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5월 1일 자정 무렵. 때늦은 봄비가 촉촉이 내리던 그때, 서울 종로 창덕궁 낙선재에서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가 눈을 감았다. 영친왕 이은(1897~1970)의 임종을 지킨 이는 부인 이방자(1901~1989) 여사와 아들 이구 황태손(1931~2005) 부부뿐이었다. 정신질환을 앓고 있던 덕혜옹주(1912~1989)는 오빠의 부고 소식을 듣고도 멍한 표정이었다. 굴곡 많았던 인생에 비해 너무 초라한 작별이었다.
황사손의 삶을 살고 있는 이원 씨
이후 황실은 시나브로 잊혔다. 2006년 드라마 ‘궁’이 큰 인기를 끌면서 국민들이 황실 복원에 관심을 갖고 인터넷을 중심으로 황실복원운동이 일었지만 오래가지는 못했다. 경술국치 100년이자 영친왕 서거 40년을 맞은 옛 황실의 후예들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생존한 황실의 후손은 모두 영친왕의 형인 의친왕(1877~1955)의 자녀와 손자들이다. 의친왕은 모두 12남 9녀를 뒀는데 그중 5녀 이해원(81) 씨, 9남 이갑(72) 씨, 대중가요 ‘비둘기집’으로 유명한 10남 이석(69) 씨만 신분을 밝힌 채 살고 있다. 황실의 적통으로 인정받은 이는 이갑 씨의 아들 이원(45) 씨다. 1948년 국가로부터 황실 관련 모든 권한을 넘겨받은 (사)전주이씨 대동종약원은 영친왕의 아들로 후사 없이 2005년 서거한 이구 황태손(1931~2005)의 사후 양자로 이원 씨를 인정했다. 하지만 몇몇 후손이 이를 인정하지 않아 ‘사라진 황실’의 승계 문제로 갈등의 골이 깊다.
뉴욕에서 신문방송학을 공부하고 케이블방송 PD로 일하다 국내 한 홈쇼핑회사 창립을 이끌었던 이원(45·본명 이상협) 씨는 사회인으로서 한창 꽃피울 나이인 마흔에 이구 황태손이 생전 자신을 양자로 지명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후 그는 황사손(皇嗣孫·선왕이 죽은 후 인정된 황손)의 삶을 살게 됐다.
그는 조선왕릉 40기에 대한 제사를 올리고 모든 황실 행사를 주관한다. 제사를 합하면 100번이 넘지만 월급을 받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이원 씨는 “우리의 제향의식은 중국 학자들도 놀랄 정도로 대단한 무형유산 중 하나”라며 자부심을 보였다. 그는 문화재 되찾기, 황실 관련 문화 콘텐츠 개발, 타국 황실과 교류 등의 방안을 모색 중이다. 그는 “대한민국이 패배주의에서 벗어나 정통성, 민족성을 회복할 수 있도록 돕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그러나 이원 씨의 숙부인 이석 씨는 이원 씨를 황실을 잇는 적통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는 2005년 이구 황태손 장례식 날 이원 씨가 황사손이 되는 것을 인정할 수 없다고 강하게 반발했다. 전주 한옥마을에 머물며 (재)조선황실문화재단 총재를 맡고 있는 이석 씨는 영친왕계는 일본의 피가 섞였으므로 영친왕계 양자인 이원 씨는 일본계를 잇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구 황태손은 영친왕과 일본 황족 출신인 이방자 여사의 아들로 절반은 일본 피라는 게 사실이다. 이석 씨는 일제 잔재의 청산이라는 의미에서도 이구 황태손 쪽이 아니라 의친왕계가 잇는 게 옳다고 주장한다. 또한 고종의 네 자녀 중 의친왕만이 항일운동을 했으므로 의친왕계가 황실 전통을 잇는 게 낫다는 견해도 있다. 오랫동안 대한제국 황실 연구를 해온 서울교대 안천 교수는 “이구 황태손은 ‘굴욕의 역사는 나에서 끝나야 한다’고 말해왔다. 이는 자신의 후대를 잇지 않겠다는 말”이라며 이석 씨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이석 씨의 논리는 현존하는 의친왕계 황손 중 한국에 거주하는 남자 어른이 자신이기 때문에 자신이 황실의 전통을 계승해야 한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황실 관련 연구자 대부분이 이석 씨의 주장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원 씨는 “집안에서 숙부(이석) 이야기가 나오면 어른들은 혀를 내두르신다”고 전했다.
실제 이석 씨는 스스로를 ‘마지막 황손’이라고 칭하며 각종 방송과 강연에서 “옛날 세자들이 살았던 사동궁에서 초등학교를 다녔다” “점심시간 때는 상궁이 커다란 목판에 식사를 차려서 학교로 가져왔고, 다 못 먹고 남긴 음식은 학교 선생님들이 나눠 먹었다”는 등의 이야기로 인기를 끌었다. 황실에 대해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막연한 호기심을 자극했던 것.
하지만 황손 및 황실 관련 단체 사람들은 이 이야기가 모두 “지어낸 이야기”라고 입을 모았다. 방송에서 지어낸 이야기로 도덕성에 심한 상처를 입기도 했다. 황실 관련 민간 연구단체인 우리황실사랑회 이승욱 위원장은 “41년생인 이석 씨가 초등학생였을 때는 6·25전쟁 시기로, 황실이 모든 재산을 잃어 사동궁은 이미 황실 재산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대한제국 여황제는 이해원 씨?
한편 2006년 9월 29일 서울 시내 한 호텔에서 제30대 왕위승계식이 열렸다. 대한제국황족회가 의친왕 2녀 이해원 여사를 대한제국 여황제로 옹립한 것. 경기도 한 월세방에서 아들과 함께 힘든 삶을 이어왔던 이 여사는 왕위를 승계받아 대한제국 최초의 여왕이 됐다. 이 여사가 살게 된 서울 중구의 한 한옥에 ‘대한제국 황실’이라는 현판도 걸었다.
4년이 지난 2010년 4월 ‘대한제국 여황제’ 이해원 여사가 거주하는 ‘대한제국 황실’을 찾았다. 늦은 봄 때아닌 강풍이 부는데 언덕길에 위태롭게 서 있는 집에는 오가는 사람이 없어 을씨년스러웠다. 대문을 두드렸지만 한참 인기척이 없다 한 사람이 나왔다. 여사를 만날 것을 요청했으나 “폐하가 아프셔서 힘들다”는 대답만 들을 수 있었다.
이해원 여사를 ‘황제로 옹립’하는 데 앞장선 이초남 씨는 본래 의친왕의 2남 고(故) 이우(1912~1945) 공의 숨겨진 아들이라고 주장하던 인물이다. 하지만 그의 주장은 DNA 검사 결과 거짓으로 밝혀졌고, 2006년 황제 옹립 당시 황족회 사무총장으로 일하던 그의 행방은 현재 묘연한 상태. 안 교수는 “황실이 되살아날 것 같으니까 한자리라도 차지하려고 여러 사람이 달라붙었다”고 설명했다.
21세기 황실 다툼에 대한 국민들의 시선은 싸늘하다. 조선왕조를 파국으로 몰아넣던 왕좌 다툼과 매우 닮았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거세다. 한국외대 정진석 명예교수는 “황실이 망할 때 최종 결정을 한 건 왕이다. 나라가 위기에 빠지면 자기 일처럼 나서고, 아무리 힘들게 한 지도자라도 안쓰러워하는 우리 국민에게 책임지는 모습은 보여주지 않은 채 자기들끼리 다투는 모습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곱지 않은 시선을 의식한 듯 이원 씨는 “가족끼리 다투는 모습을 보여드려 죄스럽다. 황실 후손의 화합을 이끌어 역사에 사죄하겠다”면서 다음과 같이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황실의 마지막 모습을 기억하는 집안 어른들의 이야기를 듣고 문화 콘텐츠로 만들고 민간 문화대사로 활동한다면, 역사에 진 빚을 조금이라도 갚을 수 있지 않을까요?”
황사손의 삶을 살고 있는 이원 씨
황사손 이원, 의친왕 10남 이석(왼쪽부터).
생존한 황실의 후손은 모두 영친왕의 형인 의친왕(1877~1955)의 자녀와 손자들이다. 의친왕은 모두 12남 9녀를 뒀는데 그중 5녀 이해원(81) 씨, 9남 이갑(72) 씨, 대중가요 ‘비둘기집’으로 유명한 10남 이석(69) 씨만 신분을 밝힌 채 살고 있다. 황실의 적통으로 인정받은 이는 이갑 씨의 아들 이원(45) 씨다. 1948년 국가로부터 황실 관련 모든 권한을 넘겨받은 (사)전주이씨 대동종약원은 영친왕의 아들로 후사 없이 2005년 서거한 이구 황태손(1931~2005)의 사후 양자로 이원 씨를 인정했다. 하지만 몇몇 후손이 이를 인정하지 않아 ‘사라진 황실’의 승계 문제로 갈등의 골이 깊다.
뉴욕에서 신문방송학을 공부하고 케이블방송 PD로 일하다 국내 한 홈쇼핑회사 창립을 이끌었던 이원(45·본명 이상협) 씨는 사회인으로서 한창 꽃피울 나이인 마흔에 이구 황태손이 생전 자신을 양자로 지명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후 그는 황사손(皇嗣孫·선왕이 죽은 후 인정된 황손)의 삶을 살게 됐다.
그는 조선왕릉 40기에 대한 제사를 올리고 모든 황실 행사를 주관한다. 제사를 합하면 100번이 넘지만 월급을 받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이원 씨는 “우리의 제향의식은 중국 학자들도 놀랄 정도로 대단한 무형유산 중 하나”라며 자부심을 보였다. 그는 문화재 되찾기, 황실 관련 문화 콘텐츠 개발, 타국 황실과 교류 등의 방안을 모색 중이다. 그는 “대한민국이 패배주의에서 벗어나 정통성, 민족성을 회복할 수 있도록 돕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그러나 이원 씨의 숙부인 이석 씨는 이원 씨를 황실을 잇는 적통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는 2005년 이구 황태손 장례식 날 이원 씨가 황사손이 되는 것을 인정할 수 없다고 강하게 반발했다. 전주 한옥마을에 머물며 (재)조선황실문화재단 총재를 맡고 있는 이석 씨는 영친왕계는 일본의 피가 섞였으므로 영친왕계 양자인 이원 씨는 일본계를 잇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구 황태손은 영친왕과 일본 황족 출신인 이방자 여사의 아들로 절반은 일본 피라는 게 사실이다. 이석 씨는 일제 잔재의 청산이라는 의미에서도 이구 황태손 쪽이 아니라 의친왕계가 잇는 게 옳다고 주장한다. 또한 고종의 네 자녀 중 의친왕만이 항일운동을 했으므로 의친왕계가 황실 전통을 잇는 게 낫다는 견해도 있다. 오랫동안 대한제국 황실 연구를 해온 서울교대 안천 교수는 “이구 황태손은 ‘굴욕의 역사는 나에서 끝나야 한다’고 말해왔다. 이는 자신의 후대를 잇지 않겠다는 말”이라며 이석 씨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1959년 의친왕비 김수덕(1881~1964·가운데) 여사의 팔순을 맞아 한자리에 모인 황실 후손들.
실제 이석 씨는 스스로를 ‘마지막 황손’이라고 칭하며 각종 방송과 강연에서 “옛날 세자들이 살았던 사동궁에서 초등학교를 다녔다” “점심시간 때는 상궁이 커다란 목판에 식사를 차려서 학교로 가져왔고, 다 못 먹고 남긴 음식은 학교 선생님들이 나눠 먹었다”는 등의 이야기로 인기를 끌었다. 황실에 대해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막연한 호기심을 자극했던 것.
하지만 황손 및 황실 관련 단체 사람들은 이 이야기가 모두 “지어낸 이야기”라고 입을 모았다. 방송에서 지어낸 이야기로 도덕성에 심한 상처를 입기도 했다. 황실 관련 민간 연구단체인 우리황실사랑회 이승욱 위원장은 “41년생인 이석 씨가 초등학생였을 때는 6·25전쟁 시기로, 황실이 모든 재산을 잃어 사동궁은 이미 황실 재산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대한제국 여황제는 이해원 씨?
한편 2006년 9월 29일 서울 시내 한 호텔에서 제30대 왕위승계식이 열렸다. 대한제국황족회가 의친왕 2녀 이해원 여사를 대한제국 여황제로 옹립한 것. 경기도 한 월세방에서 아들과 함께 힘든 삶을 이어왔던 이 여사는 왕위를 승계받아 대한제국 최초의 여왕이 됐다. 이 여사가 살게 된 서울 중구의 한 한옥에 ‘대한제국 황실’이라는 현판도 걸었다.
4년이 지난 2010년 4월 ‘대한제국 여황제’ 이해원 여사가 거주하는 ‘대한제국 황실’을 찾았다. 늦은 봄 때아닌 강풍이 부는데 언덕길에 위태롭게 서 있는 집에는 오가는 사람이 없어 을씨년스러웠다. 대문을 두드렸지만 한참 인기척이 없다 한 사람이 나왔다. 여사를 만날 것을 요청했으나 “폐하가 아프셔서 힘들다”는 대답만 들을 수 있었다.
이해원 여사를 ‘황제로 옹립’하는 데 앞장선 이초남 씨는 본래 의친왕의 2남 고(故) 이우(1912~1945) 공의 숨겨진 아들이라고 주장하던 인물이다. 하지만 그의 주장은 DNA 검사 결과 거짓으로 밝혀졌고, 2006년 황제 옹립 당시 황족회 사무총장으로 일하던 그의 행방은 현재 묘연한 상태. 안 교수는 “황실이 되살아날 것 같으니까 한자리라도 차지하려고 여러 사람이 달라붙었다”고 설명했다.
21세기 황실 다툼에 대한 국민들의 시선은 싸늘하다. 조선왕조를 파국으로 몰아넣던 왕좌 다툼과 매우 닮았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거세다. 한국외대 정진석 명예교수는 “황실이 망할 때 최종 결정을 한 건 왕이다. 나라가 위기에 빠지면 자기 일처럼 나서고, 아무리 힘들게 한 지도자라도 안쓰러워하는 우리 국민에게 책임지는 모습은 보여주지 않은 채 자기들끼리 다투는 모습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곱지 않은 시선을 의식한 듯 이원 씨는 “가족끼리 다투는 모습을 보여드려 죄스럽다. 황실 후손의 화합을 이끌어 역사에 사죄하겠다”면서 다음과 같이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황실의 마지막 모습을 기억하는 집안 어른들의 이야기를 듣고 문화 콘텐츠로 만들고 민간 문화대사로 활동한다면, 역사에 진 빚을 조금이라도 갚을 수 있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