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강변에 우뚝 솟은 선돌과 전망대.
피서란 주말여행과 달리 한자리에 눌러앉아 모처럼의 여유와 휴가를 즐기는 방식이 이상적이다. 늦은 피서를 결심했다면 이왕이면 오래 머물고 싶을 정도로 안락한 ‘장소 선정’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필자의 경우 산 좋고 물 맑은, 게다가 음식까지 뛰어난 강원도 영월 땅을 나만의 피서지로 삼고 있다. 특히 영월군 수주면 법흥리는 산이 높고 골이 깊어 번잡한 세상사를 잊고 오래 쉬어갈 만한 곳이다.
사자산(1120m) 기슭에서 발원한 법흥계곡 물길은 법흥사를 거쳐 요선정 아래에서 서만이강과 합류해 주천강으로 흘러든다. 주천강은 다시 평창 쪽에서 흘러온 평창강의 물길을 보태 영월 서강을 이룬다. 서강의 최상류인 법흥계곡은 사자산과 백덕산(1350m) 기슭의 숱한 골짜기에서 청정옥수가 흘러든다. 1급수 맑은 물에만 서식한다는 옆새우, 열목어 등도 이곳에서는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또한 골짜기가 깊으면서도 물길 양쪽에 넓은 솔숲과 논밭이 형성돼 궁벽한 두메산골 느낌을 주지 않는다.
단종의 숨결 느껴지는 관음송·금표비 등 답사 필수
법흥계곡은 물놀이나 야영을 즐기기에 천혜의 자연조건을 갖췄다. 최상류 계류인데도 물살이 느릿하고 군데군데 적당한 깊이의 소(沼)나 웅덩이가 형성돼 있다. 법흥사 가는 진입로가 계곡의 물길을 따라 이어지기 때문에 접근성도 좋다. 또한 양쪽의 울창한 솔숲은 삼복염천의 따가운 햇살까지 차단한다. 법흥계곡을 거슬러 오르다 보면 솔밭캠프장 우리들캠프장 정든오토캠프장 남강캠프장 등 각종 편의시설을 갖춘 야영장과 오토캠핑장, 그리고 유럽식 펜션 건물이 잇따라 나타난다. 법흥계곡의 깊숙한 곳에 자리잡은 법흥사는 신라 선덕여왕 12년(643)에 자장율사가 중국 당나라에서 가져온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창건한 고찰(古刹)이다. 오늘날 오대산 상원사, 태백산 정암사, 영취산 통도사, 설악산 봉정암 등과 함께 우리나라 5대 적멸보궁으로 꼽힌다. 그래서 적멸보궁 건물 안에는 불상이 없고, 대신 뒤쪽 풍경이 훤히 보이는 유리창 하나가 뚫려 있다. 그 창을 통해 보이는 언덕이 바로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봉안된 곳이다.
법흥계곡의 물길이 흘러드는 영월 서강 주변에는 요선정, 한반도지형, 선돌, 청령포 등의 절경이 산재한다. 이 가운데 법흥계곡과 서만이강의 합수머리 부근에 있는 요선정은 우뚝 솟은 절벽 위에 자리잡은 정자다. 그 옆에 있는 물방울 모양의 바위에는 동안의 마애불이 조각돼 있고, 앞쪽에는 작고 소박한 삼층석탑을 만날 수 있다.
수주면 서강변 절벽에 올라앉은 요선정과 마애여래불상.
영월군 서면 옹정리 선암마을에 형성된 한반도지형은 서강의 물길이 굽이치면서 만들어놓은 걸작이다. 맞은편 산등성이의 전망대에서 바라보면 영락없이 한반도의 축소판이다. 동쪽의 급경사와 깊은 바다, 서쪽의 완만한 평야지대, 그리고 백두대간의 무성한 숲과 땅끝 해남, 포항 호미곶까지 또렷이 표현돼 있다. 이맘때쯤에는 한반도지형이 한눈에 들어오는 전망대 주변에 근래 심어놓은 무궁화가 만개해 장관을 이룬다.
선돌은 단종의 능묘인 장릉 가는 길의 소나기재 정상 부근에 자리한 절경이다. 소나기재 정상에서 숲길을 따라 50m가량 들어가면 선돌의 장관이 펼쳐진다. 물길과 산자락의 조화가 빼어난 영월 땅에서도 가장 수려하고 장엄한 경관이다. 까마득히 높은 절벽에 서면 태극을 이루며 굽이치는 서강의 짙푸른 물길과 끝없이 중첩된 백두대간의 산줄기가 한 폭의 진경산수처럼 장대한 경관을 펼쳐 보인다.
선돌에서 아스라이 보이는 청령포 역시 서강의 대표적인 절경이다. 청령포는 동, 남, 북 삼면으로 강물이 흐르고, 서쪽에는 ‘육육봉’이라 불리는 암벽이 솟아 있어 나룻배 없이는 드나들기 어려운 곳이다. 그야말로 ‘육지 속의 섬’인 이곳은 단종의 유배지로도 유명하다.
지금도 단종의 생전 모습을 지켜본 관음송(천연기념물 제349호)과 단종이 매일 해거름마다 올라서 한양 쪽을 바라보며 슬픔에 잠겼다는 노산대, 단종 유배 당시 세웠다는 금표비, 영조 때 세운 단묘유지비가 있어 단종애사를 좇는 답사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그 밖에도 영월에는 산과 강이 어우러진 절경과 억겁의 세월을 고스란히 담은 석회동굴이 산재한다. 하지만 한꺼번에 모든 것을 섭렵할 필요는 없다. 눈이 즐겁기보다는 몸과 마음이 두루 편한 여행이 삶의 활력소가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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