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신조 총리는 최근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 위안부 강제동원의 증거가 없다며 사과할 뜻이 없다고 밝혀 국제시회의 비난을 받고 있다.
그런데 비즐러는 드라이만을 훔쳐보면서 그처럼 베토벤 음악과 브레히트 시를 함께 이야기할 수 있는 여자를 사귀고 싶어했고, 결국 드라이만을 돕고 함께 반독재운동을 한다. 과연 무엇이 ‘전체주의 톱니바퀴 하수인’을 ‘자유인’으로 뒤바꾼 걸까. 그것은 바로 ‘수동적 체제순응 작가’ 드라이만의 ‘휴머니티’와 ‘능동적 체제동조자’ 비즐러의 ‘반성적 사유’ 때문이다. 나는 비즐러를 보면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소설 ‘독일어 시간’(지그프리트 렌츠)의 ‘예프젠’이 환영처럼 떠올랐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 뉘른베르크 국제재판에서 괴링 총리 등 A급 전범 24명이 처벌받았다. 그런데 나치 범죄가 고위급 몇 명만의 작품이던가. 비즐러 같은 중간 관리들은 죄가 없는 것일까.
1938년 아돌프 아이히만은 유대인 담당부서 과장이었다. 1941년엔 ‘유대인 문제 최종해결’(인종말살)을 위한 베를린 교외 반제호반에서 서기를 맡았다. 그는 일의 선악을 떠나 중간 관리로서 상부 명령에 충실하게 따른다는 차원에서 아우슈비츠 수용서 계획을 열심히 짰다. 패전 후 아르헨티나로 피신, 15년간 숨어 지내던 그는 이스라엘 비밀정보기관인 모사드에 압송돼 예루살렘에서 재판을 받는다. 그 유명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재판(1960~61) 때 사람들은 처음엔 아이히만이 정말 괴물일 거라고 생각했다. 정신병자가 아니고야 아우슈비츠의 만행을 계획할 리 없을 테니 말이다.
1961년 4월18일 이스라엘 예루살렘 재판정에 선 유대인 학살 책임자 아돌프 아이히만.
“(아이히만은) 사악하지도, 유대인을 증오하지도 않았다. 단지 히틀러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에서 관료적 의무를 기계적으로 충실히 수행했을 뿐이다. 가정에서도 그는 아이들을 끔찍하게 돌보는 가장이었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1963년)
한나 아렌트는 자기가 하는 일의 의미를 전혀 생각해보지 않는 ‘반성적 사유의 결여’ 탓에 그가 ‘냉철한 톱니바퀴 기술자(공무원)’가 되어 유대인을 학살했다고 결론지었다. 1999년 프랑스 보르도에서 전범재판을 받은 친독 경찰관 모리스 파퐁도 유대인 1000여 명을 아우슈비츠로 보냈으면서도 “나는 죄가 없다. 공복으로서 최선을 다했을 뿐이다”라는 변명을 일삼다 프랑스 사회를 발칵 뒤집은 적이 있다. 반성적 사유의 결여! 아이히만과 파퐁의 공통점이다. 반성적 사유! 이것은 또 그들과 ‘타인의 삶’의 비즐러를 갈라놓는 결정적 차이다.
이처럼 악의 근원이 평범한 개인의 무반성적 사유에서 싹트는 것을 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라고 정의한다. 누구든 태어날 때부터 악마로 태어나지는 않는다. 히틀러의 여비서도 히틀러를 ‘친절한 아버지 같은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실제 히틀러는 시골 이발소집 딸 에바 브라운에게 순정을 바쳤다. 나치즘의 이데올로그(선전부장)였던 괴벨스 역시 여섯 아이의 자상한 아버지였고, 이라크 포로를 개처럼 끌고 다니며 기념사진을 찍은 여성 미군 ‘린디 잉글랜드’ 일병도 순박한 시골처녀였다.
그래서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은 비정상적인 일을 저지른 사람을 반드시 비정상으로 볼 수 없다는 데서 출발한다. 평범한 사람도 비정상적인 상황에서 반성적 사유를 하지 않으면 아이히만처럼 아우슈비츠의 만행 같은 일을 저지르고,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도 모른 채 ‘공복으로서 일만 열심히 했을 뿐’이라는 변명을 일삼는 천박함의 나락으로 떨어진다는 것이다.
‘인간의 이성에 대한 신뢰를 잃게 한 아우슈비츠 대학살 이후 예술은 가능한가’라는 아도르노의 물음에 짓눌린 작가들은 ‘반(反)파시즘’을 주제로 한 작품을 쏟아냈다. 독일 소설 ‘독일어 시간’(1968)이 특히 관심을 끄는 것은 작중 인물 가운데 맹목적인 의무관을 보여주는 예프젠이 아이히만과 닮았다는 데 있다. 사실 나치시대 대부분의 독일인이 이런 ‘무반성적, 맹목적 복종심’에 빠져들었다.
“…보통 사람들에게 있어 커다란 집단에 소속되지 않았다는 느낌을 갖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은 없어 보인다. 독일 국민들이 나치주의에 얼마나 강하게 반대하는지의 여부와 무관하게, 고립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독일에 소속될 것인가의 선택에 직면한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후자를 택하게 될 것이다.” -에리히 프롬 ‘자유에서의 도피’, 건국대 2006년 수시1
베를린의 지시에 절대복종하는 경찰관 예프젠은 상부 명령대로 죽마고우 화가 난젠에게 창작금지 명령을 전달하고 그를 감시한다. 하지만 끝까지 반성할 줄 모르기 때문에 비즐러와 달리 인간성을 상실한다. 죽마고우를 탄압하고, 탈영병인 아들을 고발하고, 화가의 모델이 되었다는 이유로 딸을 내쫓는다. ‘독일어 시간’은 상부가 부여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우정의 단절도, 가정의 파탄도 감수하는 ‘평범한 인간’ 예프젠을 통해 그런 인간들의 ‘맹목성’(반성적 사유의 결여)이 바로 나치 독일을 유지한 원동력이었다는 걸 보여준다.
물론 예프젠이 소설의 주인공은 아니다. 나치 치하에서 실제로 창작금지 처분을 받았던 화가 에밀 놀데(1867~1956)를 모델로 한 박애주의자 난젠이 주인공이다. 나치는 1937년 “자살기도자, 광인, 장애인, 맥주에 찌든 천치들”이 독일 예술을 타락시키고 독일 민족을 몰락으로 이끈다며 에밀 놀데, 오토 딕스, 모딜리아니, 샤갈, 파울 클레, 칸딘스키, 뭉크, 바우마이스터 등 오늘날 이름만 들어도 쟁쟁한 거장들을 퇴폐 미술가로 지목해 탄압한다. 그리고 ‘독일어 시간’에서 우생학을 바탕으로 독일 민족의 우수한 적자생존 능력을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생물선생 프루겔처럼 ‘스포츠맨 같은 게르만 민족의 완벽한 몸매’를 찬양하는 삼류 인물화를 중심으로 ‘위대한 (관변) 독일미술’전을 대대적으로 열었다.
‘독일어 시간’의 주인공은 우리에 비유하면 민족개조론(1923)을 발표하면서 친일의 길을 걷는 이광수가 아니라, 신간회(1927) 활동으로 옥에 갇혀 소설 ‘임꺽정’을 신문에 연재한 벽초 홍명희 같다. 그런데 작가는 ‘적극적 나치 동조자’ 예프젠에 대해 죄가 명백하기는 하지만 ‘법률에 의해 기소되기 어려운 범죄자’로 처리한다. 즉, 살기 위해 침묵을 지킨 결과 공조자가 되고 만 절대다수의 소시민 계급의 죄는 시대적 상황 탓으로 돌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당국으로부터 임무를 부여받지 않았으면 경찰관 예프젠은 그의 딸 힐케의 말처럼 자녀들에게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는 자상한 아빠요, 순찰용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마을의 치한을 잡거나 무너진 방둑을 손질하는 착한 중년 아저씨이기 때문이다.
역사를 법으로 재단하는 사법적 실증주의의 한계를 지적한 신학자 마르틴 부버가 아이히만의 사형에 반대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는 아이히만에 대해서 눈곱만큼의 동정도 없지만 아이히만의 처형이 평범한 독일인들의 죄의식을 덜어줄까 우려했다. 평범한 독일인들이 소수의 전범들에게 사법적 심판을 가해 책임을 전가함으로써 자신들은 나치의 범행에 대한 면죄부를 부여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3월8일 애국국민운동대연합과 활빈단 등 시민단체 회원들이 일본대사관 앞에서 위안부 동원 강제성을 부인한 아베 총리를 규탄하는 집회를 열고 있다.
최근 일본 정부는 종군위안부 강제동원을 공식적으로 부인해 과연 일본인들이 비즐러인지, 아이히만인지, 예프젠인지를 심각하게 고민하게 만들었다. 정말로 일본의 15년 전쟁(1931~1945) 은 아이히만과 예프젠 같은 사람도 없이 도쿄재판 당시 처벌된 도조 히데키 총리 등 소수 A급 전범들만의 ‘순수창작물 과거사’라고 할 수 있을까. 제국헌법(1889~1945)에서 최고주권자는 분명히 (쇼와) 천황이었는데도 말이다.
추천도서 ‘독일어 시간’(지그프리트 렌츠, 정서웅 옮김, 민음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