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토고가 고향인 에마뉘엘 아데바요르(왼쪽)와 프랑스 출신의 티에리 앙리는 아스널에서 한솥밥을 먹고 있다.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FA Premier League)의 모토다. 프리미어리그가 무슨 마술이라도 부리는 것일까? 매주 최정상급 선수들이 펼치는 플레이에 전 세계가 들썩들썩한다. 프리미어리그의 세계로 풍덩 빠져보자. 프리미어리그를 이해하기 위한 7개의 키워드 : p.r.e.m.i.e.r
P : 프리미어
프리미어(premier), 영한사전의 편집자는 이 단어를 아무 때나 써서는 안 된다고 설명한다. ‘최고의, 최초의, 으뜸의’라는 뜻을 지닌 이 단어는 영국과 그 연방에서는 여왕의 다음 자리, 즉 국무총리를 가리키기도 한다. 만약 누군가가 오늘날 잉글랜드 축구의 1부 리그를 최초로 이름지으려 한다면 틀림없이 ‘프리미어’를 떠올릴 것이다.
그들의 리그가 이 명칭으로 불리게 된 것은 1992~93 시즌부터로 불과 15년 역사지만, 1863년에 축구협회가 창설되고 1871년 클럽 대항전을 시작해 1889년 최초의 리그전을 펼친 잉글랜드 축구 130여 년 역사가 고스란히 프리미어리그로 승화됐기 때문에 최초이며 최고라고 부를 만하다.
프리미어리그는 한때 세계의 스타들이 거액을 지불하는 이탈리아와 스페인으로 이동하면서 침체기를 맞기도 했다. 이에 잉글랜드 축구협회는 클럽 수를 줄이고 승점제도를 공격 위주로 바꾸는 동시에, 1992년 1부 격인 프리미어리그를 창설하고 지구 곳곳에서 뛰어난 선수들을 영입함으로써 명실공히 세계 축구의 ‘프리미어’로 등극했다.
R : 랭킹
잉글랜드 리그는 4개의 디비전으로 구성된다. 1부 리그인 프리미어리그가 있고, 챔피언십으로 불리는 2부 리그가 있으며 3부, 4부 리그는 각각 리그 1, 리그 2로 불린다.
20개 클럽으로 구성되는 프리미어리그의 모든 경기는 홈 앤드 어웨이 방식으로 치러지며 클럽당 총 38경기를 뛴다. 8월에 시작해 이듬해 5월에 마치며, 하위 3개 클럽이 2부 리그로 추락하고 2부 리그 상위 2개 클럽이 프리미어리그에 합류한다. 그리고 나머지 한 자리는 2부 리그 3, 4, 5, 6위 4개 클럽이 플레이오프를 거쳐 차지한다.
프리미어리그에서 2부 챔피언십으로 추락하면 각종 광고, 방송 중계료 등에 큰 타격을 입으며, 재계약 시점이 된 선수들은 다른 클럽으로 빠져나가려고 한다. 결과적으로 지역 분위기가 침체되고 팬과 선수들의 명예가 훼손되기도 한다.
2006~2007 시즌에 프리미어리그로 승격된 팀은 왓포드, 셰필드, 레딩 세 팀인데 이 가운데 왓포드는 1982년 1부로 올라와 곧장 준우승까지 ‘거침없는 하이킥’을 날리기도 했으며 셰필드 역시 무시할 수 없는 카운터 파트너로 활약해왔다. 설기현 선수가 활약하고 있는 레딩은 1871년 창설된 팀으로 100년 넘도록 2부 리그에서 ‘활약’하다 2006~2007 시즌에 비로소 ‘백년 동안의 고독’에서 벗어나 당당히 프리미어 클럽이 됐다. 현재 중간 순위를 유지하고 있는데, 이 정도면 다음 시즌에도 1부 리그에서 활약하는 설기현 선수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잉글랜드 출신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웨인 루니.
프리미어리그는 ‘잉글랜드’ 지역에서 펼쳐진다. 그런데 잉글랜드 출신 선수는 점점 줄고 있다. 2007년 1월 현재 프리미어리그에 등록된 선수(임대 포함)는 총 491명. 이 중 잉글랜드 출신은 230명으로 겨우 46.8%다. 이를 영국(잉글랜드, 웨일스, 북아일랜드, 스코틀랜드)으로 확장해도 244명으로 약 49.7%에 불과하다. 프랑스(24명), 아일랜드(17명), 네덜란드(14명), 호주(11명), 포르투갈(10명) 선수들이 활약하는 가운데 우리나라도 이동국 선수까지 뛰어들어 4명이 됐다.
맨체스터, 리버풀, 아스널, 첼시 등 이른바 ‘빅4’에도 잉글랜드 출신은 27명(28.1%)에 불과하며 런던 연고의 아스널은 23명 엔트리 가운데 잉글랜드 출신이 단 2명이다. 프랑스 출신의 아르센 웽거 감독이 이끄는 아스널은 2006~2007 시즌의 베스트 11에 단 두 명의 잉글랜드 선수마저도 기용하지 않아 비판을 받았다.
잉글랜드 축구협회는 자국 선수를 보호하기 위해 이른바 ‘워크퍼밋’, 즉 취업비자 제도를 실시하고 있다. 워크퍼밋은 유럽경제구역(EEA) 소속 국가의 선수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유럽경제구역 이외의 선수들은 국제축구연맹(FIFA) 랭킹 70위 이내 국가 출신으로 해당 국가가 최근 2년 동안 치른 대표팀 경기 중 75% 넘게 출전한 선수여야 비자를 발급해준다. 자국 선수 보호를 위한 상당히 까다로운 조건인 셈이다. 그런데 잉글랜드 축구 발전에 기여할 만하다고 클럽이 입증하거나 감독이 추천하는 경우는 취업비자를 받을 수 있는 데다, 대부분의 유럽 대륙(유럽경제구역) 선수들에게는 이것이 해당되지 않기 때문에 잉글랜드 그라운드에서 잉글랜드 선수들의 입지는 점점 줄고 있다.
M : 미디어
스펙터클의 사회, 즉 끊임없이 구경거리를 찾아내고 이를 왕성하게 소비하는 시대의 핵심에 미디어가 있다. 현대인은 신체의 일부가 돼버린 리모컨을 들고 끝없이 채널을 돌린다. 그리고 축구 중계에 채널을 고정한다. 종목 특성만으로 보면 축구보다는 야구나 농구가 광고주에게 매력적이다. 휴지부가 거의 없는 축구는 광고효과가 잘 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를 전 지구적으로 확대해보면 사정은 전혀 다르다. 공격성, 몰입성, 속도에 더해 무엇보다 그 경이로운 단순성 때문에 축구는 세계인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지상 최대의 스펙터클이 축구이며, 그것을 만들어내는 원동력이 미디어다. 1990년대 이후 잉글랜드 리그가 그야말로 ‘프리미어’가 된 것은 이탈리아나 스페인과 달리 신속하고 정교하게 미디어와 결합, 22명이 뛰는 경기를 전 세계인이 볼 수 있도록 확장했기 때문이다.
이를 입증이라도 하듯 잉글랜드 축구협회는 2007~2008 시즌부터 2009~2010 시즌까지 3시즌 동안의 프리미어리그 중계권료를 전 세계 208개 지역을 커버하는 81개 블록 방송사에 6억2500만 파운드에 팔았다. 여기에 모바일폰과 인터넷 중계료 등을 합하면 프리미어리그의 향후 3년 총중계료 수입은 27억 파운드(약 5조원)에 이른다.
첼시의 호세 무링요 감독(포르투갈 출신. 좌).아스널의 아르센 웽거 감독(프랑스 출신).
축구가 현대인이 몰입할 수 있는 압도적인 스펙터클이 된 이후, 잉글랜드 출신의 스타들은 어마어마한 수입을 거두면서 잉글랜드 사회의 복합적인 문화코드로 자리잡았다.
이를테면 영국 사회의 보수화가 가속화하던 시절인 마거릿 대처와 존 메이저 시대의 축구 스타 폴 개스코인은 보수적이고 권위적인 당시 사회 정서에서 거칠고 반항적인 아웃사이더의 상징으로 꼽혔다. 반면 맨체스터의 옛 스타였던 데이비드 베컴은 토니 블레어 총리가 이끄는 ‘젊은 대영제국’의 아이콘이라고 할 수 있다.
베컴은 파격적인 행동과 스캔들로 권위적인 영국 사회의 또 다른 모습, 즉 비틀스와 비비언 웨스트우드로 상징되는 펑크 하위문화를 축구장 안팎에서 실천했던 것이다. 잉글랜드 팬들이 여왕이 사는 버킹엄에 빗대어 베컴 부부가 사는 저택을 ‘베킹엄’이라고 부르는 것은 잉글랜드에서 축구 스타가 갖는 복합적인 문화적 상징의 예라고 할 수 있다.
E : 이펙트, 효과
프리미어리그는 세계 축구의 선도 차량이다. 100여 년 전에 그들의 조상들이 그러했듯 현대 축구의 맨 앞에서 프리미어리그는 모든 것을 가장 처음으로 시작한다. 축구가 사회적 욕망과 갈등을 증폭시키는 ‘상징 전쟁’의 장이 된다는 것을 처음 입증했으며, 그로 인해 ‘훌리건’이라는 악몽도 가장 먼저 겪었다.
동시에 프리미어리그는 축구장의 난동을 치유하려는 숱한 해결책을 가장 먼저 시도해 성공한 곳이기도 하다. 프리미어리그는 축구장의 난동자들을 끊임없이 미디어에 노출함으로써 그러한 행위가 권할 만한 것이 아님을 알려왔다.
또한 프리미어리그는 세계 각국에서 뛰어난 감독과 선수들이 몰려들어 새로운 축구의 가능성을 실험하는 장이 된다. ‘빅4’ 중에서 첼시(호세 무링요, 포르투갈), 아스널(아르센 웽거, 프랑스), 리버풀(라파엘 베니테즈, 스페인) 등 세 팀의 감독이 외국인이며 맨체스터의 알렉스 퍼거슨도 스코틀랜드 사람으로 엄밀히 보면 ‘비잉글랜드’ 출신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 곳곳의 뛰어난 선수와 감독들이 속속 런던행 비행기 티켓을 끊고 있다. 슈퍼스타 황선홍 코치와 시민구단 돌풍을 일으킨 장외룡 감독 등 국내 수많은 축구인들도 일파만파의 효과를 발휘하는 잉글랜드로 건너가 급변하는 현대축구의 목격자가 되고 있다.
R : 로열티
지금 프리미어리그는 그 정체성에서 심각한 도전을 받고 있다. 앞서 언급했듯 프리미어리그에는 잉글랜드 출신이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런던을 연고로 하는 명문 구단뿐 아니라 인구 15만명에 지나지 않는 레딩 같은 작은 마을에서도 동아시아 출신 선수가 뛰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클럽 소유권도 ‘지구 부자’들에게 넘어가고 있다. 맨체스터는 미국의 글레이저 가문에 팔렸고, 첼시도 2003년 러시아 석유 재벌 로만 아브라모비치의 몫이 됐다. 최근에는 아랍에미리트연합(UAE) 두바이 정부가 4억 파운드를 제시하며 명문 리버풀을 사겠다고 제의했고 리비아의 가다피, 태국의 탁신 전 총리도 클럽 인수 의사를 밝혔다.
이렇게 프리미어리그가 ‘글로벌’화되어 간다면 과연 그들의 고유함은 누가 지킬 것인가. 바로 클럽의 팬들이다. 한결같이 다혈질이며 격렬하고 순정으로 똘똘 뭉친 팬들이 최후의 방어선이 되어 프리미어리그를 사수할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눈앞에서 뛰는 선수가 이웃집 청년이 아니라는 점에 아쉬움을 갖지만 저 멀리 동아시아 출신이라고 해서 섭섭한 것도 아니다. 증조부 때부터 지켜온 홈팀의 깃발을 자신이 지키고 있고, 또 자식들이 지켜나갈 것이다. 오직 자신들의 지극한 사랑만 훼손되지 않는다면 프리미어리그는 영원할 것이라고 그들은 믿는다.