을 남긴다. 스토리만 보면 딱 ‘극장판 추노’이고, 하는 일 없이 스크린을 채우는 기생 백지는 ‘민폐 언년이’의 환생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그러나 능청스럽고 구리고 깐족대는 황정민의 연기는 단연 압권이며, 신인배우 백성현의 발견 또한 상쾌하다.
결국 달은 구름을 벗어날 수 있을까? 구름이 끼어도 달은 거기 있는데, 사람들은 달을 보지 못하는데…. 그럼 결국 손가락만 보고 있나. 세상이 너무 깜깜해지면 구름은 다시 별에게 환한 관심의 자리를 내줄 터인데….
이준익 감독의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은 영화 형식을 이야기하지 않고는 그 내용조차 이해하기 어려운 작품이다. 영화는 첫 장면부터 이몽학 역의 차승원을 빅 클로즈업으로 잡아낸다. 얼굴이 화면을 가득 채우는 저 장면. 어디서 봤을까? 바로 ‘석양의 무법자’의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잡는 세르지오 레오네의 연출이다. 반면 황정민이 분한 맹인 검객 황정학과 그의 제자 견자가 싸울 때 카메라는 두 사람을 나란히 한 화면에, 그것도 멀찍이서 지켜보는 롱샷을 견지한다. 이러한 형식적인 대비는 이몽학이 꾸는 꿈과 황정학이 꾸는 꿈이 ‘세상을 바꾼다’는 대의명분에도 불구하고 방법적인 면에서 어떻게 천양지차인지 웅변적으로 설명해준다.
이몽학은 이름에 ‘몽’자가 들어 있는 상징성에서도 알 수 있듯 꿈으로 살아가는 이다. 그를 사랑하는 기생 백지는 복수를 꿈꾸는 견자에게 (몽학은 견자의 아비와 형제를 죽였다) 매몰차게 내뱉는다. “넌 그 사람한테 안 돼. 넌 꿈이 없잖아.” 그러나 몽학이 꾸는 꿈은 대의를 등에 업은 사적인 욕망의 추동력 외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는 게 없다. 즉, 그는 관계성을 갖지 못한 자다. ‘석양의 무법자’에서 ‘돈’이란 실질적 욕망 외에는 별다른 대의가 없었던 나쁜 놈 ‘the bad’에 해당한다. 그러니 그가 단독으로 카메라에 잡힐밖에.
이몽학이 짐승의 그것 같은 송곳니를 드러내며 검을 쥘 때, 포효하는 육식동물의 본성은 유감없이 발휘된다. 그러나 황정학은 끝내 관계성을 포기하지 못한다. 그는 이 영화에서 오히려 가장 잘 보는 자, 슬픔을 아는 자, 스승이 될 만한 자다. 구렁이 담 넘어가듯 눙치지만, 정학은 슬픔을 아는 사내다. 이런 황정학을 잡을 때, 이몽학과 달리 카메라는 뒤로 물러서는 쪽을 택한다.
사실 이몽학과 황정학의 대결은 눈과 귀의 대결, 꿈과 정의의 대결, 욕망과 가치의 대결, 칼 뒤에 숨은 자와 칼 앞에 나선 자의 대결이나 다름없다. 그리하여 이몽학에게 상한 눈 부릅뜨며 “가지 말라”고 붙잡는 황정학의 애끓는 호소는 욕망의 추동으로 질주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읍소하는 가녀린 것들의 애원으로 공명한다. 이렇게 이 감독은 견자와 이몽학, 황정학 세 주연의 만나고 흩어지는 이합집산적 여정을 통해 ‘황산벌’ ‘왕의 남자’에서 현실을 비틀고 비판했던 것처럼, 체제에 갇혀 몸부림치는 자들의 해학과 비애를 반반씩 섞어낸다.
장난꾸러기에 퇴행적인 ‘왕의 남자’의 연산처럼, 이 영화가 그린 왕 역시 다혈질에 개인적인 살길만 찾는 능수능란한 정치꾼이다.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에서 재현되는 조선 땅은 늘 선혈이 낭자한 폐허다. 권력 뒤에 숨은 양반도 죽고, 가면 뒤에 숨은 광대도 죽고, 칼 뒤에 숨은 검객도 죽고, 결국 내부의 괴멸로 꿈들조차 꿈속에서만 살아갈 수 있는 땅이다.
그러나 정서적으로 내밀하고 섬세해 보였던 ‘왕의 남자’에 비해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은 다소 거칠고, 캐릭터와 스토리의 밀도가 떨어지는 아쉬움을 남긴다. 스토리만 보면 딱 ‘극장판 추노’이고, 하는 일 없이 스크린을 채우는 기생 백지는 ‘민폐 언년이’의 환생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그러나 능청스럽고 구리고 깐족대는 황정민의 연기는 단연 압권이며, 신인배우 백성현의 발견 또한 상쾌하다.
결국 달은 구름을 벗어날 수 있을까? 구름이 끼어도 달은 거기 있는데, 사람들은 달을 보지 못하는데…. 그럼 결국 손가락만 보고 있나. 세상이 너무 깜깜해지면 구름은 다시 별에게 환한 관심의 자리를 내줄 터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